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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조-원술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본 유비-원술 전쟁 (5)

by 루모로마노 202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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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원술의 강동 장악과 상실

 

193년 3월, 조조에게 패배한 원술은 양주 구강군 수춘현으로 왔다.

여기서 원술이 수춘을 장악한 과정은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본래 양주자사였던 진온을 죽이고 수춘을 차지했다는 설.

둘째는 진온은 이미 작년(192년)에 죽었고, 원술이 진우라는 사람에게 양주자사를 맡겼는데, 막상 원술이 쫓겨오자 진우가 원술의 수춘 진입을 막았고, 원술이 이를 물리치고 수춘에 들어갔다는 설이다.

진우는 하비로 도망쳤는데, 그가 진규의 사촌동생이고 진등의 오촌 당숙임을 생각하면 이쪽이 더 신빙성이 있는 듯하다.

어쨌든 193년 3월에 원술은 수춘에 입성하여 구강군을 장악했다.

조조가 복수전을 빙자한 학살을 저지르고, 유비가 남하하여 서주를 차지하는 193년~194년의 기간 동안 의외로 원술은 조용하게 지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술은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건 북중국 쪽에서 봤을 때 그럴 뿐이었다. 이 기간 동안 원술은 남중국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193년부터 196년까지 원술의 양주 장악은 각 기록마다 같은 사건을 적어두고도 시기의 차이가 있어, 종합적으로 판단하면서도 두루뭉술하게 "몇 년부터 몇 년 까지 사이의 일이겠거니" 해야 한다.

「손책전」을 참고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후한서』 「효헌제기」나 『삼국지』 「무제기」는 간접적인 기록이라 힌트만 얻어야 한다. 이에 더해 「주유전」, 「손정전」, 「왕랑전」, 「유요전」, 「주치전」, 「손분전」을 함께 읽어야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다.

193년 3월, 원술은 패전했다고 의기소침하지 않고 곧장 양주로의 확장에 착수한 듯하다.

이때 손책의 외숙부 오경, 사촌형 손분 모두 원술의 장수였는데, 손견의 사후 손견 휘하의 장병들이 모두 원술군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경과 손분은 동쪽으로 장강을 건너 단양군을 점령, 태수 주흔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원술은 곧바로 오경을 단양태수, 손분을 단양도위로 임명했다.

손책은 193년부터 강동 정벌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손책의 '독립적인 강동정벌'이 아니라, 이때 외숙부와 사촌형을 따라 원술의 강동정벌에 참여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한편 한나라 조정은 연주자사 유대의 동생, 유요에게 양주자사 자리를 내린다. 양주자사라면 마땅히 구강군 수춘현으로 들어가야 하나 그곳은 이미 원술이 장악했다. 그래서 일단 장강을 건넜는데, 오경과 손분은 유요와 충돌을 빚고 싶지 않았는지, 혹은 회유할 생각이었는지 그를 꽤 잘 대해주었다.

오경과 손분은 유요를 오군 곡아현으로 안내하는데, 이곳은 손견의 무덤이 있는 곳이자, 손견의 부인이면서 손책의 어머니이자 오경 본인의 누이인 오씨가 사는 곳이었다.

즉 오경은 자신들이 장악한 단양군 바깥으로 유요를 안내해 충돌을 피하는 한편으로, 그렇게 중요한 곳에 유요가 주둔하게 허락하여 우호를 표한 듯하다.

한편 외숙부를 따라 단양군 정복에서 군공을 세운 손책은 수춘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를 기다리는 임무는 여강군 정벌.

손책은 원술의 명령대로 여강태수 육강의 서현을 포위하는데, 이 포위전은 2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193년~194년의 일인지, 194년~195년의 일인지는 불확실하다. 어쨌든 이 처참한 포위전 동안 육씨 일가의 절반이 굶어 죽었으며, 나이 70세에 가까웠던 육강 본인도 성이 함락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고 한다. 육강이 미리 오군으로 피난시킨 소년 육손과 그 외 일족들만이 무사했는데, 이는 후에 손씨와 육씨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여강군을 점령한 손책은 다시 수춘으로 돌아왔다. 손책은 여강 태수 자리를 기대했으나 원술은 그 자리에 유훈을 앉혔다.

