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이상으로 잘 만들었다.
전투 장면의 처절함이나 그걸 우씨-을파소의 전술 논의와 교차시키는 연출은 무척 좋았다.
특히 '중국어'로 살려달라고 비는 한나라군 장수를 고구려왕이 덮쳐, 꽤 긴 시간을 들여 고통스럽게 그 머리를 잘라내는 장면은 동북공정 논란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잔혹하면서도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가 아니다'라는 걸 확실히 드러내는, 일종의 쾌감을 주는 장면이기까지 했다.
신녀의 노출에 대해서도 유교나 불교의 입김이 닿지 않는, 국동대혈에서 고구려 고유의 신앙으로 제사를 지내며, '남녀가 함께 목욕하다 마음이 맞으면 혼인' 하는, 확실히 한(漢)과는 다르고, 기존 사극의 점잔빼는 행태와는 결이 달라서 좋았다.
늘 바이킹스나 ROME 같은 사극을 바랐던 나에겐 무척 반가운 작품이다.
(솔직히 선정성이 낡은 것이 아니라 선정성 '논란'이 낡은 것 아니던가?)
다만, 그런 장면들이 어디서 왔는지 좀 보인다고 해야 하나. 예를 들어 사극 <정도전>에서도 게임 <어쌔신 크리드>와 유사한 연출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고남무의 한나라 장군 참수의 경우 인상적인 연출이지만 영화 <호빗 : 뜻밖의 여정>을 연상시키고,
여인들이 나체로 고남무를 핥으며(정확히는 입에 얼음을 물고 그것을 왕의 몸에 비비는 것) 시중드는 장면은 드라마 <마르코 폴로>에서 쿠빌라이 칸의 하렘을 연상시킨다.
물론 <우씨왕후>가 고구려를 아직 유교나 불교가 닿지 않은 나라, 그리고 동천왕 때 오나라에서 '선우' 책봉을 받았듯 '북방의 나라'로 표현하면서 칸의 이미지를 왕에게도 씌우려는 의도라면 충분히 이해되는 연출이면서 한국 사극에서는 무척 신선한 연출이긴 했다. 일단 KBS에서는 시도할 수 없는 것을 과감히 시도했다는 면에서 점수를 높게 주고 싶다.
을파소의 한나라풍 의상 때문에 동북공정 논란이 좀 있긴 했지만,
위에서 살펴본 한나라와의 전투에서 드러나는 역사관도 그렇고, 또 다른 신하들은 확실히 고구려풍 의상을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걱정했던 것과는 다른 듯하다.
진대법을 둘러싸고 을파소와 다른 신하들이 벌이는 논쟁에서, 진대법 폐지를 주장하는 신하들이 "백성들이 아끼는 법을 잊어버리고 방종할 것"이라 하자, 을파소는 "백성들은 그 누구보다도 아끼는 법을 잘 안다"고 반론한다. 이때 진대법 폐지론자들이 "출신이 그래서 그런가 잘 안다"며 비아냥거리는데,
아마도 을파소가 농사를 짓다가 등용된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혹시 을파소의 집안이 유리명왕 때의 '치희'처럼 고구려에서 천대받는 한족 집안이라는 식으로 설정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을파소 혼자 한나라풍 복식을 하고 있는 것이 이해되는 설정이면서, 동시에 역사 오타쿠인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예를 들어 후금도 요동의 한족들 위에 군림하면서 피지배 농민으로 부리지 않았던가)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노출도 과감한 김에 대사도 좀 더 날카롭게 벼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대사 중에 "너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야"를 "너에게 죽음을 내릴 것이야"로 바꾼다든가.
걸핏하면 사형이 난무하는 고대의 피비린내에는 그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당장 동시대인인 제갈량도 유선한테 "장완, 비의, 동윤 등이 게으르거든 죽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니.
해씨-고씨 왕조 교체설도 활용해서, 마치 신라처럼 고씨와 해씨가 번갈아 왕위에 올랐다는 식의 묘사도 좋았다. 내가 그렇게 많은 고구려 사극을 본 건 아니지만 이걸 활용한 사극은 <우씨왕후>가 최초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도 만약 이 설을 차용한다면 계루부=황부=황룡국=고씨가 소노부=비류국=추모왕 해씨를 몰아내는 식으로 초기 고구려의 역사를 설정할 것 같은데, 어쨌든 고구려 5부 중 중부이자 황부, 황룡을 상징으로 하는 고구려왕의 모습이 위 장면에서 여러 장식물을 통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다만 고구려에서 과연 성씨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정된 가문의 이름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도 있으니, 이 점은 따로 생각해봐야겠지.
그 외에도 진대법을 중심에 놓고 이를 수호하는 왕후, 그러면서도 위치가 불안정한 왕후(이건 대가들을 보며 시선이 흔들리는 전종서 배우의 연기가 특히 좋았다)를 표현한 것도 아주 좋은 전개라고 생각한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우씨왕후는 고연우 VS 고발기 간 내전의 승자고, 이 내전은 동탁계(삼국지의 그 동탁이다) 군벌인 공손탁까지 개입한 국제분쟁의 성격까지 띤 고구려의 위기였다. 이 내전의 주역으로서의 우씨왕후가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하면서 1화의 감상을 마치도록 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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