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에 연재했던 6부작 '조조-원술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본 유비-원술 전쟁'을 좀 더 간략하게 정리하고, 글의 배치를 바꾼 버전입니다. 전작과 달리 지도를 첨부하여 시각적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프롤로그. 유비의 서주 데뷔
서주의 호족과 제휴한 서주목 도겸은 양주 단양군 출신이었습니다. 단양군이 어디냐 하면 말릉현, 즉 훗날 오나라의 수도 '건업현'이 위치한 곳입니다.
이러한 출신 덕인지 도겸은 이른바 '단양병'이라 불리는 정예병 집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서주 호족의 지지와 단양병이라는 무력을 바탕으로 꽤 적극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북쪽으로는 공손찬과 손잡았는데, 이러다보니 당연히 공손찬의 적, 원소 계열의 군벌인 조조와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의』에서 인자한 노인으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도겸은 조조-원술이 쟁패를 벌이는 예주에 자신도 한 발 걸치면서(패국 패현=소패 장악), 공손찬과 원소의 전쟁에도 개입하는 등 활발한 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192년에는 공손찬에게 호응하여 연주 동군을 침범했다가 조조에게 패퇴한 일까지 있으니, 조조가 자기 아버지 조숭을 죽인 범인으로 도겸을 지목한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이때 태산군 화현에 머물고 있었다고 하는데, '태산군'이라는 이름 때문에 태산 근처에 있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태산군이 관할하는 지역은 남북으로 길쭉하게 생겼는데, '화현'은 그 남쪽 끄트머리에 있어서 오히려 서주 낭야군 개양현과 가깝죠.
즉, 조숭은 도겸 코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조조도 태산태수 응소를 시켜 급히 조숭을 피난시키고자 했지만, 도겸의 북진이 더 빨라 조숭은 죽고 맙니다.
도겸이 정말로 조숭을 호위하려 했는데, 호위로 보낸 장개가 문제를 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장개는 핑계고 도겸의 군사 행동 과정에서 조숭이 사망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물론 도겸이 연주에서 패퇴한 분풀이로 조숭을 죽였을 가능성도 충분하지만(강족 토벌 당시 장온과의 일화를 보면 도겸의 성격은 결코 좋지 않죠), 도겸의 또다른 부하 착융 역시 도적으로 광릉을 약탈하는 등의 행적을 보인 걸 보면 도겸 휘하 집단의 기강이 대략 이랬을 수도 있겠습니다.
여하튼 193년 가을과 겨울(7월~12월) 벌어진 조조-도겸 전쟁에서 조조는 도겸을 크게 이기고 서주를 도륙합니다. 서주 호족 입장에서 보면 도겸은 10여 개 성이 도륙당하는 동안 군사적 무능만 드러낸 셈입니다.
이듬해(194년) 봄(1월~3월)에 조조는 연주로 회군했다가, 여름(4월~6월)에 2차 서주 도륙을 개시합니다. 이때 다섯 성이 도륙당하는 동안 도겸은 원래 서주의 치소인 팽성국 팽성현도 버리고 동해국 담현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도겸을 내버려둔 채 담현 동쪽으로 향하던 조조 앞에 유주에서 내려온 기마집단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유비입니다.
유비는 도겸의 장수이자 역시 단양병인 조표와 합류, 담현 동쪽에서 조조를 상대합니다. 「무제기」는 조조가 유비와 조표를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담현 동쪽 회전 이후 조조의 행적이 담현 '서쪽'의 양분현인 것으로 보아 약간은 의심되는 기록입니다.
이때 유비 휘하 병력 구성은 꽤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일단 공손찬의 장수 전해와 함께 온 유주의 기병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오환족을 비롯한 이민족 기병이 유비의 군단을 구성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유비의 휘하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위나라의 북방 이민족 전선 지휘관이 되는 전예도 포함되어 있었죠.
이때 유비가 「무제기」의 기록대로 격파당해 큰 손실을 입었다면 도겸이 조조와의 최전선인 '예주 패국'에 유비를 예주자사로 삼으면서까지 배치할 이유가 없습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서주 호족 미축과 진등도 유비를 새로운 '외부의 군사지도자'로서 지지할 이유 역시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담현 전투는 최소한 조조의 일방적 승리는 아니며, 유비의 병력 손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게 옳습니다.
담현에서 물러난 조조는 서쪽 양분현으로 물러나 분풀이하듯 그곳을 또 도륙합니다. 그러나 조조는 서주에 더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여포와 연합한 연주 각 지역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 해에 도겸의 나이 63세. 패배의 충격인지, 서주 호족의 민심이 자신을 떠나 유비에게로 옮겨갔다는 사실에 실의한 탓인지, 도겸은 쓰러졌습니다.
