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舊가정과 新가정
이른바 新가정, 그러니까 마이지진 가정촌이 마속과 장합이 실제로 맞붙은 전장이고, 舊가정, 룽청진의 고증은 잘못되었다는 설이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이 설은 제가 보기에도 무척 매혹적입니다. <원자>에 전하는 제갈량과 마속의 거리가 수 리 밖에 되지 않았다든가, 제갈량과 마속이 합리적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기동을 했다든가, 혹 마속이 제갈량의 패전을 가리기 위한 희생양은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들에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길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원자>의 표현은 수사적인 표현일 수도 있고, 당시 마속과 그 정도 거리를 둔 왕평의 부대를 착각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요.
또 새롭게 부각된 마이지진 가정촌에 관하여 논문들이 언급한 기록인 『독사방여기요』를 확인해봤더니 그런 건 없었다든가, 가정촌이 청나라 때까지만 해도 이름이 가자존이었고, 가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근대 이후로 봐야 한다든가, 新가정-가정촌과 달리 룽청진 舊가정에서는 상당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든가 하는 점들이 문제로 부각되는데, 이는 新가정 설의 약점이라 하겠습니다.
고상이 주둔한 열류성 혹은 고상이 '둔열한' 유성이 위수-진창도를 막는 길이었다고 한다면 新가정설에서는 마속이 그 길목을 막을 필요가 없어지니 이것도 또 문제겠지요.
무엇보다도 '증명의 책임'은 새롭게 주장을 제기한 新가정설 쪽에 있기 때문에 舊가정 쪽에서는 新가정 설이 전제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한 반론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점에서, 모든 새로운 설들이 그렇듯이 아무래도 불리한 쪽이긴 합니다.
그러나 舊가정 설에도 약점은 있습니다. 애초에 新가정설이 부각된 가장 큰 이유는 舊가정설이 마속이 '거기에 왜' 갔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반면에 新가정설은 상당히 합리적으로 '거기에 왜' 있었는가를 설명해줍니다.
『삼국지』를 소설화한 창작자들은 마속이나 왕평의 전기 등을 종합하여,
'제갈량이 마속에게 가정에 가서 좁은 길목을 막고 장합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라는 그럴싸한 이야기를 창작해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마속과 왕평의 전기에서 마속이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장합이 물을 끊고 마속을 격파했다'라는 기록과 상당히 잘 맞아떨어지지요.
그러나 『삼국지』 매니아들의 답사를 통해 舊가정인 룽청진의 현장답사가 이루어졌고, 『삼국연의』의 이야기와 달리 소규모 병력만으로 적을 막기엔 지나치게 넓은 길, 산이라기보다는 구릉에 가까운 지형이라는 실상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소수의 병력만을 보낸(그러나 諸軍 등의 표현을 봤을 때 이 부분도 좀 의문이긴 합니다) 제갈량의 명령이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여, 제갈량 정권의 존재 양상에 따른 최근의 탐구가 합쳐져 마속이 희생양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까지 제기되었고,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다만 저는 앞서 이야기한 부분, 그러니까 '제갈량이 애초에 마속에게 내린 명령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전제부터 약간 의문을 표할까 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밝혀두자면, 저는 일단 新가정설이 상당히 타당하다고 보는 입장이며, 다만 아무래도, 늘 새로운 설에 대한 반박이 나올 수 있으니 혹시라도 舊가정설의 타당성이 다시 부각되면 부끄럽기에, 舊가정인 룽청진이 옳다고 가정(假定)했을 경우, 마속은 대체 왜 거기로 갔는가를 재검토 해보고자 합니다.
2장 - 제갈량은 어떻게 싸우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
저의 부족한 지식과 독서 범위로 살펴보자면, 『삼국연의』에서 묘사하는 바와 달리 '제갈량이 마속에게 내린 구체적인 명령의 정체'는 다소 불명확합니다.
「제갈량전」은 제갈량이 마속에게 가정으로 가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고 하지만, 저는 이것이 '가정 너머에 있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라고 했는데 마침 가정으로 온 장합과 싸우게 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속전」과 「왕평전」을 살펴보아도, 마속이 물을, 혹은 평지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간 것이 잘못된 판단이라고 비판합니다만, 그 이전에 마속이 제갈량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이 '평지에서 방어하라'는 것이었는지는 역시 불명확합니다.
