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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반촉(反蜀) 유사역사학'과 익양대치

by 루모로마노 2024.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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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하나의 유령이 『삼국지』계를 떠돌고 있다.

"유교 명분론 세력이 2천여 년에 걸쳐 촉한을 띄워줘야겠다는 의지로 조위를 왜곡하고 손오를 비하했다"라는 음모론 말이다.

이런 음모론은 정사 『삼국지』나 『후한서』, 중국 본토 자료 등을 구하기 쉽지 않았던 때에나 먹힐 법한데, 요즘에도 이상할 정도로 어딘가에서는 음모론이 떠도는 모양이다.

아니, 음모론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하거나, 자료에 잘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속이길 일삼는다.

그러나 매체의 발달과 함께 최소한 『삼국지』로는 월 단위의 역사 전개, 『후한서』로는 심지어 일 단위의 역사 전개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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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발전 덕에, '한국천문연구원 천문우주지식정보'에서 제공하는

'생활천문관 - 음력양력변환계산'을 통해 우리는 『삼국지』의 기록에서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추앙받는 촉한을 깎아내려야 위진남북조 시대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의식이 가능하다'라는 대의를 내세우며, 그 대의를 위해서라면 역사 왜곡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퍼트리는 이야기를 좀 파헤쳐 보도록 하자.

먼저 나는 그러한 경향을 '반촉(反蜀) 유사역사학'이라 부르도록 하겠다. 그리고 오늘은 반촉 유사역사학의 첫 이야기로 '익양대치'를 꺼내볼까 한다.

1장. 익양대치란?

익양대치란 서기 214년 5월 이후 어느 시점부터, 215년 7월까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벌어진 유비와 손권 사이의 전쟁을 의미한다.

그간 「오주전」(손권의 일대기)이나 「여몽전」을 통해 이 사건은 이렇게 왜곡되어 알려졌다.

'전투 없이 무력할 정도로 손쉽게 유비가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빼앗겼다가, 손권의 너그러운 양보로 영릉을 돌려받은 군사적 대치 사건'.

이후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인식은 명백한 왜곡이다. 오나라 측 기록자들은 열심히 모순을 숨겨서 이 사건 당시 별다른 전투도 없었고, 그냥 양측이 대치만 하다가 물러난 사건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왜냐하면 이 사건의 진상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장사군 서북부, 상수와 장강 일대에서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어, 손권-노숙-여몽의 무참한 패배로 끝날 뻔 했으나 조조 덕에 간신히 무마한 것이기 때문이다.

촉한 측의 기록은 멸망 당시 종회의 난으로 인해 많이 소실되었고, 이에 비어 버린 부분을 오나라 측 기록에서 복사+붙여넣기를 하는 바람에 오나라의 정신승리적 이야기가 많이 남아버렸다. 그러나 기록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왜곡되었음을 말해주는 단서'는 충분히 남아 있다. 오늘은 그 단서들을 토대로, 왜곡된 익양대치 사건을 재구성 해보자.

(*이러한 이유로 이하 해당 사건은 '익양전쟁'으로 부르도록 하겠다)

 

 

 

 

2장. 손권과 노숙의 억지

서기 200년 손책 사후 양주를 물려받은 이래, 손권은 차근차근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전에 다른 글에서도 말했듯이, 손권은 208년 봄(1월~3월), 강하군을 들이쳐 황조를 죽이고 그 대부분을 점령했다. 위 지도에서 '손권령 강하'라고 표기된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다.

같은 해 208년 12월 적벽대전 이후, 손권은 장사군 동북부를 점령하고 '한창군'이라는 군을 설치했다. 이 한창군에는 남군 동쪽 일부도 들어간다.

즉 오나라측 기록에서 꾸준히 언급되는 '유비가 형주를 독차지했다'라는 것부터가 거짓말이다. 적벽대전 직후에 오나라는 강하군 대부분, 남군 일부, 장사군 절반을 보유하며 확실히 형주를 향한 기반을 다져놓고 있었다.

'형주 대여'라는 것이 오나라 측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 게 바로 이런 사실들 때문이다.

조조도 손권이 형식적으로라도 항복하자, 자기가 점령한 북형주 지역의 이름을 '영주'로 바꿔 손권의 형주 지배를 침범하지 않는 식으로 영토 분할에서 합의를 보았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영토 분할 합의는 익양전쟁 이후 유비와 손권 양측에도 이루어지는데, 208년 형주분할에선 그런 게 없다.