손책은 크게 실망했지만 기회는 곧 찾아왔다.

오경과 손분이 그렇게 후대한 유요가, 돌연 태도를 바꿔 공격한 것이다.

유요 휘하에는 착융, 설례, 번능, 장영, 우미, 우자 등의 장수가 모여들었는데, 유요는 이들과 함께 오경과 손분을 공격, 장강 건너편으로 몰아냈다. 손책에겐 다행스럽게도 어머니 오씨는 곡아를 탈출하여 오경과 함께 장강 건너로 피신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원술에게 한 방 먹여준 유요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는지, 그의 권한을 양주목으로 확대하고 병력 수만 명의 지휘권까지 내려주었다.

한창 여포와 진궁 등을 배후 조종하며 조조의 발을 묶어두고, 한편으로는 서주 진출 기회를 노리던 원술에겐 기분 잡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원술의 구상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양주 장악이 물거품이 될 위기였다.

결국 원술은 어쩔 수 없이 손책을 새장에서 풀어주었다. 손책은 원술의 우려와 기대에 정확하게 부응했다. 그는 곧바로 장강을 건너 유요를 격파하고 단양군을 장악했다. 유요는 북쪽으로 도망쳐 장강을 거슬러 오르는 배를 타고 서남쪽으로 향해 예장군으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병사했다.

원술은 이후 주유의 삼촌인 주상을 보내 단양태수를 삼은 듯하다.

손책은 동쪽의 오군이 아니라 동남쪽의 회계군부터 공략했다. 왕랑을 격파하고, 그가 저 멀리 남쪽 동야(후관현, 나중에 건안군이 되는 곳이다)까지 도망치자 추격해서 결국 사로잡았다. 왕랑은 198년까지 곡아현에 연금되어 있다가 조조의 요청으로 풀려나 허도로 간다.

한편 손책이 회계군을 정복하는 동안, 손견의 옛 장수인 주치는 따로 군대를 이끌며 동쪽의 오군을 쳤다. 오군태수 허공은 주치에게 패하고 엄백호에게 도망쳤으며, 이후 엄백호가 손책에게 패하고 도망칠 때 손책에게 항복한 듯하다.

이러한 강동 정벌 과정이 193년~196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각종 매체에서는 손책이 이 시점에 강동 전체를 장악하고, 원술의 세력은 형편 없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 원정에서 손책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은 회계군 하나였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오와 회계, 두 군 뿐이었다. 아버지를 통해 영향권에 있다고 하지만 주치는 이때 손책과 대등한 오군태수였다. 단양군은 주유의 삼촌인 주상이 태수로 있다고는 하지만, 손책의 벗은 주유였지 주상이 아니었다. 이에 더해 원술은 손책의 외숙부 오경을 장강 북쪽의 광릉으로 보내버렸다.

사정이 이랬기에 원술은 손책이 자칭한 회계태수 정도는 승인해준 듯하다.

그래도 기반 하나 없던 아버지 시절에 비해, 손책은 오와 회계, 두 군을 장악했다. 그는 아직 젊었다. 기회는 얼마든지 올 것이고, 실제로도 그랬다.

197년 봄(1월~3월), 손책의 강동 정벌로 '자기 세력이 엄청나게 커졌다'고 착각한 데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완전히 역적으로 몰린 원술은 결국 황제 즉위를 결단했다. 그렇게 착각할만도 했다. 원술의 이름을 내세운 군국은 넓게 보면 열 개(구강, 여강, 단양, 오, 회계에 양국 일부, 진국 일부, 광릉 일부, 여남 일부, 패국 일부)에 달했다.

그러나 손책은 곧장 원술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서신으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군사 행동에 나섰다. 오, 회계 두 군의 손책군이 곧장 단양군으로 출동했다.

원술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어서, 단양태수로 있던 주상을 수춘으로 불러들이고, 자기 사촌동생인 원윤을 파견해 단양군이라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원윤은 손책의 장수 서곤에게 격퇴당하고, 이후 오경이 광릉을 버리고 남하하여 손책에게 단양태수로 임명되면서, 원술은 강동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6장. 원술-여포 전쟁

원술은 한편으로 여포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한윤을 사자로 보내 황제가 된 일을 설명하고, 여포의 딸을 태자비로 맞으려 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여포는 원술과의 동맹보다는 허도 조정에서의 인정을 더 간절히 원했다.