도겸은 일단 유비를 패국 패현에 배치하여 대(對) 조조 전선을 감당하게끔 했지만, 서주 호족들의 마음은 이미 군사적 무능을 드러낸 도겸과 단양병에게서 떠난 뒤였습니다. 이들 호족의 대표인 미축과 진등은 죽음을 앞둔 도겸에게 유비를 후계자로 삼으라 권합니다.
도겸 역시 자신이 군사적 무능을 드러낸 상황에서, 서주 안에서 붕 떠버릴 단양병의 미래, 자식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젊은 군사지도자 유비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유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습니다.
자신을 서주목으로 추대하려는 미축과 진등에게 유비는 "원술이 대신하는 게 어떻냐"고 묻습니다.
이미 작년(193년) 10월에 공손찬이 유우를 죽이는 정치적 악수를 두며 몰락의 물꼬를 텄으니, 유비 입장에서는 원술 밑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죠. 어쩌면 이때 유비는 자신이 최소한 공손찬 밑에서 누리던 지위를 원술 밑에서 누리거나, 죽은 손견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거덜난 서주 및 단양병 수습 문제를 자신이 맡는 것보다는, 원술이 맡는 게 차라리 나을 테니까요. 그렇게 하면 유비는 패국 패현을 거점으로 자신의 예주자사 자리를 마음껏 활용하여 원술에게 절실한 '예주전선 담당 사령관'의 지위를 누릴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서주 호족에게 원술은 그냥 황당한 선택지였습니다. 일단 애초에 도겸은 공손찬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원술과 협력하긴 했어도, 원술과 직접적인 동맹은 아니었으니까.
원술의 원래 기반은 저 멀리 서쪽, 형주 남양군과 예주 여남군 일대였고, 회남 지역인 구강군 수춘에 도착한 것은 조조에게 박살나고 도망친 작년(193년)의 일이었습니다. 접점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도겸처럼 조조를 상대로 군사적 무능을 드러낸 원술을 뭘 믿고 서주를 맡긴단 말입니까?
북해상 공융 역시 공손찬 쪽에 가깝다보니 '원술은 아니다'라며 유비에게 서주목이 되길 권합니다.
서주 호족은 발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유비를 서주목으로 추대하는 한편, 원술과 확실히 선을 긋고, 조조의 재침략을 막기 위해 반동탁연합 맹주였던 원소의 권위를 이용했습니다.
의외로 원소는 선선히 유비의 서주목 취임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계산이 있었을 겁니다.
먼저 공손찬계 무장인 유비를 공손찬으로부터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
경쟁자인 원술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
이 시점에 연주를 전부 날려먹고 몰락을 앞두고 있는, 최소한 그렇게 보이는 조조를 대체할 세력이라는 점.
이런 앞뒤 상황이 겹쳐 유비는 처음으로 군웅들과 대등한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서주 호족이 새로운 '외부 군사 집단'과 계약을 맺어버렸으니, 계약 갱신이 안 된 단양병의 처지는 서주에서 붕 떠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훗날 유비가 서주를 잃는 한 계기가 됩니다.
한편으로 원소가 유비를 서주목으로 승인한 사건은, 조조가 원소에게 원한을 품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첫째는 원소가 괜히 장막을 자극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어 자신을 공경에 빠뜨린 일.
둘째는 원소가 자신의 아버지 조숭의 호위 책임자인 태산태수 응소를 돌려보내지 않고 보호한 일.
셋째는 유비의 서주목 지위를 승인하여 여차하면 자신을 버릴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일.
넷째는 한창 전쟁 중인 여포와 화친할 것을 권한 일.
관도대전의 씨앗은 이때 이미 뿌려졌던 셈입니다.
1장. 나무위키를 믿지 마세요(유비-원술 전쟁의 시점)
조조는 196년 6월에 황제 유협에 의해 '진동장군'으로 임명되었다가, 같은 해 9월 12일 '대장군'으로 승진합니다.
「선주전」은 유비 역시 이 해에 진동장군으로 임명되었다고 되어 있어서, 나무위키 등에서는 유비의 진동장군 임명 시점을 196년 9월 이후로 추측합니다.
즉, 나무위키에서는 196년 6월~9월 시점에 조조가 '진동장군'으로 있다가 '대장군'으로 승진하면서, '서주 군벌인 유비를 회유하기 위해', '진동장군' 자리를 내린 것으로 서술합니다.
그러면 196년 9월까지는 유비가 서주목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따라서 원술과 유비의 전쟁은 196년 9월 이후가 된다는 서술이죠.
