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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선 납치 미수 사건 - 유비와 손권의 '왕좌의 게임'

by 루모로마노 2024.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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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손권에게 무엇을, 어떻게 속였는가 - 유비의 새 모델 '교활한 북로'

프롤로그.​214년 5월, 유비가 유장의 항복을 받아내고 익주를 점령하자, 손권은 분개하여 외칩니다.​"활로(猾虜)가 감히 나를 속이다니!"(「노숙전」)​유비의 출신이나 군사집단의 성격을 생

lumoromano.tistory.com

앞서 「여대전」과 「오범전」을 통해 알아 본 손권의 분노 포인트 두 가지를 종합해보면

손권이 여동생 손부인에게 돌아오라고 한 시기, 손부인이 유선의 납치를 시도한 시기를 좀 더 정확하게 추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의』는 정말 뜬금없이 손권이 어머니의 병을 핑계로 (좀 기묘한 취미가 있을 뿐 착한) 손부인을 속여 데려오지만, 손권이 결혼 동맹의 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어찌 보면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행위를 아무런 이유 없이 하진 않았으리라 봅니다.

「목황후전」은 유비가 익주에 들어간 뒤라고만 적고 있어서 손부인 사건이 211년 이후의 일인 것만 추측하게 합니다.

하지만 「여대전」과 「오범전」을 종합해 212년 이후로 손권이 유비의 속임수(손권을 배제한 익주 독차지)를 서서히 알아채기 시작했다고 가정해 보면,(손권은 오범이 "유비가 2년 안에 홀랑 다 먹어버린다고요!"라고 한 말을 그다지 믿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손부인이 유선을 납치하여 강동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한 것은 211년은 아니고, 212년 이후가 됩니다.

「조운전」은 「목황후전」과 달리 좀 더 구체적으로, 유비가 익주 정복전을 시작한 이후라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비-유장 전쟁이 시작된 212년 10월 이후의 일이 됩니다.

근거를 좀 더 보강하자면 「선주전」은 유비가 익주에서 철수하려 하면서 손권이 조조에게 공격받을 위기에 처한 사실(유수구)과, 관우가 청니에서 악진과 대치 중인 사실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악진전」은 이때 악진이 관우를 청니에서 패퇴시킨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후 악진이 반격을 가해 유비군을 물리친 이야기도요.

즉 이때까지만 해도 관우를 비롯한 형주 유비군은 손권을 향한 조조의 공격을 분산시킨다는, 동맹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손부인이 그 이전이나 이 무렵에 강동으로 돌아갔다면 양측의 관계가 싸늘하게 얼어붙었을 테고, 유비도 형주로 돌아가 손권을 도우려 하거나, 애초에 관우가 움직이지도 않았을 테니(관우의 공격을 물리친 악진은 합비로 가서 유수구 전투에 참여하고, 이후 계속 합비에 주둔한 것으로 보입니다)

212년 10월까지는 아직 손권과 유비가 파탄날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엔 「오주전」을 보겠습니다. 조조와의 유수구 전투가 213년 1월에 시작되어, 한달 간의 대치 끝에 조조가 정연한 오군의 모습을 보고 물러납니다. 「무제기」는 손권군의 서쪽 둔영이 격파되고 손권의 도독 공손양이 포획된 것으로 전합니다. 물론 「오주전」에도 격렬한 전투를 암시하는 주석이 달려있긴 합니다. 「무제기」에서 4월에 조조가 업으로 돌아왔다고 되어 있고, 219년 한중-업 간 조조의 회군 속도를 생각해보면 2월쯤에는 전쟁이 마무리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간 손권이 손부인 문제를 신경쓰거나 양측 관계를 파탄 내는 위험을 무릅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조운전」은 손권이 손부인을 맞이하려고 꽤 많은 선박을 보낸 정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수구 전투 당시 손권이 전력을 형주 쪽으로 분산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손부인의 유선 납치 시도는 213년 2월 이후로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 「조운전」을 살피면, 손부인의 유선 납치 시도를 장비와 조운이 함께 막았다고 하니, 최소한 조운이 형주에 있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조운은 제갈량, 장비와 함께 익주 동쪽 공략에 참여하죠. 즉 손부인의 유선 납치 시도는 조운과 장비가 '형주를 떠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선주전」과 「효헌제기」를 통해 역산해야 합니다.