아마도 유비가 배후에 있었을 진규, 진등 부자의 공작까지 겹치자, 여포는 한윤을 묶어서 허도로 보내버렸다. 결국 한윤은 역적으로 비참하게 처형당했고, 원술의 분노는 극에 다다랐다.

원술은 작년(196년)에 조조에게 패하고 자신에게 귀순한 양봉, 한섬에, 자신의 장수인 장훈과 교유를 붙여 여포를 향해 진격시켰다. 하지만 패국상 진규는 이들 군대가 원술의 새 제국의 군대라기보다는 갑자기 합쳐진 군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고, 여포에게 이간계를 진언했다.

여포는 장훈과 교유를 쳐서 얻은 물자를 모두 주겠다며 양봉과 한섬을 유혹했다. 결국 양봉과 한섬의 배신에 장훈과 교유는 패주, 여포는 회수를 따라 신나게 반격하며 원술의 수춘을 향해 쳐들어갔다.

회수 일대를 약탈하던 여포는 "원술 당신은 평소에 맹장과 무사가 많다고 자랑하더니, 이제 내가 수춘 코앞까지 왔는데 그 맹장과 무사는 대체 어디로 갔소"라고 글을 보내며 조롱했다. 194년~195년의 연주 반란부터 196년의 서주 장악까지 철저히 자신을 장기말로 쓰려던 원술에 대한 통쾌한 조롱이었다.

이에 원술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수춘성을 나왔지만 여포의 부대를 추격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여포는 양봉과 한섬을 거둘 생각이 없었다. 양봉과 한섬은 어쨌든 수배령이 내려진 역적이었다. 이들을 사면할 권한도 없거니와 손도 더럽히기 싫었던 여포는, 이들을 그냥 방치해 버렸다.

양봉과 한섬은 그대로 회수 일대의 도적떼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남은 목숨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 앞에 전혀 예상치 못한 처형집행인이 나타났다.

유비였다.

유비는 양봉을 속여 유인한 뒤 죽였다. 한섬은 그 길로 도주했다.

한섬은 옛날 백파적 시절의 근거지인 병주로 돌아가려 했던 것 같은데, 가던 중에 예주 패국 저추현에서 둔수(屯帥)로 일하던 장선이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조조의 허도 조정이 역적으로 수배한 네 사람 중 둘이 죽었다.

7장. 제2차 조조-원술 전쟁

원술의 행보는 이제 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물론 그가 조조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 판단할만한 근거는 있었다. 197년 2월, 조조는 남양군 완현에서 아들 조앙, 조카 조안민, 아끼던 장수 전위를 비롯한 수많은 장병을 잃었으니까.

그래도 같은 시기 자신도 여포에게 대패했는데,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정도 일로는 조조가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원술이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조조가 아니라 진국의 왕 유총이었다.

197년 9월, 원술은 진국을 공격해 진왕 유총과 진국상 낙준을 죽였다.

그러나 원술의 예상과 달리 조조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조조는 허도 바로 동쪽에 붙어 있는 진국에서 원술의 세력이 함부로 날뛰게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조조의 출격에 원술과 그 군대는 혼비백산했다. 어쩌면 계속해서 격파당하며 동쪽으로 도망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원술이 마침내 장병들을 버리고 회수를 건너 수춘으로 돌아가고, 회수 이북에 고립된 고유, 이풍, 양강, 악취 등 장수와 병사들이 섬멸당한 곳은 패국 기현(蘄縣)이었다. 이곳은 패국 동남쪽 끝으로, 차라리 서주와 더 가까운 곳이었다.

여기서 조조는 원술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원술의 회수 이북, 그러니까 여남군, 진국, 패국, 양국 등 예주 일대에 미치던 직간접적 영향은 이로써 완전히 소멸했다고 할 수 있었다.

원술의 전쟁도 이것으로 끝났다. 원술의 수명은 2년 좀 안 되게 남아 있었지만, 그는 이후 백성을 수탈하며 수춘에서 사치를 부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원술은 여기서 끝났다.

남은 것은 이제 여포였다.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

삼국지의 촉한 황제 유선에 빙의했다. * 일부 회차에는 작가님이 직접 작성하신 지도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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