즉 유비와 손권 양측은 각자 실력이 되는대로 조조가 물러난 형주를 각자 점령했을 뿐이며, 손권은 자신이 점령, 유지할만한 역량이 없는 곳은 깔끔히 포기하고 '유비에게 서쪽 전선을 맡긴다'라는 전략을 취했을 따름이다.

적벽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손권의 본대는 합비를 공략 중이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자신이 합비를 비롯한 회남 일대의 공략에 집중하는 동안, 유비더러 형주 북부에서 찾아올 조조의 반격을 모조리 감당하라는 것이다.

'반촉 유사역사가'들이 그리는, '낭만적이고도 너그러워 유비에게 호의를 베푸는 손권'은 그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몇몇 '반촉 유사역사가'들은 이 시점에 유비가 손권의 아랫사람이라고도 표현하는데, 그 말대로라면 부하에게 땅을 '대여'하는 주군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유비의 관할구역을 익주로 축소하면 그만 아닌가? '대여' 운운하는 추잡한 수작에 놀아나면 이런 우스운 이야기를 지어내기 마련이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 6년 뒤, 서기 214년이 되었다.

「오주전」은 이 해 첫머리부터 잘못된 기록을 전한다.

214년 5월에 손권은 여강군 환현(환성) 정벌을 시작한다.

214년 윤달에 손권은 환성을 함락시키고, 유비가 익주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한다.

자, 이렇게 보면 마치 5월에 환성 공략을 시작해서 윤5월에 환성을 함락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있다.

서기 214년에 '윤5월'은 없다.

다만 '윤4월'은 있다.

그러니까 214년은 4월, 윤4월, 5월 순으로 흘러간다.

즉 「오주전」을 적힌 그대로 읽자면 윤4월에 이미 함락되었을 환성을 향해, 5월에 손권은 정벌을 시작한 것이다.

단순 착각에 의해 기록의 날짜와 내용이 뒤섞였을 수도 있다. 윤4월에 환성 정벌을 떠나, 5월에 함락시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윤4월에 함락시킨 것이 사실이라면, 이후 이어지는 '유비의 익주 점령에 분개하는 손권(「노숙전」)'의 기사가 아주 다른 의미로 읽힌다.

기존 「오주전」의 기록은 손권이 윤4월~5월에 걸쳐 열심히 환성을 함락시키고 왔더니, 건업에 '유비가 익주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와 있더라는 뜻이 된다. 즉 손권이 다른 데서 조조와 싸우는 사이 자기 잇속만 챙긴 유비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4월에 원정을 시작해서 윤4월에 환성을 함락시킨 것이라면, 『후한서』 「효헌제기」에 따르면 유비의 익주 점령은 214년 5월이니, 손권은 윤4월부터 5월까지 한달 남짓 유비가 익주에서 죽건 말건 그냥 멀뚱히 구경하다가, 막상 유비가 성공을 거두니 내 몫이었어야 한다고 성질을 부리기 시작하는 셈이다.

애초에 정말로 유비가 자신을 속이고 익주를 차지했다고 느꼈다면 유장과 전쟁을 시작한 212년 10월 무렵부터 214년 5월까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를 속였다'는 말이 한 번이라도 나왔어야 한다. 최소한 '나를 속였으니 익주에서의 일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며 악담이라도 퍼부었어야 한다. 손권은 2년이나 지나 일이 다 마무리 되니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꼴이다.

그러니 유비가 손권-주유-감녕의 익주정벌을 만류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진위가 의심되는 것이다. 손권의 익주 정벌 시도가 정말 있었다고 해도 그냥 손권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능성이 낮거나 전략적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생각되어 그만둔 게 일의 전말일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오주전」과 「선주전」(유비 일대기)에 나란히 기록된, 유비가 "량주를 얻으면 형주를 돌려드리겠다"고 답한 기록 역시 진위가 의심된다. 이 기록은 일단 「선주전」에 실린 것은 「오주전」에서 오나라 측 주장을 복사+붙여넣기 한 것일 가능성이 크고, 「오주전」에 원래 적혀 있던 것 또한 '유비의 량주 정벌'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창작된 것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217년 10월부터 219년 5월까지 진행된 유비와 조조의 한중전쟁에서, 유비는 장비, 마초, 오란, 뇌동을 파견해 무도군을 공략하려 하는데, 이 당시 무도군은 량주였다. (*조조가 사예 등을 폐지하고 9주 체제를 만들지만, 유비는 이러한 개편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조의 9주 개편에 따르면 량주는 존재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의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익양전쟁 당시의 일화에 끼워넣기'는 이때 당시 오나라 측 기록의 특징이다. 어떻게 이런 식의 왜곡이 이루어지는지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드러낼 것이다.