여기서 저의 주의를 끈 것은, 제갈량의 북벌에 응한 세 군 중 '안정군'입니다. 제갈량의 북벌 경로 상에 놓인 천수 및 남안과 달리, 안정군은 동북쪽으로 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룽청진 舊가정은 제갈량의 원정 경로와 안정군의 가운데에 위치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假定)을 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속이 위반한 명령, 제갈량이 내린 최초의 명령은 가정(街亭)을 막으라는 것이 아니라, 신속히 안정군으로 가서 반란군과 접촉하라는 것 아니었는가.
이러한 저의 가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 기록이, 「조진전」에 있습니다.
조진은 처음에는 조예의 명령을 받아 미현에 주둔하다가, 이후 안정군으로 향합니다. 이때 안정군의 상황이 묘사되는데, 백성 양조 등이 관리를 죽이고 월지성을 점령하여, 조진이 이를 포위했고, 이후 양조가 조진에게 항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조진이 왜 관중 지역의 서남부인 미현에 있다가 서북쪽인 안정군으로 방향을 틀었는가에 대해서는 「조운전」 참고할 수 있겠습니다. 북벌 당시 제갈량이 야곡도를 통한 기습의 소문을 내자 조진이 이를 막았는데, 실상 제갈량은 이 길을 조운과 등지에게 맡겨두고 자신의 본대는 기산으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미현은 야곡도의 관중 쪽 출구와 마주보는 곳에 있으므로, 요컨대 조진은 이곳에서 한동안 발목이 잡혀 있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과, 舊가정이 전장이 맞다는 가정(假定)을 종합하여 본다면, 저는 제갈량이 마속에게 내린 명령은 가정에서 장합을 방어하라는 것이 아니라, 안정에서 양조와 접촉하라는 것은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애초에 룽청진 舊가정은 제갈량과 마속 모두 전장으로 상정하지 않은 곳이었으며, 반대로 장합이 신속한 기동으로 마속의 안정 진군을 막은 모양새가 됩니다. 즉, 가정을 돌파해야 하는 쪽은 장합이 아니라 마속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애초에 전장으로 상정하지 않은 전장인 데다 산으로 올라갈지 내려와서 저항할지 하는 문제 또한 제갈량과 마속의 상정을 벗어난 것이기에, 대체 왜 舊가정이 전장이 되었는가, 그런 명령은 왜 내려졌는가에 대한 의문도 新가정설 못지 않게 해결된다 하겠습니다.
3장 - 안정군으로 향하는 마속
그러면 마속이 안정의 월지성(혹은 월지도)에서 양조와 접촉한다고 했을 때, 그 이후의 임무는 무엇이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이는 「마속전」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마속은 제갈량의 남중 정벌 당시 '민심' 얻는 것을 중시하라는 진언을 올린 바 있습니다. 즉 마속은 안정에서 군민의 반란군인 양조와 접촉하여 대민 작전에 들어가려는 것은 아니었나 하는 가정(假定)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접촉이 이루어졌어도 여전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장합의 공격은 당연히 월지성의 마속을 향했을 것이고, 마속은 아예 이곳에서 전사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속, 왕평이 가정을 지나 양조와 성공적으로 접촉하고, 장합의 발목을 거기서 묶어두는 경우를 상상하면, 제갈량과 고상 등의 '지지부진한' 기산-상규 일대 진군 또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마속이 성공적으로 월지성에 진입, 장합이 내려오지 못한다는(그리고 조진도 오지 못한다는) 보장이 되었을 때 좀 더 과감한 진군을 계획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의 어설픈 가설에는 당연히 약점이 있습니다. 아직 상규 등이 평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속이 그런 식으로 룽청진 舊가정으로 기동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신양애수를 이용하면 가능하다라는 의견도 있었고, 또 반론으로 중간 경로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신양애수를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저는 다소 얌체같지만 이 두 의견의 정반합을 시도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경우에는 마속이 상당히 불쌍해지는데, 제갈량이 내린 명령의 무리한 부분은 신양애수를 이용하여 舊가정까지 진군하라는 것이었으니, 반론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도저히 시간을 맞춰서 안정군까진 도달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정반합에서는 역시 마속이 무리한 기동 명령에 따르다 패배할 수밖에 없고(장합이 어떻게 마속의 기동을 눈치채고 안정으로 향하는 길을 룽청진 舊가정에서 끊었는가와는 별개로), 1차 북벌 전체의 책임을 쓰는 희생자가 됩니다. 물론 이러한 양상은 어디까지나 두 의견의 정반합을 시도한 결과물로, 충분히 가능하였으되 전적으로 마속의 안일함으로 舊가정에서 장합과 조우한 것이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4장 - 월지성, 월지도, 월지호
앞서 舊가정의 위치가 맞다고 한다면, 마속의 목적지는 가정이 아니라 가정을 지나 안정군에서 반란을 일으킨 양조와 합류하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닌가 추정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가설에서는 가정이 제갈량과 마속이 상정한 전장이 아니며, 오히려 마속의 기동을 눈치 챈 장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된 전장이라 하였습니다. 즉, 마속이 가정에 진을 치고 장합을 방어한 것이 아니라, 가정을 돌파해 안정군으로 가야 하는 마속을 장합이 가로막은 전투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주장은,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원자>와 <위략>의 기록을 舊가정에 맞게 해석하는(마속과 '수 리' 떨어진 것은 제갈량 본대가 아닌 왕평의 부대, 마속은 상규를 무시-「강유전」의 기록대로 제갈량이 상규의 곽회를 전담-하고 신양현 일대의 북쪽으로 기동)것은 차치하더라도, 이 부분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죠.