「효헌제기」는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이 214년 5월의 일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선주전」은 성도를 포위한 지 수십일 만에 성도의 유장이 항복했다고 하니, 최소한 4월 무렵부터 성도 포위전이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시 「선주전」을 보면 낙성 함락은 214년 여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름은 음력으로 4~6월을 뜻하니, 유비는 4월에 낙성을 함락시키고 곧바로 성도로 달려가 한달 간 포위 끝에 성도를 함락시킨 것이 됩니다.

낙성 포위전에는 거의 1년이 걸렸다고 하니, 유비는 213년 4~6월 쯤에 낙성 포위전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선주전」은 바로 이 앞에 제갈량, 장비, 조운이 백제(파동군), 강주(파군), 강양(건위군) 등을 함락시키며 진격해 왔다고 적고 있습니다. 제갈량, 조운, 장비가 213년 4~6월에 이러한 작전을 시작했다면 그보다 조금 전에 형주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부인의 유선 납치 시도는 213년 2월~3월 사이가 아닐까 합니다. 209년 12월에 손부인이 형주로 시집온 것을 생각하면 형주에서 3년 정도 산 셈이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동기를 그냥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앞서 유비가 손권을 분노케 한 지점이 212년에 있다고 했었고(오범이 유비의 익주 장악을 손권에게 경고하기도 했었고), 「선주전」에서는 제갈량, 장비, 조운의 진격 이전, 그러니까 212년 10월에서 213년 초 사이 유비가 백수, 부, 면죽에서 연달아 승리를 거둔 것을 적고 있으니, 213년 2월에 막 조조를 격퇴한 손권은 "어? 저러다 진짜?"라고 생각했을 듯합니다.

유비가 애초 211년 함께 익주를 공략하자던 약속을 어겼다(고 하기엔 여대 철군 결정은 손권 본인이 내린 것이어서 조금 민망한 감이 있지만)고 판단한 손권은 이 무렵부터 '유비가 정말로 익주 정복에 성공했을 경우'를 대비하기로 하지 않았을까요. 「선주전」은 215년에 제갈근이 와서 형주 반환을 요구했다고 적고 있는데, 어쩌면 손권은 유선을 확보하여 이러한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혹은 익주 공략 이후에도 유비를 통제하기 위해서 거나, 50대인 유비의 사망 시 형주를 '법적 조카' 유선을 통해 괴뢰화하기 위해) 손부인을 통한 납치를 시도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필이면 왜 손부인이 납치 시도의 적임자인가에 대해서는, 물론 유비군의 내부에 있는 자이면서, 동시에 엄연히 법적 지위는 유선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납치 실패 후 손부인 본인이 형주에 남지 않기로 결정했든, 불문에 부치는 대신 결혼을 여기서 끝내기로 했든, 손유 동맹 자체는 213년 초에 이렇게 파탄이 납니다.

이후 손권은 214년 윤4월~5월 사이에 환성(여강군)을 점령하고, 역시 5월에 유비는 유장의 항복을 받아내고 익주를 정복합니다. 유-손 이혼으로부터 여기까지가 1년 정도인데, 「노숙전」에 따르면 이 사이의 기간이 마냥 평화로웠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노숙이 여러모로 갈등을 무마하려 했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다만 214년 5월부터, 제갈근이 성도로 유비를 찾아온 215년의 어느 시점까지 대체 양측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현재 제가 구할 수 있는 자료로는 미스테리입니다. 산발적 교전이 계속되었을 수도 있고, 「선주전」의 215년은 마지막 종합 기사고 그 사이에 제갈근이 여러 차례 오가거나 성도에 계속 머무르며 유비의 설득을 시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의 추리를 통해 보강되는 건, 역시 손권은 210년의 '머리 풀고 입산' 쇼는 딱히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으리라는, 앞선 글에서 했던 추측입니다.

요컨대

이런 건 속임수로 보긴 좀 어렵고,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여대를 속일 정도는 되어야("익주에서 손 뗀 건 손권 당신" 핑계도 댈 수 있고, 여차하면 "내가 익주를 혼자 먹은 건 계획된 게 아니라 우발적인 사고입니다"라고 핑계를 댈 수도 있고) 손권이 활로(猾虜)라고 부를만한 속임수겠지요.

한편으로 유비 쪽에서 보자면, '유비의 후계자 납치를 시도해놓고, 일방적인 이혼을 통보하고는 뻔뻔하다'라고 밖에 할 수 없기도 합니다.

