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년 한복의 속내
한복은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원소와 동탁 사이에서 편을 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하들을 모아놓고 물음을 던졌다.
"동씨를 따라야 하는가, 원씨를 따라야 하는가?"
이 말을 들은 치중 유혜라는 사람이 한복을 꾸짖듯 외쳤다.
"나라를 위하는 일에 원씨가 어디있고 동씨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 말에 한복은 일단 원소 편으로 합류하면서 하북 연합군의 보급을 담당했지만, 그 일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아 연합군을 곤란하게 했다.
이런 한복의 태도에 유혜는 깊은 불만을 품었는지, 연주자사 유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한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유대는 유혜에게 이런 답장을 보냈다.
"동탁은 어차피 곧 죽을 테니, 동탁이 죽고 나서는 역적 한복을 토벌할 것이오."
문제는 이 편지가 한복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한복은 유혜를 죽이려 했지만, 장사 경무 등이 유혜를 자기 몸으로 감싸며,
"유혜를 죽이려거든 저부터 베십시오!"
라며 말린 탓에 도형(徒刑, 노동형)에 처하며 빗자루질을 시키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이러한 사건은 물론이고 동탁과 원소 사이에서 계속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탓에, 이번에는 부하 장수인 국의라는 사람이 결국 한복에게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국의는 한복에게 패한 뒤 원소의 밑으로 들어갔다.
원소는 국의를 맞이하는 한편, 숨겨뒀던 야망을 만지작 거렸다.
한복의 지위(기주자사 혹은 기주목)를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190년 왕광의 패배
1월에 반동탁연합군이 일어나자 동탁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일단 1월 12일에 홍농왕으로 격하되었던 전 황제 유변을 죽였다. 혹시라도 유변이 연합군의 손에 들어가면 헌제 유협이 아닌 유변을 정통 황제로 하여 동탁에게 대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월 10일, 동탁은 오경과 주비를 죽였는데, 이 두 사람은 청류 사대부의 마음을 얻자며 장막, 유대 등을 추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천한 사람들이 다 배신하여 연합군에 붙었기에, 동탁은 오경과 주비가 원소와 내통하며 연합군의 세력을 불려 주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2월 17일, 동탁은 장안 천도를 결정했다. 낙양의 백성들 강제로 장안으로 이주시켰지만, 동탁 본인은 낙양성 바깥에 주둔했다.
『연의』에서는 연합군이 여포를 물리치자 그 충격에 서둘러 장안 천도를 실행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 동탁은 그 전에 이미 장안 천도를 실행했으며, 헌제와 함께 장안에 간 것도 아니고 헌제를 먼저 보내놓고 자신은 낙양에 계속 주둔했다.
이는 지도를 보면 이해가 되는데,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듯 연합군은 북, 동, 남 세 방향에서 낙양으로 진격 중이었기에, 어느 한쪽이라도 뚫리면 황제를 빼앗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탁은 서영을 보내 손견과 조조를 격파하는 한편으로, 일단 낙양에서 물러나 전선을 줄이고자 했던 것 같다. 낙양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도 적이 낙양을 거점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3월 5일, 헌제 유협이 장안의 미앙궁에 도착했다.
3월 9일, 동탁은 낙양의 궁묘와 민가를 불태우고, 18일에는 원소와 원술의 숙부인 원외, 원술의 형 원기를 비롯한 낙양 내 원씨 일족 50명을 갓난아기까지 모조리 처형했다.
그런데 동탁은 6월 이후 돌연 기묘한 술책을 부린다. 반동탁연합군에 사신을 보내 회유를 시도한 것이다. 이때 하내태수 왕광을 찾아간 사람이 집금오 호모반인데, 왕광의 매부이기도 했다. 왕광은 역적의 편에 선 매부를 처형하면서 자신의 외조카이기도 한 호모반의 두 자식을 안고 울었다한다.