"제갈량이 마속에게 그런 무리한 기동을 명령할 정도로 비합리적인 인물인가?"
다른 분은 이런 지적도 해주셨습니다.
"<위략>에서 위연의 자오도 계책을 위태롭다며 거부한 제갈량이, 자기가 신뢰하는 마속을 사지로 몰아넣고 희생시킨다고?"
그렇다면 저는 여기서 '여차하면 마속을 희생시킬 수도 있는 작전'이라는 추측은 철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은 이미 절반쯤 新가정설이 옳다는 쪽으로 기울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받은 '마속이 舊가정을 경유하여 안정군이라는 목적지로 향했을 경우, 제갈량의 행동에 정녕 합리성은 없는가?'하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이 부분이 여전히 명쾌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면 제 마음 속에서 新가정설에 정설의 견장을 달아주더라도 뒤통수가 계속 간지러울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러 방향으로 글을 읽어보던 중 「조진전」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았습니다.
양조가 반란을 일으키고 점령한 월지성(月支城)에 대한 주석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월지성은 월지도(月氏道) 위의 성으로, 이 경우 氏의 음은 '씨'가 아니라 '지(支)'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월지(月氏)는 전한 초기에 흉노에 의해 쫓겨난 토하라 계통 민족 월지의 남은 이들이라는 말도 이어지죠.
보통은 흉노에게 쫓겨나 서역 너머로 가버린 월지를 대월지, 중국 서북부에 남은 월지를 소월지라고 합니다. 이 소월지는 월지호(月氏胡), 의종호(義從胡)라고도 하며, 호(胡)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목민입니다. 말하자면 기병전력입니다.
저는 여기서 마속의 목적이 단순히 월지성의 양조와 접촉하는 정도가 아니라, 일대 월지인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나 추측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마속의 형, 마량의 전기를 보면, 마량은 이릉전투 시기 무릉의 오계만을 아군으로 포섭하러 갔다가, 유비의 패배와 함께 변을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마속전」에 달린 주석을 보면, 마속은 남중을 정벌하면서 제갈량에 '마음을 굴복시킬 것'을 진언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마량과 마속 형제는, 이민족을 대상으로 한 회유 및 대민작전에 능력이 있는 인재들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속이 舊가정을 거쳐 결국 월지성에 도착하여 얻고자 했던 것은 월지호와의 동맹, 그리고 동맹 기병이며, 제갈량은 유비가 이릉전투 때 마량을 따로 파견하여 오계만을 포섭하려 했듯이, 비슷한 작전을 마속에게 명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왜 위연과 오의가 아니라 마속이었는가, 하는 질문에는 '왜 위연과 오의가 마량의 일을 대신 맡을 수 없는가'라고 하면 어느 정도 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자오도 계책에 버금가는, 이렇게 위험하고 무리한 기동을 왜 마속에게 명령했는가에 대한 답도 될 수 있겠지요. 자오도 계책의 앞에는 장안성이 놓여 있지만, 마속의 기동 앞에는 '월지기병'이 놓여 있으니까요.
위나라 역시 오환과 선비 기병을 보조병으로 활용했고, 서방에서는 로마 제국이 누미디아 기병 등을 보조병으로 활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촉나라에서도 월지기병을 동맹이자 보조병으로 활용하는 것은 그렇게 어색한 일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과연 제갈량이 월지호를 얻으려 했는가, 그것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결국 저만의 가설은 아닌가, 하는 부분을 보강해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견초전」을 보겠습니다.
