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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손권은 관우의 죽음 전까지 정말 손해만 보았나?

by 루모로마노 2023.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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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No.

위 지도는 적벽대전 직전과 직후의 상황이 섞여 있는데 하나씩 설명해보자면,

유기, 손권령 강하, 서릉군, 기춘군으로 표시된 땅이 전부 원래 강하군이다. 물론 기춘군 일부는 양주 여강군 일부를 뗴어다 만들었지만, 대부분은 원래 형주 강하군 땅이었다고 보면 된다.

요컨대 강하군은 그 자체로도 상당히 큰 영역이다.

208년, 적벽대전 직전에 손권은 황조를 죽이고 하구 일대를 차지하는데, 이때 지도에 표시된 '손권령 강하'와 '서릉군', '기춘군'으로 표기된 영역을 차지한다.

(조조가 이때 기춘군을 장악했다는 설도 있지만, 강하 북부가 적벽대전 이후에나 조조의 수중에 들어가기 때문에, 조조가 적지 한복판에 있는 데다 여남군과는 산맥으로 가로막힌 기춘군을 차지했을 것 같진 않다. 아마 회수 이남 여남군에 임시로 강하군을 설치했던 것처럼 조조의 기춘군도 그렇게 설치되었던 게 아닐까?)

유기는 제갈량에게 지혜를 구해 '황조의 후임'을 자처하며 양양을 빠져나와 하구로 향한다. 이때의 하구는 손권이 차지한 하구가 아니라 '경릉현 중하구'를 말하는 것이다. 강하군에 포함되긴 하지만 남군-강릉에 훨씬 가깝다. 유기가 차지한 지역은 강하군 전체로 봤을 때는 서북부 일대다.

손권은 강하군 동쪽 기춘군은 양주에 편입시키고, 점령한 강하군 동부는 주유에게 맡긴 채, 자신은 시상으로 물러나 사태를 지켜보았다.

조조가 남하하고, 유비도 남군으로 가려다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유기의 경릉현에 들어간다. 조조는 유비를 계속 추격하기보다는 먼저 남군-강릉에 입성했고, 이후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림-적벽에 진을 친다.

적벽대전 승리 직후, 손권은 장사군 북부와 남군 동부를 점령하고 이를 '한창군'이라는 새로운 군으로 만든다.

유비는 유기의 뒤를 이어 형주목이 되었지만 남군만을 양도받았을 뿐 손권이 차지한 장사군 북부(한창군), 강하군 동부, 기춘군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즉 강릉을 유비에게 양도한 것은 손권의 일방적인 양보라고 볼 수는 없고, 유비가 형주 동부의 점령을 승인하면서 대등한 협정을 맺은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손권이 차지한 이 요충지는 꽤 번성했는지, 214년에는 강하군 남쪽을 잘라 서릉군이라는 새로운 군을 세우기에 이른다.

즉 손권은 기춘군, 강하군, 서릉군, 한창군에 이르는 네 개 군을 차지하여 적벽대전 전후로 영토를 꽤 넓힌 상황이었다.

이 서릉군과 강하군 일부를 다시 합쳐서 만든 군이 바로 오나라의 제2 수도, 무창군이다.

손권은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자 형주를 대여했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떼를 쓰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 익양대치인데, 과연 여기서도 손권은 큰 이익을 거두지 못했을까?

 

 

 

 

 

 

적벽대전 이후 조조가 점령한 북부 강하군 (안륙현 일대)을 제외하고, 손권은 유비의 땅이었던 강하군 전부를 손에 넣었다. 언제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고, 또 서쪽으로 강릉을 위협할 수 있는 요충지를 점령한 셈이다.

또 장사군 전체를 손에 넣어, 한창군을 다시 장사군에 병합했다. 이 장사군과 계양군의 확보로 손권은 상수 물길을 완전히 장악, 형주의 핵심 지역은 다 손에 넣었다고 볼 수 있다.

유비에게 남은 것은 남군, 무릉군, 영릉군인데. 이는 간신히 촉에서 오를 견제할 수 있는 출구를 확보한 것이면서, 융중대를 실현할 최소한의 거점만 남겨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어떤 이들이 말하듯 익양대치의 결과 나타난 형주 영구 분할 협정은 '손권이 유리한 상황에서도 얻은 게 별로 없었던' 협정이 아니다. 손권은 조조가 점령한 지역을 제외하면 형주의 핵심이라 할만한 지역을 모조리 손에 넣었다.

유비가 손권과의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조가 북쪽에서 장로를 치면서 촉 땅으로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또 손권 측에서도 세 군을 손에 넣는 선에서 협상한 건 촉을 점령한 위가 손쉽게 장강을 타고 오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혹자가 말하듯 이는 유비의 수작에 손권이 넘어간 것도 아니고, 유비가 억지를 부린 것도 아니다.

이런 동맹이 최종적으로 결렬된 것은 철저하게 손권, 여몽의 전략적 오판 때문이었다. 여몽은 관우를 죽이고 형주 남부를 점령하면서, 양양, 번성까지도 어부지리로 취하리라 예상했지만 본인의 수명이 다하면서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손권은 형주를 얻은 데서 만족하지 않고 상용 일대를 통해 한중을 점령하려 시도하거나, 익주 동쪽 일부를 점령하는 등, 유비 세력의 완전 병합을 시도했다. 손권의 과욕은 양양을 다시 위에 양보하고, 동맹으로 삼아야 할 촉한의 역량이 이릉에서 꺾이는 결과만 낳았다. 이는 오나라가 이후 수십 년 동안 위, 진의 합병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

루모로마노 - 삼국지의 촉한 황제 유선에 빙의했다.

novel.mun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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