그러나 이런 서술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여포가 하비성을 차지한 뒤'에 일어난 '학맹의 반란'이 분명 196년 6월의 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단양병 조표의 반란, 이에 호응한 여포의 하비성 점령은 유비와 원술 간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므로, 유비는 6월 이전에 원술에 패해야 하며, 그 전쟁이 한달이 넘게 끌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유비와 원술의 전쟁은 4월~5월 중에 벌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선주전」의 편찬자 역시 이러한 문제를 알고 있었는지, 주석을 통해 '두 명의 진동장군' 설을 주장합니다. 이 시대에는 여기저기서 멋대로 관직을 내리던 시대이니 조조가 황제에게서 진동장군을 받으면서 동시에 유비에게 진동장군을 내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무제기」와 충돌하는데, 여포가 학맹의 반란에 시달리던 시점인 196년 6월에 조조는 양봉, 한섬 등과 황제를 두고 한창 씨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제 유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분투하던 조조에겐, 자신이 받은 진동장군 자리에 유비를 또 올려놓을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이 무렵을 다룬 「선주전」의 기록은 『삼국지』의 많은 기록이 그렇듯(「노숙전」과 「여몽전」의 익양전쟁 당시 장사군의 무난한 항복을 받아냈다는 서술과 달리, 「여대전」에서는 장사군에 관우에 호응한 반란이 두 번이나 일어나는 바람에 여대가 여릉군으로 물러나 수비한다든가) 또 하나의 혼란을 보여줍니다.
유비가 196년 원술에게 패배하고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겨 소패로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여포에게 공격당하는 바람에 조조에게 귀순, 조조가 유비를 '패'에 머물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무위키 등은 이 부분을 196년 후반, 소패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다시 여포에게 쫓겨난 유비가 조조에게 귀순하여, '소패가 아닌 패국 어딘가'에 주둔지를 받아서 여포와 대치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무제기」와 충돌하는데, 유비가 쫓겨나고 조조에게 귀순해야하는 196년 6월을 전후한 시점에, 조조는 유비를 받아줄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조조는 앞서 말했듯 낙양~허 일대에서 양봉, 한섬 등과 협천자를 위해 경쟁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한 단서는 198년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해에 유비는 여포의 공격을 받아(하내군에서 매입한 여포 측 군마를 탈취, 여포는 고순 등을 앞세워 소패를 공격, 조조는 하후돈을 파견하여 도움), 패퇴하던 중 예주 양국 경계에서 조조의 본대와 합류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여포는 조조와 유비의 영토를 관통하여 군마를 매입할 수 있을 정도로 '딱히 두 사람과 대립하는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
-198년 해당 사건은 유비의 군마 탈취가 조조, 유비와 전면전의 신호탄으로 해석될만한 성질이었다는 것
두 가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여포는 (진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조조와의 화친을 추구했습니다. 황제에게 올린 글에서도 '제가 조조와 약간 다툼이 있었는데 그게 저의 역심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라며 황실 및 조조에 대해 최대한 저자세를 취합니다. 따라서 196년 9월 황실이(조조가) 임명한 진동장군 자리에 있는 유비를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선주전」의 여포 공격 및 조조에 대한 귀순은 198년의 일이 뒤섞인 기록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는 남습니다.
조조가 유비를 '패'에 계속 머무르게 했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이에 대해 한 가지 가설을 세우고, 다음과 같이 타임라인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96년 6월 이후 어느 시점, 유비는 소패로 돌아갔다.
196년 8월 이후 어느 시점, 유비는 조조가 협천자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조조가 낙양에 입성한 것이 8월 18일, 유협을 데리고 환원관을 통해 빠져나온 것이 8월 27일의 일), 여포에게 복수하고자 조조에게 접근했다. 이것이 귀순 기록으로 남았다.
196년 9월 이후 어느 시점, 조조는 유비에게 자신이 대장군으로 승진하는 바람에 공석이 된 진동장군 직을 내리며, 동맹을 승인했다. 그리고 계속 패국 패현(소패)에 주둔하며 여포를 감시하라 명했다.
즉 여기서는 196년 9월 이후부터 조조와 유비의 동맹이 성립되어, 원술의 몰락이 확정되고 마침내 여포와의 전쟁을 시작하는(유비의 여포 군마 탈취) 198년까지 두 사람이 철저히 여포를 기만했음을 전제로 글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2장. 여포와 조표(단양병)의 배후는 원술?
도겸 사후 단양병 집단을 이끄는 조표와, 유비의 명을 받아 하비를 지키는 장비 사이의 갈등이 폭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이런 일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듯 여포가 하비성을 점령합니다.
여포의 하비 함락 직후, 원술은 여포에게 이런 서신을 보냅니다.
"내가 그대에게 감사할 것이 세 가지 있소.
첫째, 동탁을 죽여 원씨 일가의 원수를 갚아준 것
둘째, 조조의 연주를 공격하여 내 체면을 세워준 것,
셋째, 유비를 격파해 준 것.