견초는 231년 제갈량의 4차 북벌 당시, 제갈량이 선비의 가비능과 동맹을 맺고 함께 위나라를 치는 것을 대비해야 한다고 조예에게 표문을 올립니다. 당시 위나라의 신하들은 제갈량과 가비능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말했지만, 「제갈량전」에서 보이는 것처럼 가비능은 옛 북지군의 석성까지 진군하여 제갈량의 4차 북벌에 호응합니다.
견초는 물론 촉한과 선비의 동맹이 가능하리라는, 당시의 정세에도 밝았지만, 어쩌면 제갈량의 지난 행적을 토대로 그의 군사 외교를 추측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요컨대 견초는 1차 북벌 당시 제갈량이 명령한 마속의 기동이, 월지 기병을 얻으려는 시도였음을 교훈으로 삼아, 제갈량-가비능 동맹에 대비한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제갈량이 기병 전력을 확보했을 때는, 그가 이후 북벌에서도 보여주는 고질적인 문제이자, 촉한의 북벌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문제인 소극적 기동, 회전(會戰) 회피의 문제가 상당히 해결됩니다. 요컨대 좀 더 트인 전장에서 과감하고 공격적으로 위나라 군대와 싸우는 일이 가능해졌을 것입니다. 적어도 제갈량은 그렇게 내다보았다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마속이 장합이 舊가정에 도착하는 것보다 먼저 舊가정을 돌파하여 월지성에 도착했다면, 우리가 아는 팔진도는 없었거나 상당히 다른 형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 살펴본 대로라면, 마속의 패배와 함께 기병 전력 확보가 좌절된 촉군은, 장합에게 기병 전력 확보 및 이민족 포섭 시도가 노출된 촉군은 당연히 총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곁다리로, 그렇다면 대체 월지성, 월지도의 위치는 어디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중국역사지도집』은 이를 안정군 오지현 서쪽 근처 어딘가로 모호하게 표시해두고 있습니다만, 만약 오지현과 가까운 곳이라면, 농상(隴上)이 평정된 후 경수(涇水)를 따라 동남쪽으로 장안을 공격하는 루트를 그려볼 수 있겠습니다. 혹은 왼편으로 범정산을 끼고 남쪽으로 향하며 견수(汧水)를 따라 내려가 부풍을 공략하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물론 이러한 전략은 농상은 물론이거니와 하서회랑까지 평정된 이후, 보다 안정적인 기병과 물자의 확보가 우선해야겠습니다.)
5장 - 그래도 필요했던 마속의 죽음
역시 곁다리로, 그렇다면 마속은 왜 죽어야 했는가에 대한 문제가 남습니다. 역시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지만, 왕평은 「무제기」나 「왕평전」에 전하는 내용대로라면 왕평의 문화적인 배경은 한인보다는 두호, 박호와 같은 파군만, 혹은 판순만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합니다. 융려(戎旅)에서 자라 글을 익히지 못했다는 서술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렇다면 왕평을 거느리고 간 마속의 부대에는 파군만, 혹은 판순만의 군대가 왕평의 지휘 하에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마속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순된 서술이 대립합니다. 한편으로는 군중(軍衆)에 사죄하기 위해 죽였다고 하면서도, 병사들이 슬퍼했다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슬퍼한 쪽과 사죄를 받아야 하는 쪽이 각각 다르다고 해석했습니다. 마속의 작전 실패로 퇴각한 나머지 부대는 마속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지만, 마속의 휘하에서 전사한 파군만(판순만) 병사들에게는 죽음으로 사죄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을지.
파군만(판순만) 병사를 계속 써야 하는 제갈량의 입장에서 이들의 이반은 방지해야만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한고제의 삼진 정벌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운, 400년에 걸쳐 용맹하기로 이름난 병사들이었으니까요. 다들 스스로 관직을 깎거나 벌을 받는 중에 왕평만이 승진한 것도, 파군만(판순만)을 달래기 위한 조치는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이상 舊가정설이 여전히 옳다고 가정(假定)하며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다만, 다시 한 번 분명히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은 新가정설을 반박하는 글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新가정설이 매우 타당하다고 보며, 여기서는 그저 舊가정설 속 제갈량과 마속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에 몇 자 추측을 달았을 뿐임을 밝혀둡니다.
삼국지 흉노는 위촉오를 찢어
루모로마노 - "내가 유표(劉表)였으면 천하통일 했다." 그러자 신은 나를 흉노의 유표(劉豹)에 빙의시켰다. 사마의의 후손들과 중원 천하를 찢어버릴 흉노의 조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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