게다가 「오주전」에서는 제갈근을 보내 유비에게 형주를 내놓으라고 하고, 「노숙전」에서는 노숙이 관우와 협상을 한다. 『삼국연의』는 이 부분을 유비가 마지못해 3군을 내놓으려고 하지만, 관우가 거절하는 식으로 그려내어 모순을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제갈근전」에는 정작 유비에게 파견되어 형주를 내놓으라 요구했다는 내용 자체가 없다. 「제갈근전」에서 제갈근의 외교관으로서의 첫 공적은 215년 우호사절이다. 215년이라면 최소한 7월 이후, 익양전쟁이 끝난 이후가 될 수밖에 없다. 즉, 손권은 애초에 214년에 유비에게 제갈근을 보내 형주를 내놓으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제갈근-유비 간 협상이 결렬되면 그걸로 끝이지 노숙-관우 간 재차 협상을 한다는 상황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이후 손권이 관우에게 혼담을 꺼내는 등의 행적에서도 알 수 있듯, 손권은 유비와 관우를 분리하려는 공작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214년 5월에도 손권은 노숙을 파견해 관우하고만 협상하여 장사, 영릉, 계양을 빼앗으려 했을 것이다.

이 관우와 노숙의 협상 장면에 대해 '반촉 유사역사가'들은 흥미로운 짜깁기를 보여준다.

1. 노숙이 논리(?)와 명분(?)을 갖춘 주장으로 대여한 형주를 돌려달라 주장한다.

2. 관우는 '덕 있는 자가 영토를 갖는다'라는 궁색한 답을 한다.

3. 노숙이 다시 논리정연(?)하게 따지자, 명분이 없는(?) 관우는 답을 하지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조잡한 짜깁기는 거짓말이다.

「노숙전」은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한다.

1. 노숙이 "너희는 군대도 없고 패배해서 싸울 힘도 없는 걸 손권이 불쌍히 여겨서 기댈 곳을 주었다.(*노숙의 대사는 여기까진 두 이야기가 같다) 그런데 형주를 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장사, 계양, 영릉 세 군만 달라는 건데..."

2. 관우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사람'이 "땅은 덕 있는 자의 것"이라 외친다.

3. 노숙이 분노하여 소리를 지르자 관우가 "저 사람이 뭘 알겠소"라며 험악해진 분위기를 무마하려 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감정 조절이 안 된 노숙을 오히려 관우가 달래며 협상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려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면 「노숙전」에 인용된 『오서』의 두 번째 이야기를 보자.

1. 관우가 "오림에서(즉, 적벽대전에서) 유비는 잘 때도 갑주를 벗지 않고 싸웠는데 왜 땅을 빼앗으려 드는가?"라고 항의한다.

2. 노숙이 "너희는 군대도 없고 패배해서 싸울 능력도 없는 걸 손권이 불쌍히 여겨서 기댈 곳을 주었다. 그런데 이제 익주가 있는데 분수를 모르고 형주를 계속 유지하려 든다. 너희의 나약한 군대로 감히 우리를 이길 수 있겠는가?"라는 폭언을 던진다.

3. 관우가 할 말을 잃는다.

종종 그런 사람들이 있다. 도저히 양식 있는 인간이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폭언을 던지거나, 어처구니가 없는 억지를 부려대는 바람에 상대가 말을 잃은 걸, '내가 상대를 논파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걸 속된 말로 찐따라고 한다.

여하튼 두 번째 이야기에서도 관우는 최대한 유비 측의 정당한 몫이 있음을, 예의를 갖춰서 말한다. 그런데 노숙은 대뜸 '분수를 모른다'느니 '너희의 나약한 군대로 감히'라느니 폭언을 던진다.

