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조조-원술 전쟁
원술이 여포에게 감사했던 세 가지 중, '유비를 격파한 것'에 대해서는 앞선 글에서 다루었다.
나는 이 세 가지 내용을 담은 서신과 더불어, 195년~196년의 상황을 근거로 당시의 일들이 여포를 배후에서 조종한 원술의 주도로 발생했다고 본다.
나아가 196년 유비와 원술의 전쟁은 193년~195년 조조-원술 전쟁의 여파가 서주까지 닿은 것이라 본다.
앞서 여포와 원술의 긴밀한 연결, 이후 조조와 유비의 은밀한 제휴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그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이제 나머지 두 가지를 살펴보자.
원술이 여포에게 감사한 것, 그 중 첫 번째인 '원씨 일가의 원수를 갚아준 것'은 사실 원술이 먼저 언급한 게 아니라, 여포가 먼저 말했다.
동탁 주살(4월 23일)로부터 36일 뒤인 192년 6월 1일, 장안이 동탁 잔당에게 함락되면서 여포는 장안을 탈출한다.
그때 여포가 자신이 원씨 형제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원술이나 원소가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대로 원술은 여포를 간접적으로 멀리서 부리다가 이용 가치가 다하면 팽하려 했지, 여포를 직접 부리려 하진 않았다.
이에 여포는 일단 원소에게 가서 기주 상산군의 흑산적 장연을 공격하는데, 장연은 공손찬과 연계되어 있으니 이 전쟁은 원소-공손찬 전쟁의 연장선일 것이다.
여포는 장연을 격파하고 상산군 일대를 노략질(이 과정에서 조운의 형도 죽는 바람에 조운이 상을 치르러 낙향하는 일도 있었다)하면서 군대를 크게 불린다.
원소는 이런 여포를 경계하여 그를 죽일 계략을 꾸미게 되고, 여포는 이를 눈치채자마자 도망쳐 일단 연주로 가 장막의 보호를 받는다.
「장막전」에 따르면 장막은 조조, 원소 모두와 친구였는데, 이 무렵에는 원소와 사이가 아주 나빠져 있었다.
원소가 반동탁연합의 맹주로 추대된 뒤 교만해지자 장막이 크게 나무란 일이 있었고, 이에 원소는 조조에게 장막을 죽이라 명령했었다. 조조가 "친구를 어떻게 죽이냐"며 거절한 덕에 살아남았는데, 이번에 또 여포를 장막이 보호하자 원소는 크게 노한다.
여포는 일단 다시 장막을 떠나 하내의 장양에게로 갔지만, 장막의 마음 속에는 조조가 결국 원소의 명령대로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하는 불안이 있었던 듯하다. 이에 장막은 진궁과 모의, 여포를 다시 맞아들여 연주를 뒤엎기로 한다.
각종 매체에서 진궁을 여포의 충신으로 표현하는 것과 달리, 진궁은 여포를 쓰다 버릴 말로 취급했을 뿐이었던 듯하다. 그럼 진궁은 장막에게 충성했는가? 그것도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진궁은 누구에게 선을 대고 있었는가?
나는 진궁의 배후로 원술을 지목한다. 지난 편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학맹의 반란에는 진궁도 연루되어 있었고, 그 반란 자체가 원술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
반란이 실패하고서도 진궁은 뻔뻔할 정도로 여러 차례, 심지어는 하비성이 조조에게 포위되고 나서도 원술과의 동맹을 주장한다. 즉 진궁은 서주의 진정한 주인을 원술로 생각했듯, 194년 반란에서 연주의 진정한 주인을 원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장막 입장에서도 원술에게 기댈 이유는 충분했다. 그는 두 차례 원소의 미움을 샀고, 원소의 부하인 조조가 언제 자신을 죽일지 몰라 불안에 떨었다. 그렇다면 장막은 원소와 대립하는 이들과 손을 잡아야 했는데, 여포는 떠돌이일 뿐이고 공손찬은 너무 북쪽에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원술 뿐이었다.
게다가 장막은 195년 여름(4월~6월),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동생 장초와 일족들을 진류군 옹구현으로 피난시킨다. 옹구현은 진류군 진류현 동남쪽에 있는데, 당시 원술의 세력은 예주 진국 일부, 양국까지 미칠 정도로 넓었으니 충분히 원술군이 올 수 있는 거리였다.