감사의 뜻으로 쌀 20만 곡을 보내며, 병기가 부족하다면 크건 작건 말만 하면 얼마든지 보내주겠소."
저는 일단 이것이 '원술이라는 배후 세력'이 여포를 조종하여 조조와 유비를 괴롭혔음을 암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여포와 연합한 연주 인사들의 배후에 원술이 있다고 봅니다.
다시 '학맹의 반란' 사건을 살펴봅시다.
196년 6월, 여포가 머무는 하비성 내에서 장수 학맹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학맹의 반란은 학맹의 부장이었던 조성이 끝까지 여포의 편을 들면서 실패로 끝났습니다.
여포는 부상을 입은 조성에게 대체 왜 반란이 일어난 것인지 물었습니다.
조성은 이렇게 답합니다.
"학맹의 반란은 원술이 사주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진궁도 연루되어 있습니다!"
조성이 진궁을 모함한 걸까요? 아니면 진궁이 이 시점에 여포를 배신할 마음을 품고 원술에게 붙은 걸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194년 연주에서 조조에 대항하는 반란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을 때부터, 저는 진궁의 주군은 오직 원술 한 사람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첫째, 저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진궁은 뻔뻔할 정도로 198년 죽기 직전까지 여포에게 '원술과의 제휴'를 주장합니다. 한 해 전(197년) 원술은 군벌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는데 말입니다.
둘째, 194년~195년 여포와 조조가 벌인 연주 전쟁은, 곧바로 조조와 원술의 2차전으로 이어져, 196년 1월 원술이 파견한 진국상 원사의 항복으로 끝납니다. 아니, 그 후로도 조조는 천자를 모셔오라며 보낸 조홍이 원술의 장수인 장노에게 저지당한다든가, 영천과 여남에서 원술의 입김이 닿은 군벌(혹은 황건잔당)의 토벌에 나선다든가 갖은 고생을 하게 됩니다.
셋째, 진궁과 함께 연주 반란의 한 축이었던 장막은, 원군을 청하기 위해 '원술'에게 가던 도중 죽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장막은 원소의 원한을 샀기 때문에, 원술 밑으로 가야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194년부터 원술은 진궁 등 연주 인사들과 손을 잡았고, 한편으로는 원소에게 버림받은 여포를 고용하여, 195년까지 조조를 실컷 괴롭힌 후(정작 자신이 조조에게 손해를 본 건 거의 없으므로), 196년부터는 그들을 이용해 유비에게서 서주를 탈취할 음모를 꾸몄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조표를 비롯한 단양병들에겐 원술과 손잡을만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원술이 단양병들의 고향, 단양군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게임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는 손책이 여강에서 독립하여 주유 및 손견의 옛 장수들과 함께 강동을 평정한 것처럼 표현합니다만, 주유가 확실히 손책의 부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시점은 198년의 일입니다. 그 전에는 '원술의 장수로서 함께' 활약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요.
195년 무렵 손책은 원술의 명을 받아 장강을 건너, 유요를 물리치고 단양군을 점령합니다. 단양군의 태수로는 주유의 숙부인 주상이 임명되는데, 주유와 주상은 이후 원술이 '단양 태수를 원윤으로 교체하니까 수춘으로 돌아와라'라고 명령하자 군소리 않고 물러납니다. 즉 이 시점에 아직 '강동의 소패왕'은 탄생하지 못했으며, 단양군은 의심할 여지 없이 원술의 영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원술은 194년~195년의 반란으로 조조의 힘을 완전히 빼놓고, 손책을 파견해 강동 공략 사업을 추진하며, 마침내 196년에는 3만의 본대를 파견하여 서주를 접수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성공시켜가고' 있었던 셈입니다.
자신의 3만 군대가 회음, 우이 일대에서 유비와 대치하는 동안, 단양병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에 호응한 여포가 밖에서 하비성을 들이치는 식으로 꽤 치밀한 음모까지 꾸며서 말입니다.
이 전략이 성공했다면, 어쩌면 원술이야말로 회수와 장강 일대를 장악한, 남중국 6조의 시조가 되지 않았을까요.
3장. 여포, 원술의 개가 되기를 거부하다
20만 곡의 군량, 각종 병장기 제공을 약속하며 여포를 유혹해 유비의 배후를 무너뜨리고, 사기가 떨어진 유비를 바닷가까지(광릉군 해서현) 몰아붙인 뒤, 마침내 서주를 접수할 꿈에 부푼 원술.
그러나 여포는 그 꿈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원술이 제공한 물자를 받는 대신, 서주를 자신이 먹기로 한 것이죠.
그리하여 여포는 돌연 '동맹의 역전'을 일으킵니다.