동탁의 사신을 죽이며 강경한 의지를 드러낸 왕광이었지만, 동탁의 기만책은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이때 왕광이 주둔한 하양현은 하내군의 서남쪽에 위치한 현으로, 왕광은 낙양의 정북쪽 방향에서 황하를 건너 진격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탁은 하양현 건너편에서 왕광과 대치하는 한편으로, 몰래 동쪽 소평진(189년에 황제와 환관들이 도망쳤던 그곳이다)으로 군대를 보냈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소평진에서 황하를 건넌 동탁군은 왕광을 기습하여 그 부대를 섬멸한다. 간신히 몸만 빠져나온 왕광은 고향인 연주 태산군으로 도망친다.
그렇다면 이때 왕광과 같이 하내군에 주둔했다는 원소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왜 동탁군의 기습 도하를 막지 못했을까?
그리고 왕광은 왜 하북 연합군의 지휘관이자 총맹주인 원소의 본영으로 간 게 아니라, 하남 연합군의 기반인 연주로 도망쳤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소는 이미 동탁 토벌보다는 기주를 얻고 세력을 확장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190년 한복의 몰락
『삼국지』 「무제기」 등은 원소가 191년 7월에 기주를 얻었다고 기록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한복의 몰락 시점도 이때로 짐작했다. 그러나 다른 기록과 종합해보면 한복의 몰락은 191년 7월이 될 수가 없다.
먼저 한복의 몰락은 원소 혼자 이룬 일이 아니라, 원소가 공손찬의 도움을 받아 이룬 것이다. 즉, 한복이 191년 7월에 몰락했다면, 그 시점에 원소와 공손찬은 협력 관계여야 한다.
그러나 원소와 공손찬이 이 시점에 협력관계였다면 『삼국지』 「손파로전(손견전)」과 모순이 생긴다.
원소와 공손찬의 협력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손견을 방해할 것이냐(원소), 손견을 도와줄 것이냐(공손찬)를 두고 대립하다가 공손찬의 사촌동생 공손월이 사망하면서 두 사람은 원수가 된다.
손견은 서영에게 패배한 후 군을 수습하여 191년 2월~3월 사이에 동탁군을 격파하고 낙양에 입성한다. 이후 5월~7월 사이 어느 시점에 원술의 명령으로 형주목 유표를 공격하다가 전사한다.
즉 손견이 원소의 견제를 받고 공손찬이 손견을 도와주는 사건은 191년 3월~5월 사이의 일이다. 이때 공손찬과 원소는 원수 사이가 되며, 따라서 191년 7월에 공손찬이 한복을 몰락시키겠다는 원소에게 협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삼국지』 「원소전」 역시 『후한서』 등과는 달리 원소가 한복을 몰락시킨 사건을 190년의 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어쨌든 이때 원소는 하내군 조양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는데, 왕광이 머무는 하양현이 하내군 서남쪽 끝인 것과는 정반대로, 조양현은 동쪽 끝에 위치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자면 원소의 군대는 조가현 남쪽, 청수구와 연진에 주둔 중이었는데, 이곳과 하양, 소평진 사이의 거리는 가깝지 않았다. 낙양보다는 오히려 연주에 더 가까웠고, 도저히 동탁의 도하를 감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복이 있는 위군 업현의 남쪽에서 언제든 한복을 공략할 수 있는 위치라고 보는 게 더 알맞았다.
한복의 부하들도 이런 상황을 눈치챘는지, 조부와 정한은 강노병 1만을 거느리고 '하양현에 있다가 철수'한다. 앞서 왕광이 하양현에 주둔 중이라 했으니, 왕광을 도울 전력이 1만이나 빠져버린 것이다.
즉 동탁과 대치 중인 하양현의 왕광은 내버려두고, 한복과 원소가 하내군 조가현-위군 업현 사이에서 대치했으니, 패배한 왕광은 원소에게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한편 원소에게, 모사 봉기가 기주 공략의 계책을 건의했다.
"공손찬을 불러 한복을 위협하신 뒤, 공께 투항하도록 권하십시오."
이때 원소는 자신이 태수로 있던 발해군을 넘겨주는 대가로 공손찬의 군대를 끌어들였던 것 같다.