장막은 일단 여포와 함께 유비에게 의지했다가, 원술에게 원군을 청해 장초와 일족들을 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원술에게 구원을 청하러 가던 도중 자신은 부하들에게 죽고, 옹구현도 8월~ 12월의 포위전( 끝에 함락되어 장초를 비롯한 일족 역시 몰살당한다.(「무제기」, 「장막전」)
무엇보다도 194년~195년 두 해에 걸쳐 진행된 연주 전쟁에는 분명히 원술군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조진(원래 이름은 진진)의 아버지 진소가 전사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고(「조진전」), 195년 12월에 장막의 일족들을 죽이자마자 예주 진국 공략을 시작, 다음달인 196년 1월에 원술이 임명한 진국상 원사의 항복을 받아내며, 또 그다음달인 196년 2월에는 예주 영천군, 여남군에서 원술의 사주를 받은 황건적과 싸우고, 황제를 맞이하러 보낸 조홍은 원술의 장수 장노에게 저지당한다.(「무제기」)
즉 원술은 194년~195년 연주 반란과 연계하여 196년 초까지 계속 조조를 괴롭혀 왔고, 이렇게 조조의 발이 확실하게 묶이자 196년 4월 유비 공격을 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조조를 향한 원술의 집요한 훼방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물론 근본적인 이유는 원술이 원소와 대립했고, 그러다보니 원소의 부하 조조와 부딪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194년 연주 반란에서 한 해 거슬러 올라가 193년의 일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보다 또 전 해인 192년 원술의 요청에 의해 공손찬과 도겸의 연합 작전이 기주, 청주, 연주를 무대로 펼쳐졌던 것을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원술은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배후에서 여포를, 진궁과 장막과 학맹을 조종하는 전략을 즐겼다. 192년도 마찬가지로 원술은 도겸과 공손찬이 원소, 조조의 힘을 충분히 빼놓길 기다린 듯하다.
193년 봄, 아마도 1월~2월사이로 추정된다. 도겸을 물리친 조조는 연주 제음군 견성현(견성현은 제음군과 동군을 복잡하게 오가며 행정구역이 변한다)에 주둔했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원술이 진류군으로 북상했기 때문이다.
원술은 흑산적 잔당 및 흉노 선우 어부라의 지원군까지 합한 대병력을 진류군으로 집결시켰다.
진류군 진류현을 지나 동북쪽 진류군 봉구현에 주둔하며, 선봉장 유상을 견성현 서남쪽 광정까지 진격시켰다.
조조가 광정의 유상을 공격하며 전투가 시작되자, 원술이 유상을 도우러 북상했다. 원술군과 흑산적, 흉노 연합군은 여기서 조조에게 격파당했고, 원술은 봉구로 퇴각했다.
조조가 봉구까지 추격해오자 원술은 봉구를 버리고 동남쪽 진류군 양읍현으로 도망쳤다. 이 양읍현에 수공을 가하니 놀란 원술은 예주 양국 영릉현으로 달아났고, 여기까지도 추격이 오자 아예 회수를 건너 구강군 수춘현으로 달아났다.
3월, 원술은 양주자사 진온을 죽이고 구강군 일대를 점령한다.
이것이 원술이 원래 근거지인 남양을 버리고 구강군 수춘현으로 오게 된 사연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미축이나 진등이 원술을 새로운 서주목으로 맞아들이지 않은 게 너무 당연한 상황이었다.
체면을 완전히 구기긴 했으나 그래도 원술은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여름(4월~6월) 무렵에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살해당했고, 그 해 가을과 겨울(7월~12월)에 조조는 서주 전쟁에 몰두하기 때문이었다.
붉은색으로 표시한 전쟁 기간을 보면 알겠지만, 제1차 조조-원술 전쟁은 1월과 2월 정도로 짧다. 반면에 서주 전쟁은 7월에서 12월, 반년 정도로 길며, 봄에 잠깐 휴식했다가 이듬해인 194년 여름(4월~6월) 재개된다.
장막의 불안이 아니어도, 조조의 전쟁을 뒷바라지하는 연주의 부담과 불만이 점차 커져갔을 것이다. 서주대학살의 악명도 악명인데다 조조의 담현 전투 패전 소식까지 전해졌으니 연주는 더는 조조를 참을 수 없었다. 『연의』는 조조가 연주의 반란 소식을 접하자 마치 유비를 봐주고 돌아간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실상은 점령지와 약탈품을 모조리 토해놓고 돌아가야 하는 패주였을 것이다. 조조가 기껏해야 한다는 짓이 분풀이로 동해군 분양현을 도륙하는 것이었고, 도겸은 국경을 회복하고 유비는 멀쩡하게 패국에 진출했으니까.
이후 조조는 여포의 계략에 말려들어 패주하면서 낙마하거나 왼손바닥에 화상을 입는 등 갖은 고생을 겪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위기는 원소가 제안한 '여포와의 화친'이었다.