이상 살펴본 바로는 유비도 그렇지만 손권도 역시 재미있는 인물입니다. 열아홉 소년이(겨우 고3입니다!) 덜컥 6군(회계, 오, 단양, 예장, 여릉, 여강)을 물려받아(여강군은 손권을 안 따르겠다며 배신), 내부적으로는 여러 이민족의 반란을 제압하고, 자신을 안 따르겠다며 손씨 가문원을 살해하기까지 한 반란도 제압하고, 심지어는 같은 가문 사람이 자신의 가주 지위를 인정 못하겠다며 모반하려는 것도 제압하고... 이렇게 갖은 고생 끝에(8년 걸립니다) 간신히 강동의 주인이 되어 마침내 아버지의 원수, 황조를 격파하고 강하 땅을 차지하는 이야기는 소년 영웅의 성장담 그 자체입니다.

그러고도 아직 20대에 불과한 그는 50살에 가까운, 그 시점에서 경험으로든 명성으로든 자신을 한참 앞서는 정치가이자 군벌, 유비를 상대로 동맹을 시도하고 그의 여러 음모에 맞서 정치외교적 줄다리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거대한 멸망의 위기에서 (오림의 불빛으로) 빛나는 승리를 거둡니다.

(*조조의 부하 곽가, 그와 연결된 진등이 허공의 식객을 지원하여 손책에게 치명상을 입혔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여러 조각이 흩어져 있을 뿐이지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손권은 형의 원수의 꿈을 눈앞에서 좌절시켜버리면서 소년-청년 영웅의 서사를 완성합니다)

손권이 『연의』의 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손책이나 태사자의 죽음이 관우나 장비의 죽음에 비견되고, 주유의 죽음은 제갈량의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요. 홀로 모든 외적에 맞서야 하는 손권의 입장을 상상해보면, 우리는 그가 관우나 유비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결과'를 알기에 그가 겪었을 부담 역시 간과하곤 합니다만,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손권은 관우와 유비에게 모든 걸 잃고 패배하여 건업이 불타고 성도로 압송되는 상상도 해봤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두려움을 떨치고 승리해서 마침내 자신의 왕조를 열었습니다.

말년에 큰아들과 둘째아들을 병으로 잃고, 셋째아들과 넷째아들의 경쟁에 강남 명가들의 권력을 향한 열망과 두 딸의 야심이 얽히며, 늙고 병들어 흐릿해져만 가는 판단력으로 자꾸만 오판을 저지르며 비극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러한 비극적 결말 또한 『연의』적 매력이며, 또 어떻게 보면 『리어 왕』을 연상시킵니다. 주인공으로서 손권은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혹자는 남조의 여러 명장에 비해 초라한 전적, 오의 상대적으로 작은 영토를 들며 손권의 매력에 의문을 표합니다. 하지만 남조 명장들의 성과와 남조의 판도는, 물론 그들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손권이 한참 동안 가질 수 없었던 물질적 혜택이 그들을 뒷받침했다는 것도 잊어선 안 됩니다.

여기서 예를 하나 들자면

남해군의 치소 번우현은 육조 시대에 무역항으로 번성합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물자는 일단 서쪽으로 울수 하구에 들어가서, 창오군에서 북쪽으로 리수로 올라간 뒤, 진시황이 연 운하, 영거(靈渠)를 지나, 상수 상류로 연결됩니다. 이후 물자의 유통망은 상수를 통해 형주 여러 지역, 장강을 통해 건업이나 익주로 확장됩니다.

이러한 물류망은 남아시아 거의 전체를 아우르는 무역망과 연결되어 있고, 이 무역망의 발달은 육조 시대부터 시작됩니다.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陳)조차도 활용할 수 있었던 이 혜택을, 손권은 유비를 이릉에서 물리치고 나서야 겨우 안정적으로 누릴 수 있었고, 그러고 나서도 그는 사씨 일가와 남월인들의 반발을 누르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다고는 하나 손권이 '첫 삽'을 뜬 사람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삼국지』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 중화적 영웅서사에서 『왕좌의 게임』적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저 개인으로서도 이틀에 걸쳐 살펴 본 유비, 손권의 형-익주를 향한 '왕좌의 게임'은 상상력과 흥미를 자극한 소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아마도 전에 말했던 무릉-강하 및 유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게 될 듯합니다.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 작품소개: 삼국지의 촉한 황제 유선에 빙의했다.* 일부 회차에는 작가님이 직접 작성하신 지도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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