관우가 말을 잃은 건 관우 측 주장에 정당성이 없어서도 아니고, 노숙이 엄청난 논리를 펼쳤거나 명분에서 우위에 서서도 아니다. 그저 노숙이라는 인간의 밑바닥을 보았을 뿐이다.

이렇듯 오나라 측의 억지와 폭언으로 협상은 결렬되고, 유비와 손권은 전쟁에 돌입한다.

3장. 관우, 노숙을 패주시키다

「오주전」의 기록대로 익양전쟁 후 유비가 조조의 한중 점령 때문에 퇴각했다면, 그것은 조조가 한중에 입성한 215년 7월(『후한서』 「효헌제기」) 이후일 것이다.

『후한서』의 본기들은 황제의 바로 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적기 때문인지, 참으로 감사하게도 '날짜별' 간지가 적혀 있어 군대가 어느 정도의 속도로 행군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예를 들어 낙양성-소평진은 하루 밤낮이면 오갈 수 있고, 낙양에서 헌제를 모시고 탈출하여 허도에 들어가는 건 열흘이면 충분하다.

『삼국지』의 「무제기」(조조의 일대기) 또한 조조가 한중에서 철수해서 업으로 돌아가는 데 2~3개월이면 충분하다는 기록을 전한다.

214년 5월 이후, 유비가 관우의 경고를 받아 즉각 행동에 나섰다면, 아무리 늦어도 214년 7월~8월에는 형주 공안에 도착했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215년 7월에 조조의 한중 점령 소식을 듣자마자 익양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거의 1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이다.

'반촉 유사역사가'들은 이 1년 간 '손권이 순식간에 장사, 계양, 영릉을 점령했고, 유비와 관우는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익양에서 노려만 보다가, 손권의 너그러운 양보로 영릉을 돌려받았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위 지도를 참고하면서, 「오주전」과 「여몽전」이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지, 그 왜곡이 어떤 방식으로 각 열전의 모순을 통해 발각되는지 살펴보자.

지도의 화살표는 각각 다음과 같은 의미다.

회색 화살표 = 유비

분홍색 화살표 = 관우

남색 화살표 = 여몽

노란색 화살표 = 노숙

「오주전」에 따르면 손권은 장강을 타고 건업에서 강하까지 거슬러 올라가, 군을 크게 세 갈래로 나누었다.

-손권 본인이 이끄는 사령부 : 육구에 주둔

-노숙이 이끄는 부대 : 육구에서 장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 파구에 주둔하며 '관우의 공격을 방어'.

-여몽이 이끄는 부대 : 장사, 계양, 영릉에 대한 '실질적인 점령군'.

214년 7월에 장강을 따라 내려와 공안에 도착한 유비는, 강릉에 있는 관우에게 노숙을 공격할 것을 명한다.

노숙은 파구에서 익양으로 이동하는데, 이는 얼핏 보면 촉한령으로 더 깊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쪽에서 장사군을 공략 중인 여몽의 진로와 함께 보면 전혀 공세가 아니다.

애초에 손권이 노숙에게 내린 명령이 '관우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임을 생각해보자.

즉 손권은 여몽이 장사, 계양, 영릉 3군을 공략하는 동안, 관우에게 측면을 공격당하지 않게 하려고 노숙을 배치하여 관우를 막게 한 것이다.

그러나 노숙은 파구에서 관우를 저지하는데 실패하고 패주, 익양까지 남쪽으로 도망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노숙은 분명히 관우에게 져서 익양까지 내려와 성을 쌓고, 관우가 여몽을 박살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관우의 남하를 저지한다.

어떤 이는 이것을 관우가 파구에서 안 되니까 익양으로 우회를 시도하고, 그걸 또 노숙이 익양으로 가서 관우를 막았다는 식으로 해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노숙의 패주다.

「오주전」에서 노숙, 손교, 반장이 이끄는 1만의 군대는 익양에서 관우의 3만 군대를 맞이하여 대항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후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유비가 화친을 청했다'라고 적고 있지만, 당장 바로 앞의 '관우에게 대항'했다는 기록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1년 간의 전쟁에서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라는 서술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오주전」의 전투가 없었다는 주장은 「여몽전」에서 바로 부정된다.

