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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고려천마

고려봉신방(高麗封神榜)

by 루모로마노 2024.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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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년 5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연개소문은 더욱 교만방자해졌다. 비록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렸지만 그 말이 거칠고 모두 거짓이었다……

***

“고려왕이여, 지금 무슨 말씀을……?”

당의 사신은 자신을 겨눈 다섯 자루의 칼을 곁눈질하며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고려왕의 어좌가 있는 쪽을 노려보려 애썼다.

연개소문의 심복 무사 다섯이 당의 사신을 겁박하는 자리.

그 우두머리인 연개소문은 왕의 옆으로 비켜서서, 사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고려왕은 연개소문에게 옹립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지금 이 모습은 마치 연개소문이 고려왕의 충실한 심복이 된 것 같지 않은가.

간자들이 전해 온 고려왕 보장의 인품과는 완전히 달랐다.

첩보가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나?

고려왕의 입에서 당의 사람이라면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들은 대로다. 상주(商周)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희 진, 한, 수, 당은 주의 후예로, 감히 대읍상의 자리를 찬탈한 지 오래되어 잊었을지 모르나 우리는 잊지 않았다.”

상과 주의 일을 혁명이라 부르지 않는 것부터가 사신의 심기를 건드렸으나, 사신은 차분한 어조로 논박했다.

이 논박이 고려왕을 격노케 해 목을 잃더라도, 중화의 신하로서 한마디도 못 하고 물러났다는 불명예를 떠안을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이 망하고 그 천명이 주로 이어져, 마침내 우리 황제께서 이어받은 것입니다. 혁명이 끝난 지 천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상의 적통은 기자(箕子)이며, 기자는 조선을 다스렸는즉 조선이 상을 이은 것이다. 조선은 우리 고려가 이어받았으니, 마땅히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 왔다. 너는 어찌 상이 멸망했다 말하는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논리였다.

사신은 반박할 말을 찾아 헤맸지만, 시간을 끄는 사이 고려왕 보장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는 기자가 조선을 다스려 풍속을 교화했다 말하면서, 당연히 조선이 중화의 일부라 여긴다. 이것을 부정할 셈인가?”

“기자는 제후로서 간 것이지 천자로서 간 것이……!”

“그러므로 나는 조선이 중화의 일부임을 인정한다. 조선을 이은 고려가 중화의 일부임을 인정한다. 고려는 중화다. 고려는 상이 잃은 땅을 되찾으러 갈 것이다.”

전쟁 선포.

황제의 토벌을 위협하러 간 자리에서, 사신은 토벌을 위협당하고 있었다.

간신히, 사신은 반박할 말을 찾아냈다.

“경관이나 만드는 고려의 야만스러운 풍속이, 어찌 기자가 교화한 조선의 풍속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

“경관?”

고려왕 보장은 코웃음 쳤다.

그것이 그렇게밖에 안 보이냐는 듯,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느냐는 듯.

“너희가 경관이라 부르는 것이야말로 우리 고려가 상의 적통임을 입증한다. 신들이 굽어 살피사 고려를 지켜주셨으니, 감히 고려의 강토를 침범한 수병(隨兵)들을 신들께 바쳐 제사 지냄이 마땅하지 않으냐.”

미쳤다…… 고려왕은 미쳤다!

그 경관이 단순히 중화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제사를 지낸 제단이라며 자랑스러운 듯 지껄이고 있지 않은가!

“서, 선왕을 시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신을 토막 내……!”

“성스러운 제단을 지키지 못한 폐왕의 죄를 사죄하고자 상의 전례대로 했을 뿐이다.”

고건무를 토막 낸 것이 그저 상의 제의를 따랐을 뿐이라 말하는 고보장.

그는 아무리 황당한 논리를 펼치더라도 사신의 반박에 굽힐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고보장의 논리에 스며든 험악한 분위기가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사신은 자신도 고려왕이 말하는 ‘상의 제의’에 따라,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끔찍한 고통이 길게 이어지는 죽음일 것이라 직감했다.

죽음의 공포가 광증이 되어, 사신의 두뇌를 자극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오히려 각오가 되어, 사신이 굳게 주먹을 쥐게 했다.

조금이라도, 고려가 내세우는 상의 적통이니 뭐니 하는 망언에 흠집을 남기고 죽어야 하리라.

“기자는 위만에게 쫓겨나 마한의 왕이 되었소! 어찌 상의 적통이 고려라 하시오!”

“백제가 마한을 멸하여 기자의 조선왕새(朝鮮王璽)를 받았고, 백제왕 부여아신을 우리 고려가 정벌하니 그가 조선왕새를 바쳤다. 기자의 도읍과 어새 모두 우리가 가졌는데 어찌 상의 천명이 고려에 있지 않을까!”

조선왕의 어새인지 뭔지가 실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신은 죽는 순간까지 발악하며 기개를 높일 뿐.

“우리 대당의 황실은 태상노군의 후예! 고려왕의 포악함을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잘 되었구나. 너희의 옛 주인이 본래의 도읍, 대읍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너희 당이 섬기는 신이 아니라, 상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신을 일천육백 년 동안 섬겨 왔다. 그분들이 너희의 피를 바라신다! 길을 비키지 않는 자 성스러운 제단에서 제물이 되리라.”

임유관에서 장안에 이르기까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도륙하겠노라는 선언.

고려왕 보장의 전쟁 선언 앞에, 사신은 할 말을 다 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저 고통으로 추태를 부리지 않고, 빨리 숨이 끊어지기만을 바랐다.

온 중화를 불태울 성전(聖戰)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에 빙의한 대체역사소설을 구상하다가, 얼핏 떠올렸던 논리를 단편화 시켜보았습니다.

*기자조선설을 역이용해서, '기자=상나라 왕족=조선왕'이라는 식으로, 조선이 상나라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나아가 고(구)려는 조선의 후예이니 고(구)려가 곧 상나라의 후예고, 고(구)려가 당나라를 치는 건 상나라의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다, 까지 비약합니다.

*황당하다면 황당한 이 논리를 보충하고자 최근 출간된 '상나라 정벌'이라는 책을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그 책에서 다루는 인신공양 파트가 디시인사이드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화제가 된 걸 보고 아이디어를 좀 더 발전시켜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는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후 그 포로들을 죽여 경관을 만들었습니다. 이 경관이 단순히 공포감을 주는 기념비가 아니라 '상나라식 인신공양'으로 포장된다면 어떨까. 그리고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뒤 몸을 다섯 토막으로 잘랐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이것 역시 '상나라식 인신공양'으로 묶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고려천마'를 쓸 때부터 '고려의 전통 종교(동명신교) VS 도교'라는 종교전쟁의 구도를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그걸 좀 더 극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상나라와 주나라의 싸움은 '봉신연의(또는 봉신방)'이라는 문학 작품이 되었는데, 때마침 당의 이씨 황가가 태상노군(노자)의 후예를 자처했다는 사실과 연결되더군요.

*그러면 이 모든 걸 하나로 엮어, 고려와 당의 종교 전쟁이 1600년 만에 재개된 상주전쟁이라고 포장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식으로 거칠게 단편을 써보았습니다. 이걸 더욱 발전시켜서 언젠가 꼭 재미있는 고당전쟁 대체역사소설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제국의 야만용병으로 사는 법

루모로마노 - 제국에 충성하다 숙청당한 나는 400년 뒤 야만족 용병으로 환생했다. 낡아빠진 제국을 멸하고, 내가 직접 중세를 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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