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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연전의 왕, 명장 관우

by 루모로마노 2025.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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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는 상당히 많은 관우의 패배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악진한테 지고, 문빙한테 지고, 만총에게도 집니다.

하지만 어째서 오나라에서는 관우가 죽을 때까지 큰 위협으로 보고, 그 외의 여러 인사들도 관우를 높게 평가할까요.

이건 『삼국지』의 여러 '전'과 '기'를 종합적으로 읽어야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전체 역사서니까요.

이를테면 「악진전」, 「관우전」, 「오주(손권)전」, 「선주(유비)전」을 따로따로 읽으면

관우는 212년 10월 청니전투에서

그냥 악진한테 선제 공격을 걸었다가 패배하고 땅도 빼앗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악진전」, 「관우전」, 「오주(손권)전」, 「선주(유비)전」을 모두 종합해서 읽으면,

전술 레벨이 아니라 전략 레벨에서 관우의 활약상이 그려집니다.

바로 그 시기에 조조가 유수구 원정에 돌입하거든요.

이 유수구 전투는 조조군 전력뿐만 아니라 남흉노 호주천 등도 동원한 데다, 형주를 통한 적벽전투(208년) 이후 4년 만에 강동을 직격하는 방식의 공격이라 기병 전력에서 크게 열세였던 손권 측의 위기감이 고조된 전투입니다.

「선주전」에서 유비가 유장에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일단 유비 본대가 익주에 있기 때문에 손권의 구원 요청에 빠르게 응할 수 없었고, 양양태수(임시) 관우가 급히 응한 것으로 그려집니다.

이어서 「오주전」과 「무제(조조)기」를 함께 읽으면,

조조가 손권 측의 몇몇 장수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리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손권이 이듬해(213년) 1월까지 지연전을 펼치는 데 성공하고

유수구 전투는 방어측인 손권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여기서 다시 「악진전」과 「무제기」를 종합해보면

악진은 유수구 전투에 제때 참여하지 못하고 뒤늦게 동쪽으로 오며, 이후 합비에서 장료 등과 함께 주둔하게 되죠.

그럼 여기서 다시 「악진전」, 「관우전」, 「오주전」, 「선주전」, 「무제기」를 종합하면,

212년 10월부터 213년 1월까지

관우는 조조가 유수구에 총력을 기울이지 못하도록 악진을 비롯한 형주북부 주둔군의 어그로를 끌고, 일부 현을 빼앗겼으나 탱킹을 해냈으며, 조조의 유수구 집중 전략을 어그러뜨렸다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기록을 한 번 살펴볼까요?

「서황전」에는 유종의 항복과 조조의 남진 과정이 좀 더 자세하게 그려집니다.

서황은 일단 조조를 따라 번성에 입성합니다만, 유비가 번성을 비우고 양양 남쪽으로 내려갔음을 파악하자(「선주전」), 추격을 개시합니다.

이때 서황은 중려현(中廬縣), 의성현(宜城縣), 임저현(臨沮縣)을 점령했다고 하는데, 이 세 현 중에서 중려현과 의성현은 당시에는 남군에 속했지만, 이후 조조가 양양현과 함께 분리하여 '양양군'을 신설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즉, 중려현과 의성현은 양양에 더 가까운 현입니다. 반면 임저현은 212년 무렵에도 유비 측 영토인 것으로 나오고, 219년에 관우가 이곳을 지나 촉으로 탈출하려고 시도하는 등, 비교적 강릉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서황은 양양현-중려현-의성현 방향으로 유비를 추격하다가, 장판~한진(漢津) 일대에서 유비군과 교전한 후, 임저현을 치러 갔다고 봐야 합니다.

「서황전」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서황과 만총(滿寵)이 함께 한진에서 관우(關羽)를 쳤다고.

하지만 「관우전」이든 「선주전」이든, 유비군은 어쨌든 무사히 몸을 빼내 강하군 경릉현에 도착한 것으로 표현합니다.

즉 이상의 전기들을 종합 해석하자면 관우는 서황과 만총의 공격에서 유비를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엔 「문빙전」을 보겠습니다.

「문빙전」은 문빙이 악진과 함께 심구(尋口)에서 관우를 토벌했다고 적고 있는데, 악진과 함께 한 행적 때문에, 이 전투가 곧 212년의 청니 전투이며, 심구는 청니의 다른 이름이거나 가까운 지역이 아니냐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음 기록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문빙은 관우의 치중을 한진에서 공격해, 관우의 배를 형성(荊城)에서 불살랐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서황전」, 「관우전」, 「선주전」에서 본 익숙한 지명, 한진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문빙전」에서 다룬 심구 전투는 212년의 청니 전투가 아닌, 208년의 또다른 전투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삼국지』의 기록들은 착종, 즉 순서나 연대를 착각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심구 전투는 212년의 청니 전투가 맞고, 한진-형성 전투만 208년의 전투일 가능성도 있지요.

만약 관우를 한진-형성에서 공격한 게 맞다면, 「문빙전」 중에서는 하필이면 '치중', '배'를 공격하고 불태웠다는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선주전」을 보면, 유비는 '치중'으로 인해 진군이 느려져서 관우에게 따로 수로를 통하여 내려가도록 권했습니다.

유비가 내려간 당양-장판이 육로고, 관우가 내려간 한수가 수로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시 조조의 추격군 편성을 이렇게 재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육로로 간 유비는 서황과 만총이 추격한다.

-수로로 간 관우는 악진과 문빙이 추격한다.

문빙이 관우를 추격한 형성-한진은 당양이나 장판보다 한수에 더 가까운 지역이지요.

다시 모든 기록을 종합해보면,

관우는 악진과 문빙의 공격을 받아 치중과 배의 일부도 불타는 격전 끝에 그들의 추격을 떨쳐내고,

다시 한진에 와서 서황과 만총의 추격을(혹은 악진과 문빙의 추격까지) 모두 떨쳐내고 유비를 구해 강하군 경릉현(중하구)으로 들어간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적벽대전이라는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지요.

 

 

 

 

조조-유비 동맹 타임라인(193~199) (부제 : 조조군의 탱커 유비)

(*이 글은 전에 연재했던 6부작 '조조-원술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본 유비-원술 전쟁'을 좀 더 간략하게 정리하고, 글의 배치를 바꾼 버전입니다. 전작과 달리 지도를 첨부하여 시각적 이해를 도울

lumoromano.tistory.com

 

앞서 저는 198년, 7~9개월 간 유비가 여포군의 공격을 방어하며, 조조가 허도 주변을 안정시킬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사실을 정리한 바 있습니다.

이때도 관우는 유비의 곁에서 이러한 '지연전'에 큰 활약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우의 '지연전'에 강한 면모는

208년, 212년은 물론이거니와 215년 익양전투, 219년의 양양-번성 전투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관우가 무슨 천신이나 군신인 건 아니지만,

졸장이라고 미리 결론을 내고서 사서의 여러 부분을 '분절적으로' 읽어내면

'종합적으로' 읽었을 때 나타나는, 관우의 전공이 마치 마술처럼 등장하는 재미를 느끼기 쉽지 않습니다.

『삼국지』의 각 기, 전을 종합하여 읽지 않고(또 전략 레벨에서도 고찰하지 않고) '관우의 전공은 없는 사실을 창작해냈다'고 주장하는 사기꾼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이런 독서가 꼭 필요합니다.

『삼국지』의 재미는 여러 부분에 흩어진 기록들, 모순된 부분을 종합해서 읽어내는 것도 크니까요.

저의 조잡한 글이 많은 분이 『삼국지』 독서에서 재미를 느끼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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