「여몽전」에 따르면 손권은 노숙, 손교, 반장이 익양에 들어가자마자 여몽에게 '급보'를 전한다.

"영릉군은 버리고 급히 익양으로 가 노숙의 1만을 도우라"

노숙이 파구에서 관우에게 패주한 끝에 익양에 도착하여 처절한 '대항'을 시작한 게 아니라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이야기다.

 

 

 

 

 

4장. 여몽은 영릉과 계양에는 접근도 못 했다

「오주전」은 여몽이 장사, 영릉, 계양에 서신을 보내자, 세 군이 허무하게 항복한 것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일단 여몽의 첫 목표인 장사군부터 항복으로 얻은 게 아니다.

앞서 말했듯 익양전쟁의 기간은 214년 7월부터 215년 7월로 추정된다.

이 기간 동안 여몽은 장사군의 치소 임상현을 거쳐, 상수를 따라 남하하여 간신히 장사군 남쪽의 영현에 도착한다. 이것으로 여몽의 진격은 끝나고, 손권의 급보에 따라 퇴각하여 익양방어전의 아군(노숙 등)을 도우러 간다.

그렇다면 최소 수개월 동안 여몽은 장사군도 못 벗어나고 대체 뭘 한 것일까.

결론은 하나다. 여몽은 서찰 하나로 쉽게 장사군을 얻은 게 아니다.

당시 장사 태수였던 요립의 일대기, 「요립전」은 요립이 '탈출하여' 유비에게 합류하였다고 전한다.

기존에는 「여몽전」과 「요립전」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조합해, 요립이 싸우지도 않고 장사군을 버리고 탈출한 것으로 해석하곤 했다.

그러나 익양전쟁의 전체 기간, 여몽의 진격이 장사군을 벗어나지 못한 사실 등에 비춰 볼 때, 「요립전」의 '탈출'은 여몽에 맞서 격렬한 저항 끝에 탈출한 것이라는 이야기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요립의 그런 항전을 알았기에 공안의 유비는 요립을 나무라지 않고, 이후 요립과 함께 촉으로 돌아가며 새로 태수 자리까지 준 것이다.

「여대전」의 기록은 더 흥미로운데, 이 익양전쟁에 여대 또한 참여하여 장사군에서 전투를 치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장사군 안성, 영신, 유, 다릉현의(모두 장사군 동남쪽 현들이다) 관리들이 음산현으로 집결하여 여대에게 대항하다 끝내 항복하고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손권은 요립이 저항하다 떠나고 여몽도 장사군 남부 영현 방향으로 진격 중이라 비어 있는 장사군의 수비를 여대에게 맡긴다.

그러나 여기서 장사군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관우와 결탁한 안성현의 현장 오탕, 중랑장 원룡은 각각 유현과 예릉현(역시 장사군 동남쪽의 현들이다)을 점령하고 대항한다. 손권은 파구에 주둔해야 할 노숙을 불러다가 유현의 오탕을 공격하는데, 오탕은 노숙의 포위를 뚫고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예릉현의 원룡은 여대에게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다.

장사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손권이 전선의 노숙을 뒤로 빼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한편 장사군의 저항을 분쇄한 공로로 손권은 여대를 여릉군 태수에 임명하는데, 여릉군은 '장사군 동쪽, 예장군 남쪽'에 있다. 즉 장사를 방어하는 것보다 장사군이 다시 관우에게 넘어가 양주 서부가 위협당하는 상황을 방지하려 한 듯하다.

한편 「여몽전」은 장사와 계양은 쉽게 얻었는데, 영릉 태수 학보는 항복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이에 여몽은 계략을 하나 짜내는데, 바로 학보에게 아래와 같은 헛소문을 전하는 것이다.

"유비는 한중에서 하후연에게 포위되었고, 관우는 번성(樊)을 공격하여 영(酃)을 구하려다 손규에게 격파당했소."

바로 이 새빨간 거짓말이, 「여몽전」에서 학보가 투항했다는 내용 그 자체를 의심케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전쟁은 215년 7월에 끝났다.

애초에 유비가 한중 전쟁을 시작할 때도 아니거니와, 하후연은 한중이 아니라 농서에 있을 가능성이 더 컸다(*하후연은 214년 10월에 부한현에서 송건과 싸워 이겼다. 조조가 한중에 입성한 것은 215년 7월로, 익양전쟁 시기에는 아직 한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장로의 항복은 215년 11월이다. 「여몽전」의 내용은 시기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

유비와 조조의 한중 전쟁 시작점을 '장비와 장합의 탕거 전투'로 잡아도 216년 이후다.