「여포전」에 실린, 그 유명한 '화살로 극 맞추기' 일화가 이때 나옵니다. 원술이 장수 기령을 보내 소패의 유비를 공격하자 여포가 그 앞을 막아서고, 화살로 극을 맞춰 군을 물리도록 설득한 일화이지요.
이 일화는 「선주전」에 실린 일화와는 별개의 것, 그러니까 원술이 유비를 두 번 공격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광릉군 일대를 장악한 원술이(광릉에 손책의 외숙 오경이 배치됨) 유비를 바닷가까지 몰아붙인 것, 유비가 여포에게 굴복하고 여포가 유비의 처자를 돌려보내며 소패에 주둔케 한 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사실은 하나의 전쟁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이제 유비를 완전히 섬멸하려는 원술 앞에 여포가 나타나 '이 이상은 안 돼. 그리고 서주는 내 거다'라고 선언한 셈이죠.
서주를 차지할 생각에 잔뜩 기대에 부푼 원술에게, 여포는 어마어마한 뒤통수를 쳤습니다. 한달 넘게 유비의 주력을 묶어두느라 개고생을 했는데, 정작 서주는 여포가 먹어버렸으니까요.
그 직후에 일어난 것이 바로 학맹의 반란입니다.
진궁과 학맹을 통해 여포를 제거하고 서주를 차지하려는 계획도 실패하자, 사실상 이것으로 여포와 원술의 관계는 끝장나버립니다. 197년 원술이 황제를 칭했을 때, 혼담이 오가긴 합니다만(아마도 원술은 여포를 '외척'으로 두는 방식으로 다시금 남중국의 세력을 규합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패국상' 진규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앞서 말했듯 이후 여포의 외교는 협천자를 한 조조에 대한 저자세로 유지됩니다.
여포가 유비를 돕고, 소패를 내준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서주를 차지했다는 식으로 뭉뚱그려 말하긴 하지만, 여포가 장악한 서주는 기껏해야 팽성, 하비, 동해의 세 군(국)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서주 북부의 낭야국은 소건이라는 사람이 낭야상을 칭했는데, 여포는 그와 동맹을 맺는 식으로 회유해야 했으며, 또 그 소건을 태산의 장패가 죽이고 낭야를 차지해도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냥 장패랑 동맹을 맺어야 했습니다.
서주 남쪽으로는 또 어떨까요? 광릉군은 손책의 외숙 오경이 그곳을 지키도록 배치된 것으로 보아, 회수 이남 서주 남부는 원술의 영역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영토면에서만 서주 장악이 불완전했던 게 아닙니다. 여포는 서주 호족의 지지도 얻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서주 안에서도 군식구인 단양병의 지지를 받았을 뿐이죠.(도겸, 조표 사후, 여포가 단양병 집단을 흡수한 이후 등장한다는 점에서 고순을 단양병으로 보기도 합니다)
서주 호족 미축은 유비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진규(패국상)와 진등 부자의 충성도 불확실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유비를 죽인다는 것은 여포에게 정치적으로 매우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포는 조조와도, 원술과도 척을 진 상황에서 유비를 소패에 배치하여 조조와의 중재를 맡긴다는 선택을 합니다.
한편 조조는 영천, 여남 일대의 원술계 군벌(혹은 황건 잔당)을 물리치고 낙양으로 들어가, 한섬, 양봉 등과 대립한 끝에 황제 유협을 데리고 탈출, 허에 입성합니다. 동탁을 죽여 황실을 구했다는 허영심이 있던 여포에겐 원술보다는 조조와 손을 잡는 것이 더 매력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궁이 원술과의 동맹을 제안할 때마다 나타나 반대하는 '패국상' 진규. 그 '패국 패현'에 주둔하며 조조로부터 '진동장군' 직을 받은 '어떤 군벌'.
그림이 그려지시나요? 조조와 유비가 어떤 식으로 여포를 기만했는지?
4장. 원술의 발악
서주를 직접 차지하겠다는 계획이 좌절되긴 했지만 원술은, 적어도 원술 자신이 인식하기에는 성공적으로 강동 정벌을 완수했습니다. 자신의 '부하 장수' 손책이 단양, 오, 회계 3군을 무사히 점령한 것입니다.
원술의 양주(강동) 장악은 193년부터 196년까지 각 기록마다 같은 사건을 적어두고도 시기의 차이가 있어, 두루뭉술하게 "몇 년부터 몇 년 까지 사이의 일이겠거니" 해야 합니다. 「손책전」을 참고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후한서』 「효헌제기」나 『삼국지』 「무제기」는 간접적인 기록이라 힌트만 얻어야 하고, 「주유전」, 「손정전」, 「왕랑전」, 「유요전」, 「주치전」, 「손분전」을 함께 읽어야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힙니다.
