책 감상

이윤섭의 『왕망』 - 불쏘시개

루모로마노 2025. 3. 28.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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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왕망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부하여, 그것을 작품에 활용해 보고자 자료로 구입했다.

하지만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고대부터 우리 민족이 외세를 물리친 것은 민중의 피로서 가능했다든가, 우리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민중의 땀, 민중의 각성으로 가능했다는 말은 하나의 문학적 수사로, 이러한 말들이 역사적 리더들의 탁월한 지도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혹은 이전의 영웅사관에서 탈피하여, 역사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민중들 또한 역사의 주체로서 살펴보자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 영웅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한산도 대첩에는 이름없는 조선 수군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라고 한다고 해서, 충무공의 탁월한 전략전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이윤섭은 서문부터 말을 매우 교활하게 한다.

지식인들이 '리더의 탁월함을 부정하고' 민중을 부각시킨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공을 민중에게 돌릴 것이라면 어떤 전쟁의 패배, 어떤 국가의 몰락도 민중이 잘 싸우지 못해서, 민중이 게을러서라고 말해야 한다'라 주장한다. 이는 논리적으로는 허수아비 치기이면서(누구도 리더의 탁월함을 부정한 것은 아니므로), 민중을 역사에 결코 부각시키지 않겠다는 비열한 의지마저 엿보이는 주장이다.

이어서 이윤섭은 '산업화는 민중의 공이자 자본가의 착취 결과면 후진국은 민중이 게으르고 자본가가 착취를 덜해서인가?'라고 하면서, 기업가의 탁월함을 직시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떤 기업이 도산할 때 왜 그 책임은 고스란히 노동자들이 떠안는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는다.

이윤섭은 이어서 '한국인은 공화정과 민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그래서 성군星君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지도자에게 큰 기대를 건다'라 말한다.(6쪽) 그런데 이것은 앞서 그가 한 말의 부정이다. 저자는 방금 리더가 아닌 민중을 부각시키는 통념을 비판하지 않았던가?

이어서 그런 '그릇된 지도자관이 널리 퍼진 이유는 일본만 비난하고 공화주의의 가치를 가르치지 않는 역사교육을 해서'라는 분석을 내놓는다(7쪽). 뜬금없이 일본이 받는 비판에 분개하는 보수우익의 버릇이 튀어나오는 것도 웃기지만, 일본 역시 제국이었지 공화국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말이 통 앞뒤가 맞질 않는다. 게다가 공화주의 가치 교육을 강조하면서 정작 '민중을 부각하는 역사관/통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것도 괴상하다. 역사의 주체로 민중을 부각하는 것이야말로 공화정, 민주정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이지 않은가.

논리 전개가 이렇다보니 독립 대한민국이 어떻게 민주공화국이 되었는지 설명하기가 참 난감해진 모양이다. 이에 대해 이윤섭은 '거의 유일하게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이해했던 이승만 박사의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그 원인으로 든다(8쪽). 물론 이윤섭의 머리에서 이승만이 저지른 (아동을 포함한) 자국민 학살과 민주화 운동 탄압은 지워졌거나, 알면서도 자기기만을 하는 듯하다.

보수주의자 특유의 나르시시즘은 상대에게 자신의 치부를 투사하는 것일까? 9쪽에서는 '체제 내에서 성공하기 어려운 절대다수의 대학생'들이 '주체사상'을 받아들였다고 하면서, 이번에는 또 주체사상이 '기득권을 철저히 보장하는' 사상이라고 했다. 도대체 무엇이 맞는 것인가?

보수주의자는 '민주주의자들은 거짓말쟁이이니 진실을 말하면 화를 낸다'라는 이상한 밈에 광적으로 집착하는데, 위에 적어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작 거짓말은 보수주의자들이 늘어놓고 있다. 아니 최소한 거짓말은 앞뒤 맥락을 갖추려는 노력이라도 한다. 이것들은 애초에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말이 되질 않으니 거짓말조차 못 되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저자는 갑자기 87년 민주화 이후 '거짓말할 자유가 대폭 신장되었다'(10쪽)면서, 그 결과가 '사기 탄핵'을 통해 주사파들이 옹립한 문재인 정권의 등장이었노라 주장한다. 그러면서 문재인을 왕망과 연결하여, 한국은 왕망 같은 정치인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다(11쪽)고 주장한다.

맺음말을 보면 더욱 가관이다.

