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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1권

by 루모로마노 2021.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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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녀전기』 등 일본의 픽션 작품을 읽으면서 생긴 한 가지 편견이 있다면, 이렇듯 전쟁을 소재로 삼은 장편소설에서 의도적인 '회피'가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사회 혹은 시스템 자체가 안고 있는 모순에 대한 언급 회피가 있다. 『유녀전기』의 경우 주인공 타냐가 중심이 되는 스토리 전개를 보여줘야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제국이 차례차례 주변 강국과 전쟁에 말려드는 과정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유녀전기』는 전쟁에 이르기까지 어떤 고민이 있었고, 이것이 국내적 혹은 국외적으로 어떤 '시스템적 모순'이 작용했는가, 이런 것들은 의도적으로 살피지 않는다.

이는 국가의 최고 수장을 국민의 힘으로 끌어내려본 경험이 없는, 심지어 민주주의가 도입된 지금까지도 일종의 '언급하기 꺼려지는 성역'이 있는 환경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다른 일본 라이트노벨, 이세계물 및 이와 혼합된 영지물의 경우에도 이러한 특징이 나타난다. 『쿠로노 전기』의 경우 중세유럽 비슷한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듯하면서도 '노예제'가 공공연히 성립하는 듯한 묘사가 나오는데, 자신이 압도적인 우위에 설 수 있는 신분제 사회라는 배경을 차용하면서 '노예 여성'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사랑을 어필하지도 못하는,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취약성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스운 부분이다.

노예제라는 시스템적 문제에 대해 당당하게 도전해 근본적인 혁파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시스템에 편승해 소시민적인 구원 혹은 자기 욕구의 만족 정도에서 그치고 마는 것.

현대 일본 사회의 시스템적 문제에 당당하게 도전해 근본적인 혁파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시스템에 편승해 소시민적인 구원 혹은 자기 욕구의 만족 정도에서 그치고 마는 것.

이렇듯 문제의 핵심에 대한 의도적인 '회피'를 발견할 수 있으며, 나는 거기서 일종의 '무기력증'까지 느낀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 작품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작품, 특히 대체역사물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노예 해방'이나 '인간 존엄'등의 문제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이는 독자 뿐만 아니라 작가들도 해당한다)을 이야기해볼 수 있다.

이들은 '고증'이라는 말로 위와 같은 문제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거나, '시스템에 맞서는' 시도 자체를 죄악시한다. 그러나 사실 '고증'은, 엄밀히 따지자면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애초에 '고증'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예제의 폐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자유라는 개념은 기원전 페르시아 제국이나 그리스에서도 볼 수 있는 생각이다. 농노제 사회인 중세에도 귀족의 권력에 맞선 평민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해 줄 것인지 그 법과 판례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소불위일 것 같은 귀족 또한 '교회' 등이 적절히 통제하려 했던 수많은 노력들(예를 들면 조혼이라는 명목으로 발생할 수 있는 성폭력의 방지)의 사례 역시 들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고증'이란 자기 입맛에 맞는 편의적인 고증에 불과하다.

오히려 『왕좌의 게임』을 비롯한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에서 묘사한 웨스테로스의 노예제 금지가 고증에 더 어울린다. 제1신분(성직자)이 제2신분(귀족)을 철저히 견제하는 『처형 소녀의 살아가는 길』도 고증에 가깝다 할 수 있겠다.

인간의 권리 증진이라는 테마는 얼핏 정치적 목적을 지닌 소설에만 쓰이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인간찬가'를 중심에 둔 모든 창작물이 직간접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결국은 인간의 가능성과 진보를 믿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부분에 냉소적인 사람들이 만드는 작품은 어딘가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군사 전략, 전투 묘사나 무기 묘사는 잘 하는데, 정작 외교를 묘사해야 할 장면에서 '냉소적이고 현실주의적이라는 겉멋'만 잔뜩 든 인격파탄자들이 나온다. 내일 당장 칼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원한만 잔뜩 살 언동을 하면서 주변의 신망을 얻는다. 나는 그런 걸 보면서 '평소 타인과의 대화가 부족한가'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그나마 고대나 중세를 배경으로하면 사람들이 '중세는 막장'이라는 편견 속에서 형성한 '밈' (혹은 통념)때문에 가려지기나 하지, 근대 이후를 배경으로 하면 그 한계가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수준으로 튀어나온다.

인간의 진보나, 이미 고대부터 드러나던 인간의 가능성을 전혀 믿지 않기 때문에, 근대 이후의 '혁명'이나 '인권선언'같은 것들은 이들의 눈에는 '갑자기 튀어나온 것'으로 보이고, 혁명가나 민중은 '별종'으로 보이게 된다.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노예제나 각종 모순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라고 포장하던 사람들이, 혁명에 대해서는 '역사의 흐름을 벗어난 예외적 사건' 취급할 때,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이런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인간사를 '밈'(중세는 막장, 정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들의 놀이터)으로 어설프게 이해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전에,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안고 있는 '용기'의 상실, 시스템에 대항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에 편승하는 쪽을 떠받드는 저열한 기성세대, 그러면서 강자에 맞서는 게 아니라 적당히 약자들을 털어 성공하는 길을 동경하는 머저리들, 그리고 강자에 맞서는 '유대' 자체에 분쇄 공작을 가하는 힘있는 자들의 문제가, 소설을 읽는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병마처럼 퍼져있지 않은가, 그 문제를 염려해본다.

그렇다면 장르소설의 작가가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는 무엇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하는 것은 당연히 갖추어야할 소양이다. 그런데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인지는 고민이 좀 더 필요하다. 다시금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수천년 전에도 '인권'이나 '자유'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부르짖은 사람들이 있었고, 근현대는 중근세와 단절된 시대가 아니라 그러한 노력이 누적되어 온, '연결된 시대'임을 재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모두의 성공'이 되어야 하고, '시스템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극복과 해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실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게 작가가 픽션을 통해 독자에게 줄 수 있는 희망이 아닐까?

『은하영웅전설』은 지금 일본의 장르소설들이 '회피'하는 문제,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에게 무한한 책임을 돌리는 문제들을 깊이 고민해봤던 위대한 발자국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지금까지 내가 글을 쓰며 걸었던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또 어떤 길을 걸어야하는지 계시를 받았다.

비록 몇 가지 한계(우주공간의 전투가 지면 위의 회전처럼 펼쳐진다든가, 중우정 민주주의 대 초인의 독재라는 밈)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지금도 극복되지 않았거나(게임 <스텔라리스>가 비슷한 전술 표현 문제를 안고 있다), 오히려 후배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이 작품을 보고 한 편으로는 고전의 거대한 벽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우정 민주주의 대 초인의 독재'라는 틀에서 벗어나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우리는 작가 다나카 요시키는 상상하지 못했던, 고성능 휴대용 컴퓨터의 대량 보급과 클라우드,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그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는 듯하다. 인간은 절망적이면서도 동시에 희망적인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니 고전을 읽고, 더 나은 상상력을 발휘하자. 그것이 고전에 대한 예의이자, 동시에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

하굣길에 우연히 마주친 소녀는, 암살 시도를 피해 도망친 국가원수 미리안이었다. 소년 주견하는 도와 달라며 내민 소녀의 손을 잡았지만, 음모에 휘말리며 부모를 잃고, 복수를 위해 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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