여하튼 197년 초 시점에서 원술은 광릉의 오경, 단양태수로 주상, 오태수로 주치, 그리고 구강도 여강도 안 주고 멀리 '회계군'을 던져 준 손책 등을 통해 남중국의 패자(覇者)가 되었습니다. 미래를 아는 우리야 원술 따위의 세력이야 금방 공중분해되고 손책이 강동의 패자가 된다는 걸 알지만, 이 시점에서 원술의 머릿속 지도에는 예주 일부와 중국 동남부의 드넓은 지역을 자기 색깔로 칠한 지도가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197년 초 원술은 황제를 칭했습니다.
촉한은 성도를, 오는 단양을 어디까지나 임시 수도로 취급해서 정식 수도인 '윤'(장안-경조윤, 낙양-하남윤)으로 부르지 않았건만, 원술은 자신만만하게 구강군을 '회남윤'으로 바꾸며 자신의 구상을 만천하에 선포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원술은 여포라는 군벌을 '외척'으로 삼으며 자신의 세력권에 넣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한윤이라는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 자기가 황제가 된 사정을 설명하고 여포와의 혼담을 진행합니다만, 패국상 진규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여포는 원술의 사신 한윤을 허도로 압송해버렸고, 한윤은 역적으로 취급되어 비참하게 처형당합니다.
이때 원술의 휘하에는, 작년(196년)에 조조와 협천자 경쟁에서 패하고 귀순한 양봉, 한섬이 있었습니다.
마침 조조의 허도 조정에서는 '공손찬, 원술, 양봉, 한섬'을 4대 역적으로 규정하였으니, 그 중 세 사람이 손을 잡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원술은 양봉과 한섬에게, 자신의 장수인 장훈과 교유를 붙여 여포를 향해 진격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때도 패국상 진규가 활약합니다. 진규는 원술의 군대가 갑자기 합쳐진 군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고, 여포에게 이간계를 진언했습니다.
여포는 장훈과 교유를 쳐서 얻은 물자를 모두 주겠다며 양봉과 한섬의 배신을 유도합니다. 결국 장훈과 교유는 패주, 여포는 회수를 따라 신나게 반격하며 원술의 수춘을 향해 쳐들어갔습니다.
회수 일대를 약탈하던 여포는
"원술 당신은 평소에 맹장과 무사가 많다고 자랑하더니, 이제 내가 수춘 코앞까지 왔는데 그 맹장과 무사는 대체 어디로 갔소"라고 글을 보내며 조롱합니다.
194년~195년의 연주 반란부터 196년의 서주 장악까지 자신을 장기말로 쓰려던 원술에 대한 통쾌한 조롱이었습니다.
이에 원술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수춘성을 나왔지만 여포의 부대를 추격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죠.
한편 여포는 양봉과 한섬을 거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양봉과 한섬은 어쨌든 수배령이 내려진 역적이었으니까요. 이들을 사면할 권한도 없거니와 손도 더럽히기 싫었던 여포는, 이들을 그냥 방치해버렸습니다.
양봉과 한섬은 그대로 회수 일대의 도적떼가 되었는데, 그런 그들 앞에 전혀 예상치 못한 처형집행인이 나타납니다.
유비였습니다.
유비가 양봉을 속여 유인한 뒤 죽이자 한섬은 도망칩니다. 옛날 백파적 시절의 근거지 병주로 돌아가려 했던 것 같은데, 가던 중에 예주 패국 저추현에서 둔수(屯帥)로 일하던 장선이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합니다.
이로써 조조의 허도 조정이 역적으로 수배한 네 사람 중 둘이 죽었습니다.
한편 원술의 제국은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손책은 즉각 원술을 비난하며 허도 조정을 향한 충성을 맹세하고, 곧장 아버지의 옛 장수 주치(오태수)와 연합하며 단양으로 진격합니다. 다급해진 원술은 주상과 그 조카 주유를 수춘으로 불러들이고 일족 원윤을 단양태수로 임명합니다만, 광릉의 오경 또한 원술을 버리며 장강을 건너 손책과 합류하면서 단양까지 빼앗깁니다.(손책은 오경을 단양태수로 임명합니다)
텅 비어버린 광릉은 여포가 원술을 물리치며 차지한 듯한데, 여포가 조조에게 사신으로 보낸 진등이 광릉태수로 임명되기 때문입니다.
칭제 직후 순식간에 4개 군을 상실한 원술은 황제의 위엄을 되살릴 겸, 세력을 확장할 겸 주변을 둘러보다가, '진국'의 왕 유총과 그 재상 낙준을 겨냥합니다. 때마침 조조는 그해 2월에 완에서 과부와 놀아나는 추태를 부리다, 아들 조앙과 장수 전위를 잃고 대패했기에, 원술은 그가 군을 움직이지 못하리라고 계산했던 것 같습니다.