유비의 무도군 공격으로 잡으면 217년 10월이며, 여몽이 퍼트리는 헛소문대로 유비와 하후연이 한중에서 싸우는 시점은 219년 1월이다. 3~5년 뒤에나 일어날 일을, 마치 여몽은 예언이라도 하듯 말하고 있지 않나?

게다가 관우가 번성을 공격하여 영현을 구하려 했다는 건 아예 물리법칙까지 무시한 이야기다. 관우의 번성 공격이 219년 7월~10월인 점은 미뤄두더라도(*후음의 봉기 시점까지 앞당겨 보아도 218년 10월이다), 번성은 양양 북쪽에 있고, 영현은 장사군 남부다. 도대체 번성을 공격하는 게 영현을 구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혹자는 저 번(樊)자가 번구(樊口)라고 주장하는데, 이러면 더 말이 안되는 게 번구는 손권이 주둔 중인 육구보다 훨씬 동쪽, 기춘군 근처까지 내려간 곳에 있다. 남군에 있을 관우가 영현을 구하겠답시고 영현 동쪽으로 계속 내려가버린 것이니 더 이상해진다.

설령 학보가 바보 천치라고 해도, 아무리 당시 정보 전달 속도가 느려도 학보가 이 정도로 정세를 못 읽을 수는 없다.

「여몽전」의 이상한 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학보가 속아서 항복하기는 했는데, 유비와 손권이 화친하면서 다시 유비에게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호종전」에서는 학보가 어느새 다시 손권의 신하가 되어 있어,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렸다가 자결로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를 전한다.

이상 나열한 것들을 종합해 보면 단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익양전쟁 당시 영릉태수 학보는 항복하지도 않았고, 여몽은 영릉을 점령하지도 못했다.

앞서 말했듯, 오나라 측 기록은 '이후의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익양전쟁 당시의 일화에 끼워넣'는다.

「여몽전」의 이야기는 그 계략의 내용에 비춰 볼 때 219년, 손권이 관우를 죽이고 형주의 나머지 군현을 강탈할 때의 일화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영릉태수 학보가 219년에 다시 항복한다는 모순이 생긴다. '학보를 유비에게 돌려주었다'는 기록은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창작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몽전」과 「오주전」이 전하는, 순식간에 장사, 영릉, 계양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이야기 전체가 4~5년 뒤인 219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해 낸 것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즉, 익양전쟁 종료 시점에서 계양군마저도 함락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여몽전」 주석에는 여몽성, 혹은 여성이라는 성이 영릉에 있다고 전하는데, 여몽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 성을 쌓았다는 것은 장기전을 상정했다는 것인데, 여몽이 정말로 단숨에 영릉의 항복을 받아냈다면 기존의 영릉군 천릉현성을 대신할 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즉, 여기서도 여몽의 행적에는 모순이 생긴다)

관우의 익양 진격, 노숙과 반장과 손교의 '대항', 여몽에게 영릉 공략을 포기하고 그들을 도우라는 손권의 긴급한 명령.(*손교의 행적은 여몽이 익양으로 가니까 남아서 뒤처리를 한 것인지, 아니면 여몽과 함께 익양으로 가기는 한 것인지 오락가락한다. 요컨대 여몽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봤을 때 익양전쟁은 219년 승리의 기억으로 덮어버리고픈, 손권과 여몽의 뼈아픈 개망신이었을 것이다.

여몽과 노숙의 패배지, 손권의 패배는 아니지 않냐고?

그럼 손권은 노숙과 여몽이 분투하는 동안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

 

 

 

 

 

5장. 육구에서 손권을 공격하는 유비

손권, 여몽, 노숙으로 나뉜 오군.

유비와 관우로 나뉜 촉군.

익양의 여몽과 노숙을 관우가 상대한다면, 손권은 대체 뭘 하면서 관우의 후방이나 측면을 치지 않았을까?

대체 손권은 뭘 했기에 「오주전」에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웃기는 소리를 남기게 되었을까?