194년 9월, 원소는 돌연 조조에게 여포와의 화친을 명령했다. 조조에겐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이제 겨우 여포를 좀 이겨서 동군 일부와 제음군 일부를 회복했을 뿐이고(제음군 중심지이자 조조의 주요 거점이었던 정도현도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 여포는 패했다지만 여전히 멀쩡하게 산양군, 제음군, 진류군 등을 장악하고 있는데 화친하라는 건 조조의 연주 지배가 끝장난다는 이야기였다.
내 추측대로 여포, 장막, 진궁이 원술의 입김에 닿았다면, 원소 입장에서는 연주가 원술계로 넘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여포 등을 자신의 말로 부리는 게 나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이미 유비의 서주 지배를 승인하여 조조를 대체할 말로 고려 중이던 것의 연장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자신의 복수를 방해한 유비의 서주 지배 승인, 여포와의 화친 명령, 그리고 앞서 조숭 호위에 실패한 태산태수 응소(응소는 원소한테 도망쳤다) 소환 거부. 이 세 가지 일은 이후 조조가 단독으로 협천자를 결의하고 원소의 밑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리라 본다.
원소의 화친 명령을 거부한 이상 조조는 원소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고, 이를 악물고 혼자 힘으로 여포와, 그 배후의 원술과 싸워야만 했다. 해를 넘겨 195년 여름(4월~6월)이 되어서야 조조는 일단 연주에서 여포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상이 원술이 "연주에서 자기 체면을 세워주었다"고 여포에게 감사한 일의 전말이다.
물론 여포와 반란의 주역들은 산양군 동남쪽에 바로 붙어 있는 패국으로 도망쳐 버렸으니, 조조에게 아직 불안 요소는 남아 있었다.
게다가 장막 잔당, 원술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아 195년 8월부터는 옹구 포위전을 치르고, 12월부터 다음해인 196년 상반기 내내 영천, 여남 황건적 및 양봉, 한섬과 싸워야 했다. 이 싸움은 8월에 낙양에 입성했다가 탈출하고 9월에 허에 황제 유협을 데리고 돌아오고서야 마침내 끝난다.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 사이 원술은 강동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자신을 몰락 직전까지 몰아넣은 여포는 서주를 차지했다.
게다가 친구이자 뒷배라고 생각했던 원소는 명백히 자신을 버릴 의사를 드러냈다.
9월, 조조는 자신이 대장군이 되면서 원소와 유비에게 각각 미끼를 던졌다. 하나는 원소에게 태위 직을 내리는 것, 다른 하나는 유비에게 자신이 얼마 전까지 있었던 진동장군 직을 내리는 것.
이렇게 미끼를 던져두고 10월, 조조는 양현에 주둔 중인 양봉을 공격하여 협천자의 마지막 방해꾼을 몰아냈다. 한섬은 조조가 동승과 모의하여 낙양에 들어올 때 양봉에게 도망쳤다가, 이때 양봉과 함께 원술에게 도망친다.
11월, 조조가 던져 둔 미끼의 반응이 왔다. 지난 편에서도 살펴봤듯 유비는 여포와 원술에게 복수할 생각에 눈이 뒤집혀 있었고, 패국상 진규와 진등 부자를 통해 조조와 적극적으로 제휴하며 기꺼이 진동장군 직을 받아들였다. 조조는 원소가 끌어들이려 했던 유비를 자기 편으로 데려오면서, 일단 동맹 하나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
반면에 원소는 태위 직을 거부했다. 이에 조조는 아직 원소와 대결할 때가 아니라고 여겨 그에게 대장군 직을 양보하고, 자신은 거기장군 겸 사공이 되었다.
이에 더해 조조는 원소를 달랠 겸, 또 발을 묶어둘 겸 선물을 하나 주었다.
협천자 이후 조조는 원술, 양봉, 한섬을 역적으로 선포하고 수배령을 내렸는데, 이 역적 목록에 슬쩍 공손찬을 끼워넣었다. 원소는 공손찬을 치는 데 명분이라는 힘을 얻기도 했지만, 동시에 역적을 토벌할 의무도 짊어지게 되었다.
한편으로 원술이 공식적으로 역적이 되었으니, 안 그래도 진궁과 원술의 연계가 불안했던 여포는 더욱 원술과의 동맹을 꺼리게 된다. 여포는 이후 계속 허도 조정의 공식적인 관직에 절절매게 된다.
이런 식으로 196년 한 해는 저물었다.
그리고 허도 조정이 공식적으로 역적으로 선포한 원술은, 마침내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발작을 시작했다.
197년 봄(1월~3월), 원술은 황제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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