『후한서』 「공손찬전」은 원소가 공손찬과 원수가 된 후, 공손찬을 두려워하며 그 세력을 분열시키고자, 공손찬의 또다른 사촌동생 공손범에게 발해태수 자리를 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지』의 「공손찬전」에 인용된 『한진춘추』의 서술은 다르다. 여기서 원소는 공손월이 죽고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 발해군을 넘겨주었는데, 공손찬이 원소를 배신했다며 그를 꾸짖고 있다. 공손찬이 대가 없이 원소의 의도에 따르지는 않았을 테고, 공손범에게도 원소는 형제(혹은 사촌형제)를 죽인 원수이니 이간책을 시도했으리라 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원소가 공손찬에게 (사촌동생 공손범을 발해 태수로 임명하는 형식으로) 발해군을 넘겨준 것 역시 190년의 일로 보인다.
공손찬은 발해군을 받은 대가로 원소의 용병 노릇을 제대로 해주었다. 앞서 한복의 부하 유혜가 연주자사 유대와 내통할 때, 유대는 '한복이 강한 병사를 거느렸다'고 표현했고, 한복의 부하 국의도 절대 약한 장수가 아님을 생각하면 국의를 격파한 한복의 실력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한복은 공손찬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자 안평군으로 북상하여 맞서 싸웠는데, 이 한복의 군대를 공손찬이 깨뜨린다.
공손찬에게 패하고 업으로 돌아온 한복에게는 나쁜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원소가 궐기 직후 끌어들인 흉노 선우 어부라와 상당군의 군벌 장양이, 원소에게 호응하여 장수 일대에 주둔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장수는 태항산맥에서 동쪽으로 흘러 나와 위군 업현을 통과하고 황하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니, 장수를 따라 진격하여 업을 공격하려는 흉노군 및 병주군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포진이었다.
한편 원소의 본대는 청수구 및 연진을 떠나 북상하여 위군 여향현에 주둔했다. 이제 한복은 흉노군, 공손찬군, 원소군에게 포위된 처지였다.
이때 원소가 보낸 사자 고간과 순심이 업에 도착했다. 고간은 원소의 외조카였고, 순심은 영천 지역의 명사였다. 순심은 훗날 조조의 모사로 유명해지는 순욱의 형이기도 했다.
한복의 부하인 경무(앞서 유혜의 처형을 말린 사람이다), 민순, 이력, 저수가 항복을 말렸지만, 한복은 고간과 순심의 설득에 결국 굴복했다. 한복은 아들을 여양현으로 보내 기주목의 인수를 넘겨주었다.
원소는 한복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기주목에 취임했다. 겉으로는 한복을 우대하는 척하면서 분위장군에 임명했지만 병권은 주지 않았다.
원소는 일단 한복이 등용하지 않고 있던 기주 명사, 위군 사람 심배와 거록군 사람 전풍을 등용하며 기주의 민심을 수습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한복의 부하들도 운명이 갈렸다.
경무와 민순은 끝까지 한복에게 의리를 지켰다. 그들은 칼까지 뽑아들고 원소의 앞을 막았으나, 원소는 전풍에게 명하여 두 사람을 죽였다. 반면 광평군 사람인 저수는 끝내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은 한복에 대한 미련을 버렸는지 원소라는 새 주인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때 저수는 원소 앞으로 나아가 기주, 병주, 유주, 청주의 4개 주를 평정하고 장안의 헌제를 구출하여 수도 낙양을 복구하는 대전략을 제시한다. 원소는 그 전략을 받아들이며 저수를 분무장군으로 임명했다.
훗날 위나라의 장수가 되는 장합도 한복의 부하였다가 원소에게 항복한다. 관도전투 전까지 그의 행적은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지만, 원소 밑에서 교위가 되었으며, 공손찬을 격파하는 전투에서 공을 많이 세워 영국중랑장까지 올랐다고 한다.
