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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조-원술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본 유비-원술 전쟁 (1)

by 루모로마노 202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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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96년 여름 무렵, 이제 막 유비에게서 하비를 빼앗고 서주자사를 자칭한 여포에게 원술의 의미심장한 서신 한 통이 온다.

"내가 그대에게 감사할 것이 세 가지 있소.

첫째, 원씨 일가의 원수를 갚아준 것

둘째, 조조의 연주를 공격하여 내 체면을 세워준 것,

셋째, 유비를 격파해 준 것.

감사의 뜻으로 쌀 20만 곡을 보내며, 병기가 부족하다면 크건 작건 말만 하면 얼마든지 보내주겠소."

원술이 여포에게 감사를 전한 세 가지 중 첫 번째는, 동탁 대 반동탁연합의 전쟁 당시 동탁이 낙양에 있던 원씨 일가를 몰살한 일을 말한 것이다.

여포가 동탁을 죽여 주었으니 원소, 원술 형제의 원수를 갚은 은인이다라는 뜻으로, 여포 자신도 장안을 탈출하며 같은 말을 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술과 여포의 흐뭇한 관계는 파탄나고 만다.

같은 해 6월, 여포가 머무는 하비성 내에서 장수 학맹의 반란이 일어났다.

학맹의 반란은 학맹의 부장이었던 조성이 끝까지 여포의 편을 들면서 실패로 끝났다.

여포는 부상을 입은 조성에게 대체 왜 반란이 일어난 것인지 물었다.

조성은 이렇게 답했다.

"학맹의 반란은 원술이 사주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진궁도 연루되어 있습니다!"

여포는 진궁이 연루된 사실은 불문에 부쳤지만, 원술이 자신을 몰아내고 서주를 차지하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은 확실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멸망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동맹을 성사시키지 못한다.

어째서 화기애애했던 서신의 분위기와는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난 것일까?

 

 

 

 

 

1장. 원술, 안팎으로 서주를 뒤흔들다

 

196년 여름, 아마도 음력으로 4월 무렵이었을 것이다.

원술은 수춘을 중심으로 한 구강군, 그 남쪽의 여강군에 거점을 두고 장강 너머로는 손책을 파견하여 양주로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원술은 장강 남북의 주를 장악하여 남중국에서 나름의 세력을 키워 새로운 왕조를 세우거나, 못해도 중국 남부에 할거할 생각이었던 듯하다. 그런 그의 구상대로라면, 2년 전인 194년에 주목 도겸을 잃은 서주는 꼭 필요한 땅이었다.

하지만 그 땅은 유감스럽게도 원술의 것이 아니었다.

출신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자신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는 유비라는 자가 북쪽에서 갑자기 내려와, 서주를 차지한 것이다.

당시 손책과 주유를 비롯한 젊고 패기 넘치는 무장들을 잔뜩 거느렸던 원술은 서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조조는 황제 유협을 맞이하겠답시고 낙양과 예주 서부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얼마든지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여기서 각 인물의 전기라는 형식으로 쓰인 『삼국지』 및 거기 달린 주해 등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소설인 『연의』는 그 구성 상 여러 사건들이 시간 순서대로 쓰인 것 같고, 그 영향으로 『삼국지』의 사건들 역시 차례대로 일어난 듯 인식되지만, 막상 파악해보면 그 사건들은 동시에 일어난 경우가 많다.

이 무렵 황제 유협은 장안을 탈출하여 양봉, 한섬, 동승 등의 호위를 받고 있었는데, 원술은 자신의 장수인 장노(萇奴)를 파견하여 이들과 접촉했다.

한편 조조는 예주 일대에서 원술의 세력을 몰아내느라 작년(195년)부터 고생하고 있었다. 어찌나 격전이었던지 조조와 친했던 진소라는 사람까지 전사할 지경이었다. 조조는 이 진소의 아들 진진을 조씨 집안으로 들여 조씨 성까지 내려줬다. 그가 바로 조진이다.

196년 봄 1월, 예주 진국에서의 격전이 끝났다. 원술이 파견한 진국상 원사가 조조에게 항복하며 원술과 조조의 예주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숨을 돌린 조조는 서쪽으로 조홍을 파견, 황제 유협을 맞이하려 했지만 조홍의 앞을 막아서는 자가 있었다. 바로 원술의 장수 장노와, 그와 결탁한 양봉, 한섬, 동승 등이었다.

원술의 방해 공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원술은 원씨고, 이른바 '여남 원씨'라 일컬어지는 집안이었다.

예주 여남군 및 그 근처 영창군 일대에서는 황건적 잔당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하의, 유벽, 황소, 하만 등이 그들로, 원술은 여남에 남은 가문의 영향력을 활용해 그들로 하여금 조조의 천자봉대를 방해하려 들었다.

어쩌면 이는 원술만의 힘이 아니라, 원술이 접촉한 양봉, 한섬의 힘일 수도 있었다. 이들은 백파적 출신으로, 백파적은 황건 봉기 당시 여러 분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즉 양봉과 한섬은 황건 봉기 당시 장각의 제자들이라는 인연을 활용해 여남의 황건 잔당과 원술 사이에 다리를 놓았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렇게 조조의 발을 묶어두는 동안, 원술은 서주로 군을 출동시켰다. 유비 역시 즉각 대응했다.

원술과 유비, 두 세력의 군대는 하비국 하비현 서남쪽, 우이현과 회음현에서 격돌했다.

원술의 장수 기령이 지휘하며 최소 3만이 넘는 원술군을, 유비는 유주에서 데려온 기병 및 오환 등 여러 이민족 기병 수천을 활용하여 맹활약했다. 이 병력은 유비가 도겸을 구원하러 왔을 때의 기록에 의존하여 추정한 것이다.

여기에는 서주 토박이 보병들도 있었을지 모르나 조조가 도륙한 서주의 물자와 보급 능력으로 많은 수를 유지하긴 어려웠으리라 본다. 도겸이 남긴 단양병이라는 정예병들은 조표가 지휘했으나 그의 충성심은 아직 믿기 어려웠다. 조표를 감시하기 위해 장비와 그 휘하 병력을 떼어놓고 왔으니, 유비가 실제로 원술과의 전쟁에 동원한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래도 유비는 분전하여 우이, 회음 선에서 원술의 군대를 한달 넘게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본거지인 수춘에서 멀리 원정을 나온 데다, 머릿수도 많아 보급에 곤란을 겪을 원술군을 상대로 계속 지연전을 펼치면 승산도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원술은 유비를 정면에서만 공격하지 않았다.

원술은 유비 세력의 내부, 즉 서주 내부에도 공작을 해 두고 있었다.

조표를 중심으로 한 단양병들이 하비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

삼국지의 촉한 황제 유선에 빙의했다. * 일부 회차에는 작가님이 직접 작성하신 지도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seri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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