유비를 띄워주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 상태에서 손권의 서진을 저지할 부대는 딱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공안에 있는 유비의 본대다.

여몽과 노숙이 관우에 의해 상수까지 쫓겨나서 장강의 물길이 깔끔하게 비워졌으니, 공안에서 육구까지 장강을 타고 내려갈 유비를 방해할 군대는 없었다.

유비는 손권의 본영이 있는 육구까지 진격했다.

손권이 육구를 벗어나 유비 쪽으로 진격해왔을 가능성은 없다. 「오주전」은 익양전쟁 이후 손권이 분명히 '육구에서 돌아갔다'라고 적고 있다. 육구 본영을 벗어나지도 못한 것이다.

'강을 타고 내려가는' 기세의 유비다. 이때의 장수진도 이릉대전과는 비교도 할 것이 못 되었다. 법정, 황충이 멀쩡하게 살아있고, 장비나 마초는 익주를 지키고 있다 해도 조운이나 진도는 유비를 따라왔을 것이다.

손권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그러나 그런 손권에게 뻗어오는 도움의 손길이 있었으니.

조조의 한중 점령이었다.(215년 7월)

유비로서는 통탄할 일이었을 것이다. 「오주전」은 유비가 마치 화친을 청했다는 듯이 적고 있으나, 이러한 기록은 오의 천자가 된 손권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것일 뿐이다.

손권 쪽에서 조조의 한중 점령 사실을 들먹이며 유비에게 협상을 제안하거나, 최소한 손권과 유비가 동시에 화친의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실상대로 여몽의 영릉-계양 점령 좌절, 노숙의 손권 본대와의 단절, 손권 본대가 받는 유비의 공격 등을 고려해 볼 때, 유비는 익양전쟁의 전후 협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내놓기로 결정했으리라.

'애초에 손권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강하'의 나머지 현.

'여몽이 점령하는 데 성공한 장사'의 '상수 동쪽'.

'장사를 점령당하는 바람에 상수 물길을 통한 접근이 불가능해진 계양'.

즉 반촉 유사역사가들이 '손권이 점령한 영릉군을 관대하게 돌려주었다'는 것과 달리, 전쟁은 유비의 급한 사정과 손권의 구겨진 체면으로 인해 이러한 형주 분할안을 내놓고 끝나게 된다.

협상은 빨리 이루어졌어도 군사적 긴장은 최소한 215년 말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유비가 촉으로 돌아가면서 황권을 보내 장로를 맞이하려 했으나(*장로의 새력은 대파산맥을 넘어 파군 일대에도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장로는 양평관이 함락되자 산맥을 넘어 파군으로 도망친 것이다), 장로가 이미 조조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선주전」)

조조의 한중 입성이 215년 7월, 장로의 투항이 같은 해 11월인 것을 보면, 유비의 익주 귀환은 그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비가 익주로 돌아오자 조조는 12월에 한중에서 업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른다.

한편 손권은 장사, 영릉, 계양을 얻으리라던 전략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특히 영릉군은, 이후 '상관과 영거'와 관련해 또 반촉 유사역사학을 다루면서 언급하겠지만, 손권에겐 무척 탐나는 땅이었다. 손권이 왜 남군이 아니라 이 세 군을 얻으려고 했는지는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손권은 「오주전」에 남은대로 '세 군을 다 점령하긴 했는데, 내가 관대하게 영릉군은 돌려줬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며, 건업에 돌아가지... 못한다.

구겨진 체면을 어떻게든 만회해볼까, 조조가 한중으로 간 틈을 노려, 215년 8월, 손권은 합비를 공격한다.

장료와 이전에게 격파당해 개망신을 하나 더 추가했을 따름이다(「무제기」).