197년 9월, 원술은 진왕 유총과 진국상 낙준을 암살하고 곧장 진국을 들이칩니다. 그러나 조조는 허도 바로 동쪽에 붙어 있는 진국에서 원술이 함부로 날뛰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원술은 조조의 출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혼비백산하여 계속해서 격파당하며 동쪽으로 도망칩니다. 그는 끝내 장병들을 버리고 회수를 건너 수춘으로 돌아가고, 회수 이북에 고립된 고유(여포를 칠 때도 고생하더니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이풍, 양강, 악취 등 장수와 병사들은 패국 기현(蘄縣)에서 섬멸당합니다. 이곳은 패국 동남쪽 끝으로, 차라리 서주와 더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조조는 원술의 회수 이북 영향권, 그러니까 여남군, 진국, 패국, 양국 등에서 원술의 세력을 완전히 소멸시킵니다. 조조는 이 승리의 기세를 타고 11월에는 다시 장수를 공격해 남양군 완현을 비롯, 남양군 동부를 점령합니다.
원술의 수명은 2년 좀 안 되게 남아 있지만, 그는 이후 백성을 수탈하며 수춘에서 사치를 부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여강태수 유훈마저 원술의 세력에서 이탈할 움직임을 보이지요.
원술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그것은 여포의 멸망이 다가왔다는 뜻이었습니다.
5장. 조조-유비 연합군의 여포 정벌
198년 봄(1월~3월), 여포는 멀리 북쪽 하내군에서 군마를 구입합니다. 군마를 구입한 곳이 하내군이라는 사실에 주목해봅시다.
당시 하내군은 하내태수이자 거기장군인 장양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여포는 원소에게서 도망쳐 나올 때 장양과 인연을 맺었는데, 어쩌면 여포도 원술이 무너지면서 고립을 염려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장양과의 연계를 확인하는 한편으로, 장안에서 기주와 연주를 거쳐 서주로 오기까지 소모된 기병 전력을 확충하려 한 듯합니다.
『연의』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는 여포가 조조와 계속해서 적대한 듯 표현하지만, 여포는 조조가 협천자에 성공한 이래 꾸준히 화친을 시도했습니다.
진규와 진등 부자의 공작에 넘어가고 있었지만 일단 겉으로 보기에 이 화친 시도는 성공적인 듯 했습니다. 황제는 여포에게 조조나 손책과 연계하여 원술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고, 조조는 여포에게 좌장군 자리를 내려주는 등 은혜를 베풀며 그를 철저히 속였죠.
여포가 하내에서 군마를 구입한다고 해서 연주나 예주를 통과하며 조조나 유비에게 가로막힐 염려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유비가 여포의 군마를 빼앗았습니다.
여포에게 있어 이는 단순히 유비의 군마 도둑질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었죠.
조조와 유비가 마침내 여포를 적대하기로 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군마 공급이 끊긴 여포가 더는 기마 전력에서 우위에 설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여포는 즉각 고순과 장료를 보내 유비를 공격합니다. 『연의』는 이 공격에 유비가 금방 소패를 빼앗긴 것처럼 표현하지만, 유비는 최소 7개월(3월~9월), 최대 9개월(1월~9월)이나 여포의 맹공격을 견뎌냅니다.
조조는 여포 전선은 유비에게 맡겨 놓으면서, 일단 하후돈을 파견해 유비를 도왔습니다.
유비가 여포를 막는 동안 조조는 허도 주변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했습니다. 작년(197년) 9월 원술을 격파해 허도가 있는 영천군 동쪽을 안정시켰다면, 11월부터는 남양군을 공격하여 영천군 서쪽을 안정시켜 나갔습니다.
이 해(198년) 3월에는 남양군 양현까지 진격했죠.
4월에는 알자 배무와 중랑장 단외를 통해 이각의 삼족을 멸하며 관중 장악에 들어갔으며,
5월에는 장수와 유표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다시금 허도 서쪽을 안정시킵니다. (원소가 허도를 노린다는 첩보에 회군)
7월에 허도로 귀환한 조조는 일단 사태를 지켜보는데,
9월에 결국 한계에 달한 유비가 소패를 빼앗기고 서쪽으로 물러나자, 마침내 조조는 동쪽으로 움직여 유비를 맞이합니다. 조조와 유비는 정말 오랜만에 예주 양국(梁國)의 경계에서 직접 대면합니다.
그러니까 유비는 7~9개월 동안 조조가 서쪽 지역을 안정시키는 동안 '동쪽의 탱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셈입니다. 괜히 '천하 영웅은 나와 그대 뿐'이라고 한 게 아니라는 말이죠.
