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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

장르잡지 『녹스앤룩스 vol.1』

by 루모로마노 2022.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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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전역 후 2012년에 구입했던 책인데, 게으름 탓에 책꽂이에 넣어만 두다가 얼마 전에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사실 복무하는 동안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독서 습관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는데, 그걸 회복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10년이 지나서 다시 읽기 시작하니까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구입 당시에는 독특하다고만 생각했던 그래픽노블 「Alice Next Dore」를 연재하신 분이 지금 『피어클리벤의 금화』를 연재 중이신 신서로 작가라든가 하는 것 말이죠.

스스로 서점에서 집어 들었던 『녹스앤룩스』에서 처음 접하고, 또 훗날 다른 분의 추천을 받아 <브릿G>에서 다른 모습으로 접하니 상당히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런 기분으로 읽어 내려가다 보니 신서로 작가의 10년 간격을 둔 두 작품뿐만 아니라, 2012년 당시 장르문학과 2020년대의 <브릿G>, 또는 환상문학웹진 <거울>, 장르잡지 『판타스틱』 등을 관통하는 어떤 분위기를 느꼈는데,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장르소설을 하신다는 분 중 일부에겐, 일종의 ‘부채감’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부채감은 기성 문학계에 장르소설이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지금 생각하면 다소 기묘한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기성 문학계가 장르소설을 비난하며 강조하는 것, 즉 정제된 문장, 작가의식 혹은 주제의식, ‘말초적이지 않은’, ‘가볍지 않은’ 무언가를 담아내기 위해 고뇌하는 것이죠.

장르소설 분야 종사자 중 많은 분이 그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정확히는 ‘모범 사례’를 찾으려 했죠. 해외의 장르소설 역사를 탐구하고, 작품들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고, ‘그런 느낌’이 나는 작품을 창작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적 판타지’ 논쟁 같은 것도 벌어졌고, 이에 대해 이영도 선생님은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로 답하셨으며, 전민희 선생님 같은 경우엔 ‘소재의 경중이 작품의 가치를 결정짓지는 못한다’는 멋진 답을 내놓기도 하셨죠.

그런데 2022년 현재, 제가 웹소설 작가의 길로 들어선 지도 2년이 지난 후인 지금 돌이켜보면 과연 부채감을 느끼게 한 ‘부채’는 실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르소설을 쓴다는 분 중 일부가 기성 문학계의 ‘비난’에 불필요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 반응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불필요한 시간 낭비도 있었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웹소설, 즉 웹 매체 기반의 장르소설은 그분들의 노력이나 탐구와는 별개의 영역에서, 자신의 환경에 맞게 문장을 정제하고(그러지 않으면 애초에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 독특한 작가의식과 주제의식을 발전시키며, ‘가볍고 말초적인 것이 왜 나쁜가’ 혹은 ‘가볍고 말초적인 것은 누가 결정하는가’와 같은 중요한 화두를 던지며 성장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장 과정을 돌이켜보면 애초에 기성 문학계의 주문 아닌 주문에 휘둘릴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의 비난에 변명을 마련하려고 기민하게 해답을 모색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현재 웹소설의 ‘한국적 특징’은 ‘왜 판타지 소설은 서양 이름을 쓰는 주인공이 서양풍 세계를 무대로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나온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기성 문학계의 그런 시비에 답하기 위해 ‘한국적 판타지’를 찾으려 했던 노력이 지금 웹소설에서 드러나는 한국적 특징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라고 그 계승성을 주장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식의 ‘계승성’을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계승성을 이야기하려면 보다 엄격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기계적으로 계보도를 그리려는 시도는, 수렴진화를 통해 유사한 형태에 이르게 된, 전혀 다른 계통의 두 생물이 친척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부채의 실재’ 문제로 돌아와서 이야기해보자면, 기성 문학계, 혹은 문창과에서 배우는 신춘문예 등단용 ‘문장 기예’가 웹소설에서는 ‘번잡하고 겉멋에 찌든, 지양해야 할 작문 습관’으로 취급받는 현실 속에서, 과연 아직도 기성 문학계가 ‘임의로 설정한 문학성’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과연 장르소설이 기성 문학계에 진 ‘빚’이 있는가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질문을 다시, 황금가지와 <브릿G>에 던지고 싶습니다. 황금가지와 <브릿G>에서 연재하는 모든 작가의 고뇌와 노력이 헛된 것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영도 선생님의 작품을 일종의 ‘모범’으로 설정하고 ‘그런 느낌이 나는 작품’을 양산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의 흥행작이 나오면 그것을 모범으로 삼는 작품들이 쏟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합니다. 고전문학 『구운몽』의 출현 이후 벌어진 현상이 그러했고, 나스 키노코의 성공은 이른바 ‘나스체’라 불리는 문체의 유행을 불러왔으며, 애니메이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일단 미소녀에게 잔혹한 시련을 주는 아류들이 우후죽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마침내 어떤 ‘결실’을 내놓는다 해도, 그런 시도의 안일함에 대해 비판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영도 선생님의 작품들은 분명 한국 판타지 소설의 역사에서 다시 없을 업적임은 분명합니다. 많은 이들이 말장난 같지만 결국은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깊은 고찰에 도달하는 그 특유의 문체에 환호했습니다. 저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고요.

그러나 핵심은 파고들지 못하고 표면적인 현상을 놓고 이런저런 말장난만을 길게 늘어놓으며, 그것으로 마치 ‘철학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 같은 눈속임’을 채워 넣으면서 ‘포스트 이영도’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행태에 저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독자가 자신의 불쾌감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뿐, 그런 눈속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결국 느끼리라는 건 자명한 일입니다. 독자는 ‘언어유희를 통해 고찰을 끌어내는 것’과 ‘고찰을 한 것처럼 문장 형식을 짜는 것=고찰이라 말하기엔 얕은 무언가를 이영도풍 문체로 무마하려는 것’의 차이를 무서운 동물적 감각으로 찾아내고야 마는 존재니까요.

출판사에서 독자가 이를 눈치채지 못 하리라 생각하고 ‘이영도풍’ 작품들을 발굴하려 한다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사업을 하는 것이고, 작가가 독자를 이렇게 얕잡아 보았다면 반드시 독자를 능멸하는 죄를 짓고야 말 것입니다.

타산지석, 웹소설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접하고 배우는 일은 무척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절대적인 모범’으로 삼아서 그 흉내만 내려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흉내로 오리지널의 자리를 넘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결국 창작자는 언젠가는 흉내를 넘어서서 자기만의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당장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자기만의 기둥’을 지향해야만 합니다.

‘남이 설정해 준 문학성이라는 허상’을 좇아서는 결코 그 경지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

하굣길에 우연히 마주친 소녀는, 암살 시도를 피해 도망친 국가원수 미리안이었다. 소년 주견하는 도와 달라며 내민 소녀의 손을 잡았지만, 음모에 휘말리며 부모를 잃고, 복수를 위해 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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