6. 에필로그-익양전쟁 타임라인

반촉 유사역사가들의 '익양대치로 유비가 남군, 영릉군, 계양군의 대여를 연장받은 것'이라는 주장과 달리, 이상의 전쟁으로 대여 운운하는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손오는 어찌되었든 형주의 공식적인 '분할', 손권과 유비의 '대등한 동맹'을 승인했다.(「오주전」, 「선주전」, 「제갈근전」)

214년 7월 ~ 215년 7월의 익양전쟁은 유비의 신속한 대처와 지휘, 요립의 분전으로 장사 방어선에서의 여몽 저지, 관우의 맹격으로 인한 노숙의 고립과 단절 등, 전성기 촉한군의 역량이 빛나는 또 하나의 대승이었다. 전쟁의 양상만 본다면 한중전쟁의 승리를 예고하는 프리퀄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손권은 본진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으며, 노숙은 패주를 거듭한 끝에 익양에서 관우에게 처절히 저항해야 했고, 여몽은 장사군 밖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 손권의 급보를 받고 노숙을 도우러 가야 했다. 이러한 패배로 체면을 제대로 구긴 손권은 '사실 3군을 다 얻었는데 유비한테 양보한 것'이라는 정신승리성 선전을 해야만 했으며, 선전과 사실 사이의 괴리를 없애고자 오나라 측 기록자들은 219년의 이야기들을 차용하여 3군 점령 신화를 창작해냈다. 어찌보면 불쌍할 지경이다.

그러나 촉한에서는 이러한 승리가 비극으로, 손오에는 뼈아픈 패배가 귀한 전훈으로 반전된다. 유비는 익양전쟁에서의 승리처럼 이릉대전에서도 승리를 거두리라 자신하며 형주로 진격했고, 반대로 육손은 익양전쟁과 같은 오판을 저지르지 않고자 고심을 거듭했다.

오나라 측 기록의 모순과 왜곡을 걷어낸 익양전쟁 타임라인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물론 반촉 유사역사학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는대로 계속 다룰 생각이다.

214년 4월, 손권, 환성 원정 시작

214년 윤4월, 손권, 환성 공략

214년 5월, 유비, 유장의 항복을 받고 익주 점령

-손권, 유비를 질투

-손권, 제갈근을 유비에게 보냈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보낸 적 없음

-손권, 노숙을 관우에게 보내 장사, 계양, 영릉을 빼앗으려 협상.

-노숙의 폭언으로 협상 결렬

-유비와 손권 전쟁 시작

-손권, 육구에 본진을 차림

-손권, 여몽에게 장사, 계양, 영릉 점령 명령

-손권, 노숙을 파구로 보내 여몽의 측면을 지키게 함

214년 7월 이후 시점, 관우의 급보를 받은 유비, 공안에 도착.

-유비, 관우에게 3만 군대를 이끌고 파구로 가 노숙을 치게 함.

-노숙, 관우에게 패배, 익양으로 도주

-여몽, 장사태수 요립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침.

-요립, 장사를 탈출해 공안의 유비 본영으로 감.(「여몽전」은 219년의 일을 차용하여, 214년~215년에 장사-계양을 쉽게 얻은 이야기를 창작해 냄)

-여몽, 겨우 장사군 영현까지 진격. 영릉과 계양에는 도달하지 못함(「여몽전」은 219년의 한중전쟁, 번성전투를 차용하여 이를 214년~215년의 일에 끼워넣음)

-손권, 노숙과 반장, 손교가 1만의 군대로 익양에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함

-손권, 여몽에게 급보를 보내 영릉, 계양 공략을 포기하고 북상하여 익양의 노숙을 돕게 함.

-유비, 공안에서 장강을 타고 육구로 진격

-유비, 육구 본진의 손권을 저지

215년 7월, 조조, 한중 입성

-유비, 이기고 있던 전쟁을 어쩔 수 없이 손권에게 양보함

-손권, 유비가 보유하던 남은 강하군의 현, 장사군 남부 중에서도 상수 동쪽, 계양군을 받고 형주를 분할.

-손권, 유비와 다시 동맹을 맺기로 함

215년 8월, 손권, 여전히 유비가 형주에 주둔하며 감시 중인 상황에서 동맹의 성의를 보이고 체면을 회복하고자 합비를 침. 장료와 이전에게 격파당함.

215년 11월, 장로, 파군에 피난 와 있다가 결국 조조에게 항복

-유비, 익주로 돌아가며 황권을 보내 장로를 맞이하려 하나 이미 조조에게 귀순함.

215년 12월, 조조, 장로의 항복은 받았으나 유비가 이미 익주에 돌아온 관계로 익주 정복 포기. 하후연, 조홍, 장합을 남겨두고 업으로 출발.

216년 2월, 조조, 업에 도착.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

삼국지의 촉한 황제 유선에 빙의했다. * 일부 회차에는 작가님이 직접 작성하신 지도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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