이윤섭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전근대 조선족의 나라였는데, 이승만 박사가 가난한 나라 살림을 쪼개 이들을 근대적 한국인으로 교육시켰다는 것이다(189쪽). 한국인의 비율은 박근혜를 지지한 55% 정도고 나머지는 유전적으로 교화가 불가능한 조선족으로, 이들에게 온전한 자유민주주의 원리를 적용하기 힘드니 비상수단을 썼는데, 이것을 매국세력이 독재라 부른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189쪽).

게다가 이조(이씨 조선) 이후 지식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로 변했다고도 한다(189쪽).

이러한 공산주의 기득권을 옹호하여 부귀영화에 눈이 먼 대학생이나 재야 인사들이 김일성 집단과 내통, 민주팔이와 인권팔이를 하며 중공의 도움으로 촛불역모를 일으켰는데, 이를 통해 한국의 인구 중 조선족이 40%를 넘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190쪽).

황당한 주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국민혁명으로 주사파를 제거하고 조선족을 추려 그들만의 나라를 건설하게 하고, 한국인은 근대 국가를 따로 건설해야 한다'며 이 책이 끝난다.(190쪽)

떠도는 말로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80년대에 '주사파'였다가 '보수'로 전향한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서는, 정작 그 시대에는 주사파와는 거리를 두었던, 민주화운동을 하던 친구들을 주사파라며 광적으로 모함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한편으로는 주사파였던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꿋꿋이 민주화 운동을 해왔던 과거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책의 앞 날개를 보면 저자의 이력이 있는데, 이게 참 묘하다.

'한국 경제사를 공부할 생각으로 대학에 들어갈 때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여러 가지 이유로 학문 연구할 뜻을 접었다.'

대체 그 '여러 가지 이유'란 무엇이었을까. 이어지는 이력을 보자.

'대학시절에는 팸플릿, 소책자, 자료집을 작성하기도 했는데, 이때의 경험이 지금의 글쓰기에 도움이 되었다.'

팸플릿과 소책자는 학생운동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저자는 1965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나이로 스무살, 1984년에는 대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1987년 6월 항쟁 때 군복무를 하고 있었을지, 아니면 당시에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옥고를 치렀을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그는 어떤 이유로 학문 연구할 뜻을 접었고, 2025년 내가 지금 집어든 책에서는 열심히 민주주의의 가치를 모욕하는 중이다.

저자의 이력을 제대로 읽지 않은 내 탓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박근혜>,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개발 비사>같은 저서 목록을 잘 살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 책은 원래 '아이필드'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와다 이사오의 <흉노>나 장진퀘이의 <흉노제국 이야기> 등 좋은 책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 출판사가 바뀌었어도 증보개정판을 살만하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 책을 읽던 나는, 왜 아이필드가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내게 되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책의 뒷표지를 살펴보겠다.

 

여기에는 보통 책 자체에 대한 호평이나, 저자의 서술 중 그 주장의 핵심을 담은 문구를 넣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런 건 없고 왕망에 대한 다른 역사가들의 글귀를 적어두었다.

서문과 맺음말이 저 모양이니, 뒷표지까지도 '저자가 자신의 주장에 자신이 없어서' 궁색한 꼴을 갖춰놓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레이 황(이건 레이 황위로 잘못 표기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저자와 인용한 책 제목 사이에 '/'도 잘못 들어갔다. 기본적인 검수가 안 되었다는 뜻이다)의 <중국, 그 거대한 행보>나,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중국사>를 인용했는데,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자신이 경험한 일본제국의 폭력성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며, 위무제 조조의 체제 또한 계엄령으로 유지되는 사회라며 차가운 평가를 내린 역사가다. 그런 역사가가 '제국 일본이 비난당하는 걸 안타까워하는 저자 이윤섭의 책에 자기 글이 인용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 교정교열이 정말 엉망이다. 저자 이력에서 겹화살괄호가 들어갈 부분에 그냥 괄호가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dl 은 분명 '이'를 치다가 한영 변환이 된 것인데 수정하지도 않았다. 여러모로 편집도, 디자인도 좋지 못하다.

왕망에 대해 알고 싶다면 다른 학자가 정리한 책을 보거나 <자치통감>을 읽거나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나는 <자치통감>과 <진한제국 경제사>쪽을 참고하는 것으로 하겠다.

책은 물론 버릴 것이다. 이런 책에 돈 낭비를 한 것도 억울한데 시간낭비까지 할 수는 없으니. 가치가 있다면 근래 보수주의자들의 중국인이나 조선족에 대한 기괴하고도 유사역사학적인 혐오가 대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 정도.

한편으로는 이런 책을 추천한 모 블로거의 안목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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