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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조-원술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본 유비-원술 전쟁 (2)

by 루모로마노 2024.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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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서주의 통치 구조-서주 호족과 단양병의 대립

 

 

난세가 시작된 이후, 한나라 사람들은 마을에 보루를 쌓고 스스로를 방어했다. 각 마을의 군사요새화는 꽤 효과적이어서, 흉노족이 각 지역을 약탈하려고 해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이런 식으로 각 지역이 하나의 군사집단으로 뭉치는 중심에는 그 지역의 호족들이 있었다.

호족들은 백성들과 하나로 뭉쳐 지역을 방어하기도 하고, 그 백성들을 자기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으로 삼기도 했다. 외부의 침략에 대항해 방어전을 치르면서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호족의 사병화 되어 갔다.

호족이 백성을 착취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호족 밑으로 들어간 백성은 일단 관청의 인구통계에서 사라졌다. 즉 나라의 무거운 세금이나 물자 징발, 군역 등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호족의 백성 통치가 가혹했을 수도 있지만, 이후 시대에도 '국가가 호구 조사를 하면 백성들이 전부 호족 밑으로 도망친다'라는 인식이 있었던 만큼, 적어도 대체적으로 국가의 폭력보다는 부드러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호족도 백성도, 이것만으로는 스스로를 지키기에 불충분했다. 더 압도적인 병력, 더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무장 집단의 침략은 이겨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호족들은 선택해야 했다.

외부의 침략자에게 굴복할지, 아니면 다른 외부의 군사 세력과 제휴할지.

형주의 호족은 유표와 제휴했고, 유표는 그들과 인척 관계를 맺는 한편으로 자신과 손잡지 않은 호족들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유표가 죽자 형주의 호족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조조에게 굴복하기로 하고, 다른 한쪽은 유표가 '형주자사 대리'를 맡겼던 유비 편으로 들어갔다.

익주의 호족 역시 유언과 함께 동쪽에서 들어온 군대, '동주병'과 제휴했다.

서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주의 호족은 도겸과 제휴했다.

전 서주목인 도겸은 양주 단양군 사람이었다.

이 단양군 출신의 정예 병력을 바로 단양병이라고 한다.

단양군이 어디인지 바로 와닿지 않을 수 있는데, 손권의 오나라가 도읍한 건업이 바로 이 단양군 '건업현'이다.

단양병 집단의 수장인 도겸은 북쪽으로 공손찬과 손을 잡으면서, 원소계 군벌인 조조와 대립했다.

도겸은 서쪽으로는 예주 패국 패현(소패)을 장악하며 예주 동부를 노리는 한편으로, 공손찬과의 동맹에 응해 연주 동남부를 공략하는 등 활발한 군사 활동을 벌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죽었다.

당시 조숭이 머물던 태산군 화현은 행정구역상의 이름 때문에 태산 근처에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태산군 남부 경계 지역, 오히려 서주 낭야군 개양현 근처에 붙어 있는 현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조조도 태산태수 응소를 시켜 급히 조숭을 피난시키고자 했지만, 도겸의 북진이 더 빨라 조숭은 죽고 말았다.

도겸이 정말로 조숭을 호위하려 했는데, 호위로 보낸 장개가 문제를 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호위는 핑계고 도겸의 군사 행동 과정에서 조숭이 사망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192년 원소-공손찬 전쟁에서 도겸은 공손찬의 편으로 연주 동군을 침범한 전력이 있으니, 조조로서는 도겸의 행동이 고의라고 생각할 근거는 충분했다.

이듬해인 193년 가을, 겨울(7월~12월) 벌어진 조조-도겸 전쟁에서 조조는 도겸을 크게 이기고 서주를 도륙한다. 이것이 서주대학살인데, 조조의 선악을 논하는 것은 이미 내 작품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에서 다루었으니 잠시 미뤄두자.

대신 서주 호족의 입장에서, 10여 개 성이 도륙당하는 동안 군사적 무능을 드러낸 도겸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상상해보자.

"단양병이라는 자들은 천하 제일의 정예병이라고 떠들더니, 황건 잔당으로 구성된 청주병 앞에서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잖나."

해가 바뀌어(194년), 봄(1월~3월)에 조조는 연주로 회군했다가, 여름(4월~6월)에 2차 서주 도륙을 개시한다. 이때 다섯 성이 도륙당하는 동안 도겸은 원래 서주의 치소인 팽성국 팽성현도 버리고 동해군 담현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런 도겸을 내버려둔 채 담현 동쪽으로 향하던 조조 앞에, 유주에서 내려온 기마집단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유비다.