조조와 유비는 곧바로 연합작전을 개시, 10월에 팽성을 점령했습니다.
여포는 조조-유비 연합과 맞서 싸웠지만, 흑산적을 토벌할 때 함께했던 장수 성렴만 잃고 패퇴했죠.
그 후 여포는 조조에게 항복하려 했지만 진궁은 이를 말리며 계속해서 원술과의 동맹을 주장했습니다.
이것만 봐도 『연의』에서 묘사되는 '참모 진궁'이 얼마나 사실과 동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포위망을 뚫고 원술과 동맹을 맺는 시도 자체가 실패하긴 했지만, 성공했어도 의미없는 일이었습니다. 작년(197년)의 패배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원술이 무슨 힘이 있어서 여포를 구한단 말입니까? 이 시점에는 이미 진궁도 현실 감각이 없어져 일종의 착란을 일으킨 게 아닐까 싶을 지경입니다.
11월, 하내태수 장양은 여포를 직접 도울 수 없자 관중 일대를 공격하여 조조의 포위를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장양의 부하 양추는 여포의 몰락이 확정된 상황에서 계속 여포와 연계하려는 장양에게 불안을 느끼고 살해합니다. 양추는 조조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이번엔 장양의 또다른 장수 수고가 양추를 죽입니다.
수고는 장양의 잔당을 이끌고 원소에게 귀순하기 위해 하내군의 사견(射犬)이라는 곳에 주둔합니다.
외부의 모든 도움이 끊긴 하비성은 결국 순유와 곽가의 진언대로 수공을 펼친 조조에 의해 함락됩니다.
12월 24일, 조조는 여포와 진궁, 고순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에필로그.
193년부터 197년까지, 배후에서 천하 정세를 조종하던 원술은 198년 한 해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해인 199년 2월에 조조가 유유히 허도로 돌아갈 때도 그냥 지켜만 보았고, 4월에 조조가 황하를 건너 수고를 죽이고 하내군을 차지하면서 조조-원소 전쟁이 시작되었음에도 그냥 지켜만 보았습니다.
여름(4월~6월), 원술은 궁실을 불사르고 여강과 구강 사이, 또 강하군과의 경계를 이루는 대별산맥의 잠산으로 숨어들려 시도합니다. 거기에는 부하장수 뇌박과 진란이 있었거든요.
그러나 원술이 잠산을 찾아갔을 때, 뇌박과 진란은 부하고 뭐고 다 저버린 채 198년 한 해 동안 사치나 부리던 원술을 더는 주군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하들에게 버림받은 원술은 다시 수춘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회수를 타고 내려가, 서주만 어떻게든 통과해 바다로 나가면 청주로 갈 수 있을 듯했습니다. 청주에는 조카 원담이 있었죠.
원소 또한 황제가 될 야심이 있었으니, 원술은 그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했습니다. 어쩌면 이 해 3월에 마침내 원소가 공손찬을 죽이고 하북을 통일한 사실에 생각이 미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때 원술이 원소에게 보낸 서신은, 죽음을 앞뒀다는 직감 때문인지 원소를 향한 증오나 경쟁심은 전부 내려놓은 듯 보입니다. 오직 '원씨야말로 새로운 황실이 되어야한다'라는 그의 신념, 혹은 집착만이 절절히 느껴지는 편지입니다.
하지만 원술은 서주는커녕 수춘에 도착하기도 전, 6월에 수춘 남쪽 80리 되는 곳인 강정에서 피를 토하고 죽습니다.
조조를 몰락 직전까지 몰아넣고, 간신히 서주에 자리잡은 유비를 비참한 떠돌이로 전락시키고, 여포와 진궁을 인형처럼 조종하고, 손책을 손아귀의 칼처럼 휘두르던 원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었습니다.
원술의 이도 저도 아닌 행보는 유비에게 좋은 일만 해주었습니다. 유비는 원소에게 귀순하려는 원술을 저지하고자 조조의 명을 받아 서주로 향했고, 그대로 옛 기반을 되찾았죠.
8월, 조조는 장패와 동맹하여 청주 공격을 맡기는 한편, 자신은 황하를 건너 기주 위군(魏郡) 여양현을 공격하면서 원소와 직접 교전하기 시작합니다.
천하의 정세는 원술이 수년 간 휘저어놓은 결과물이었습니다. 원술이라는 시련은 새로운 영웅들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조는 원소에게서 벗어나 자립했습니다.
유비는 조조, 여포, 원술과 싸우며 군웅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웠습니다.
손책은 전설적인 무공으로 강동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촉한, 위, 오를 이룰 유비, 조조, 손책이 원술이라는 거름 위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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