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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

아카츠키 나츠메,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 1』

by 루모로마노 2018.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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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계 전생물’의 유행과 함께, 이런 현상을 분석하는 이런 저런 글 역시 범람하고 있다. 아마추어 비평을 이야기할 때 늘 지적하는 것이지만, ‘이세계 전생물’에 대한 비평 역시 지나치게 쉽고 안일한 결론을 ‘이미’ 내린 상태에서 말을 늘어놓는 모습이 보인다. ‘이세계 전생물’의 경우, 이를 공통된 소재로 하는 작품들을 일련의 ‘작품군’으로 묶어놓고 비평을 시도하는 모습이 종종 나타난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서 알아보기 쉬운 ‘소재’를 기준으로 삼아 논지를 전개하는 매우 안일한 방식의 비평이다.


 이런 방식의 비평이라면 『드래곤 라자』와 『반지의 제왕』을 억지로 묶어서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우스꽝스러운 결과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주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이 두 작품은 정 반대편에서 서 있다고 해도 좋은 작품이다. 전자는 개별 인물들의 자아탐색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라면, 후자는 선악의 대결과 역사의 거대한 물결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에 대한 비평을 시도할 때 안일하게 ‘판타지’라는 장르의 범주 안에 묶어버린 상태에서 논지를 전개하는 것은 게으름의 극치다.


 물론 하나의 장르 안에 속한 작품들에게서 공통된 점을 포착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장르에 대한 논의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장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개별 작품에 접근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개별 작품의 특성을 장르의 특징 안에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역시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감상을 적어보았던 『유녀전기』와 비교해보자. 역시 이 둘을 ‘이세계 전생물’이라는 틀에 일단 묶어 둔 상태에서, 그 틀을 바탕으로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의 비평을 시도하는 것은 성급하면서도 안일한 시도다. 『유녀전기』는 이세계의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함께, 그 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해보고자하는 장대한 실험이다. 나는 이 작품이, 거대서사가 종언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던 라이트노벨에서 정말 오랜만에 다시 부활한 거대서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아이디어는 아직 나 혼자만의 생각에 머물러 있고, 아직도 검토가 필요하지만, 이 아이디어가 옳다는 전제 하에서는,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은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세계로의 전이’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서사의 성격 자체가 다른 두 작품을 하나의 틀 안에서 논의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늘 그렇지만, 어떤 커다란 틀에 작품을 먼저 박아 넣고 접근하는 ‘편리하면서도 게으른’ 방법이 아니라,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이라는 작품 자체가 갖는 의의를 분석하는 방법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분석이 차곡차곡, 성실하게 쌓여야, 그때야 비로소 ‘소재’나 ‘장르’를 묶어서 전반적인 현상을 살펴보는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은 소서사가 독자에게 줄 수 있는 행복을 잘 잡아낸, 정말 오랜만에 읽는 유쾌한 작품이었다. 모든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을 사랑하는, 이른바 ‘미소녀 하렘’이 아니라, 여성 캐릭터들 각자가 욕망하는 바가 있고, 이것이 주인공이 바라는 바와 때론 맞아 떨어지거나 때론 충돌하며 투덕거리는, 그런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이 장점은 라이트노벨을 쓰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할 점을 정확하게 짚어준다.


 먼저, ‘생동하는 캐릭터’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이전부터 지적해왔던 것이지만, 라이트노벨이 되었든 판타지가 되었든 아니면 다른 어떤 무언가가 되었든, 소설은 소설인 이상 ‘인물’의 이야기여야 한다. 그리고 인물이 ‘생동감’을 갖기 위해선, ‘욕망하는 자’여야 한다. 또 이 욕망은 타인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오로지 그 인물만의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많은 라이트노벨 작품들이, 혹은 습작들이(내 예전 습작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런 작품들의 미소녀는 아주 예쁘장한 등신대 피규어에 지나지 않는, 오로지 주인공의 애정만을 갈구하는 글자 덩어리가 되어 있다. 이런 미소녀들의 욕망은 미소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그런 미소녀를 적어나가는 사람의 욕망이 아무런 필터 없이 그대로 투영된, 철저하게 타율적인 욕망이다. 그 자신의 욕망이 아닌 것이다.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은 이런 함정을 아주 멋지게 회피했다. 아쿠아도 다크니스도 메구밍도, 모두 독립적인 욕망을 가진 ‘인물’로서 잘 정립되어 있다. 그들은 카즈마에게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예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때문에 이들은 생동하며, 따라서 이들이 빚어내는 사건도 활기를 띤다.


 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만이, 흥미로운 사건을 만들어낸다.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 속에 나오는 사건은 그다지 진지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가볍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사건들을 흥미를 갖고 지켜볼 수 있는 것은, 그리고 그 안에 녹아든 개그에 웃을 수 있는 것은, 생동하는 인물들이 나름대로 분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인물들이 어설프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 뛰고 구르는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 애정을 갖고 작품을 읽어나갈 수 있다.


 작가 아카츠키 나츠메는 여기에 아주 멋진 향신료를 추가했다. 이 향신료를 통해 아카츠키 나츠메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색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판타지 세계 속에서 누리는 아주 소소한, 그렇지만 아주 소중한 ‘생활’이다. 거대한 악, 혹은 세상을 구할 퀘스트를 향해, 극기를 발휘하며 움직이는 주인공이 아니라, 자신과 그 주변의 자그마한 일상생활을 지키고자 분투하는 주인공에게서, 우리는 우리 삶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행복을 느낀다. 초라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멋진 모험이 아니더라도, 내 눈 닿는 곳의 생활만을 지켜나가는 삶이라도, 충분히 유쾌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이 작품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작품이, 2010년대를 지나 2020년대를 바라보는 아픈 청춘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로를 전해주는 그런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혹자는 이 작품이 지나치게 가벼워, 정말 고민해야 할 중요한 문제에서는 눈을 돌리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맡고 있는 역할은 그게 아니다. 이 작품은, 그저 그렇고 그런 소시민들이 투덕거리는 삶의 소박함을 노래하는 작품이다. 세상에는, 그런 라이트노벨이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겠는가? 몇 개 더 있다면 더욱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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