유비는 도겸의 장수이자 역시 단양병인 조표와 합류, 담현 동쪽에서 조조를 격파한다. 「무제기」는 조조가 오히려 유비와 조표를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담현 동쪽 회전 이후 조조의 행적은 담현 '서쪽'의 양분현이라는 곳으로 나온다.

이때 유비 휘하 병력 구성은 꽤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일단 공손찬의 장수 전해와 함께 온 유주의 기병이 있었다. 그 외에도 오환족을 비롯한 다양한 이민족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당시 유비의 휘하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위나라의 북방 이민족 전선 지휘관이 되는 전예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때 유비가 「무제기」의 기록대로 격파당했다면 도겸이 조조와의 최전선인 '예주 패국'에 유비를 예주자사로 삼으면서까지 배치할 이유가 없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서주 호족 미축과 진등도 유비를 새로운 '외부의 군사지도자'로서 지지할 이유 역시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담현 전투는 유비의 승리이거나, 적어도 유비는 여기서 거의 병력 손실을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담현 전투에서 패퇴한 조조는 서쪽 양분현으로 물러나 분풀이하듯 그곳을 또 도륙한다. 그러나 조조는 서주에 더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여포와 연합한 연주 각 지역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조를 물리치긴 했지만, 도겸은 이미 60이 넘은 나이인 데다 실의에 빠져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도겸은 일단 유비를 패국 패현에 배치하여 조조 전선을 감당하게끔 했지만, 서주 호족들의 마음은 이미 군사적 무능을 드러낸 도겸과 단양병에게서 떠난 뒤였다. 이들 호족의 대표인 미축과 진등은 죽음을 앞둔 도겸에게 유비를 후계자로 삼으라 권한다.

도겸 역시 자신이 군사적 무능을 드러낸 상황에서, 서주 안에서 붕 떠버릴 단양병의 미래, 자식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젊고 새로운 군사지도자 유비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유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

자신을 서주목으로 추대하려는 미축과 진등에게 유비는 "원술이 대신하는 게 어떻냐"고 물었다. 어떤 사람들의 생각대로 유비가 정말 야심만 가득찬 음흉한 인물이었다면 원술에게 서주를 넘기고 그 밑으로 들어가는 것도 유비에겐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거덜난 서주 및 단양병 수습 문제를 자신이 맡는 것보다는, 원술이 맡는 게 차라리 나았다. 그렇게 하면 유비는 패국 패현을 거점으로 자신의 예주자사 자리를 마음껏 활용하여 원술에게 절실한 '예주전선 담당 사령관'의 지위를 누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서주 호족에게 원술은 그냥 황당한 선택지였다. 일단 애초에 도겸은 공손찬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원술과 협력하긴 했어도, 원술과 동맹은 아니었다.

원술의 원래 기반은 저 멀리 서쪽, 형주 남양군과 예주 여남군 일대였고, 회남 지역인 구강군 수춘에 도착한 것은 조조에게 박살나고 도망친 작년(193년)의 일이었다. 접점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도겸처럼 조조를 상대로 군사적 무능을 드러낸 원술을 뭘 믿고 서주를 맡긴단 말인가?

북해상 공융 역시 공손찬 쪽에 가깝다보니 '원술은 아니다'라며 유비에게 서주목이 되길 권했다.

서주 호족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유비를 서주목으로 추대하는 한편, 유비의 정통성을 위해 반동탁연합 맹주였던 원소의 권위를 이용했다.

의외로 원소는 선선히 유비의 서주목 취임을 인정해 주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먼저 공손찬계 무장인 유비를 공손찬으로부터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

경쟁자인 원술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

이 시점에 연주를 전부 날려먹고 몰락을 앞두고 있는, 최소한 그렇게 보이는 조조를 대체할 세력이라는 점.

이런 앞뒤 상황이 겹쳐 유비는 처음으로 군웅들과 대등한 반열에 올랐다.

문제는 서주 호족이 새로운 '외부 군사 집단'과 계약을 맺어버렸으니, 계약 갱신이 안 된 단양병의 처지는 서주에서 붕 떠버렸다는 것이다.

이들은 장강을 건너 고향인 양주 단양군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들과 접촉한 새로운 야심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원술이었다.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

삼국지의 촉한 황제 유선에 빙의했다. * 일부 회차에는 작가님이 직접 작성하신 지도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seri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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