항복한 한복은 원소 밑에서 조용히 살았으나, 원소는 한복에게 원한이 있는 하내군 사람 주한을 등용한다. 주한은 원소의 은밀한 명령을 받고 한복의 집을 습격했는데(이때 한복이 머물던 저택은 십상시 조충이 업에 마련한 별장이었다. 황보숭이 이 저택을 보고 조충의 비리를 고발했다가 기주자사에서 해임되기도 했다), 한복은 저택의 높은 누각에 올라가 저항했다.
그러자 주한은 한복의 큰아들을 붙잡아 망치로 두 다리를 부러뜨리며 한복을 협박했다. 그 순간, 원소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나타나 주한을 죽여버린다. 이처럼 부하에게 은근히 뜻을 전하여 조종했다가, 나중에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내치는 일은 원소가 종종 저지르는 짓이다.
한복은 도저히 불안해서 원소 밑에서 살 수는 없었는지, 위군을 떠나 진류군으로 갔다. 여기서 태수 장막에게 의지했는데, 하루는 원소가 보낸 사신이 장막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자 그것을 자신을 살해할 모의로 판단하고 만다. 결국 한복은 측간으로 들어가 서도(죽간이나 목간의 잘못된 글씨를 깎아 수정하는 칼)로 자결했다.
진류태수 장막의 열전을 보면 그가 원소를 크게 나무랐고, 원소가 이에 원한을 품었다고 한다. 아마도 장막은 원소가 한복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 그리고 동탁 토벌에는 관심이 없고 기주를 얻을 기회로만 삼은 데 대해 분노한 것은 아닐까. 본인의 음흉한 의도를 찔리면 옹졸한 원한을 품는 버릇은 천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평생 눈칫밥을 먹은 원소에겐 본능처럼 각인된 것이었으리라.
190년 주씨 삼형제
앞서, 190년~191년 초 사이에 예주자사 공주가 사망했을 것이라 추측했었다. 공주의 죽음 이후 원술은 손견을 예주자사로 임명하여 예주로의 세력 확장을 꾀했다. 그런데 예주로 세력 확장을 꾀한 사람은 원술만이 아니었다.
원소 역시 자기가 예주자사를 임명하여 예주로 세력을 확장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예주종사 이연을(이때는 공주가 살아있었기에 종사를 임명했을 것이다) 파견했지만, 이연은 동탁에게 붙잡혀 팽형을 당하고 말았다.
공주가 죽은 후, 원소는 회계군 사람 주우를 예주자사로 삼았다. 이 주우의 형인 주흔과 주앙은 각각 단양군 태수, 구강군 태수였고, 이들 역시 원소에게 협력했다. 즉 원소는 회계군의 주씨 삼형제를 포섭하여 예주는 물론이고 양주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원소의 예주자사로 임명된 사람이 주앙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이 무렵 주씨 삼형제의 행적은 서로 겹치는 등 무척 혼란스럽다. 게다가 주흔과 주앙은 각기 자기 땅이 있기에, 아무래도 막내 주우가 예주자사 자리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조조는 서영에게 패한 후 조홍과 함께 양주로 내려가, 양주자사 진온 및 단양태수 주흔의 협력을 얻어 다시 병사를 모았다고 한다(「무제기」). 조홍도 양주자사 진온 및 여강군에서 모병한 후 패국에서 다시 조조와 합류했다고 하니(「조홍전」), 이때 두 사람은 주앙의 협조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조는 모은 병력을 이끌고 하내군으로 가 원소의 본영에 합류했다.
이처럼 190년에서 191년으로 넘어갈 무렵, 반동탁연합군은 뚜렷한 성과도 없이, 대의를 그저 각 군벌이 세력을 기르는 적당한 명분으로 삼고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이제 원술이 손견을, 원소가 주우를 각각 예주자사로 내세웠으니, 원씨끼리 천하를 두고 싸우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삼국지 흉노는 위촉오를 찢어
삼국지 흉노는 위촉오를 찢어 작품소개: "내가 유표(劉表)였으면 천하통일 했다."그러자 신은 나를 흉노의 유표(劉豹)에 빙의시켰다.사마의의 후손들과 중원 천하를 찢어버릴 흉노의 조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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