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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비는 손권에게 무엇을, 어떻게 속였는가 - 유비의 새 모델 '교활한 북로'

by 루모로마노 2024.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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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14년 5월, 유비가 유장의 항복을 받아내고 익주를 점령하자, 손권은 분개하여 외칩니다.

"활로(猾虜)가 감히 나를 속이다니!"(「노숙전」)

유비의 출신이나 군사집단의 성격을 생각해보면(또 유주 사투리의 억양이 강하다고 상상해본다면) 저는 활로(猾虜)가 '교활한 포로'라기보다는 '교활한 북로(北虜) 새끼!"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유비의 이미지는 인의의 군주라기보다는 여기에 더 가깝지 않을까

어쨌든 많은 분들이 손권의 이 말을, 이전에(주유가 살아있던 시점이니 210년 이전에) 유비에게 익주 공략을 제안하자

"익주 침공을 고집하면 나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할 겁니다!"

라고 반협박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유비가 손권을 속이지 않았다는 게 아닙니다.

유비는 분명히 손권을 속였거나, 속였다고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점이 주유-감녕이 제안한 익주 원정을 거부한 지점은 아닐 것 같다는 겁니다.

손권이 '속았다'라고 생각한 지점은 전혀 다른 부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게 오늘 글의 요지입니다.

1장. 손권- 유비의 익주 공략 '첫 논의'.

아직 주유가 살아있던 시점, 어쩌면 209년 강릉 함락 직후일 수도 있고, 주유가 죽기 직전인 210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주유와 감녕이 손권에게 익주 공략을 제안합니다.(「노숙전」)

감녕이 여기에 들어간 건, 감녕 본인이 익주 출신이고 유장 일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주유전」에 전하는, 주유가 제시한 전략은 이렇습니다.

"조조는 적벽에서 져서 못 움직입니다. 그러니 저는 손유와 함께 익주를 취하겠습니다. 익주를 얻고 장로를 병합하고 손유에게 익주를 방어케 합니다. 그런 뒤 마초와 동맹을 맺고, 저는 다시 돌아와서 장군(손권)과 함께 양양을 치며 북진할 겁니다."

원대한 대전략에 손권은 주유와 감녕의 의견을 수렴하고, 첫 번째 원정계획안을 유비에게 제시합니다.

손권이 유비에게 한 제안 내용은, 주유의 대전략보다는, 왜 지금 정세가 유장을 쳐야 할 때인지, 친다면 손권 자신과 유비가 어떻게 진격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선주전」과 주석으로 달린 『헌제춘추』의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장로가 파군, 한중군에서 조조의 눈과 귀가 되어 익주를 노리고 있습니다.(*종요, 하후연 등이 장로 토벌의 명을 받은 것은 211년 3월의 일이니, 210년 이전인 이 시점의 정세는 달랐던 듯 보입니다). 유장은 굳세지 못해서 스스로 지키질 못할 테니, 장로를 이용한 조조가 촉을 얻으면 형주부터 위험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오(손권)와 초(유비)가 연합해서 먼저 유장을 치고, 장로를 합병합시다."

그런데 여기서 유비는 당장 거부하지 않습니다. 이 손권-주유-감녕의 전략을 이용해 자신이 촉을 얻을 기회는 아닐까 고민했던 모양입니다. 부하들은 이런 유비의 의향이 반영된 두 가지 대응을 제시합니다.

1. 손권의 제안을 수락한다. 어차피 오는 형주를 넘어서 익주를 가질 수 없으니, 익주는 우리가 가질 수 있다.

2. 손권의 제안을 거부한다. 손권의 선봉 노릇을 하면 앞에서는 익주의 군대를 못 이기고, 뒤에서는 오가 형주를 급습할 수 있다. 그러니 도와주는 척하며 새로 얻은 형주 여러 군 때문에 움직이기 어렵다고 하자. 그러면 오는 이 작전을 단념할 것이다.

유비는 두 가지 대응 중 2번을 선택합니다.

여기서 그 "머리를 풀고 입산하겠다" 타령이 바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노숙전」은 유비의 '종친' 타령만을 전하고 있지만, 「선주전」은 이 앞에 좀 더 긴 사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비가 '왜 이 전략이 안 되는지' 손권을 설득하려 합니다.

"유장이 굳세지 못한 건 맞는데 익주라는 땅이 부강하고 험해서 충분히 지킬 수는 있을 겁니다. 장로도 조조에게 거짓 충성을 하는 겁니다(*장로 분석은 사실이긴 하죠). 지금 촉과 한중으로 무리한 출병을 하면 보급선이 만리나 길어집니다. 이런 전쟁을 하면 오자나 손무라도 이기기 어렵습니다."

그다음에는 이것이 조조에게 '어부지리'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손권-유장 동맹 사이에 서로 공격하면 조조에게 기회를 주는 겁니다.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유비가 익주에 대해 품고 있는 야심, 혹은 손권을 속이려는 마음과는 별개로 말 자체는 일단 맞는 말이긴 합니다. 보급선 문제도 문제거니와, 훗날 유비와 손권의 전쟁이 조비에게 기회를 엿보게 했던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머리 풀고 입산 타령'은 반협박이라기보다는

 

"이러다가 다~ 죽어! 나 무서워~"

에 좀 더 가까워 보입니다.

여하튼 이런 논의가 오가는 사이에 주유가 파구에서 사망한 듯합니다. 이후 손권이 보내는 군대에서 주유가 함께 가겠다던 장수 손유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파구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주유는 유비와 손권 사이의 의견 차이를 조율하러 장강을 오르내리던 중 사망했거나, 혹은 손유의 군대를 맞이하러 갔다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유가 태수로 있던 남군은 강하태수 정보가 태수를 겸임하고 노숙이 강릉에 주둔하는 형태로 운영되다가, 노숙이 육구로 물러나고 한창태수가 되는 시점에 유비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손권이 죽은 주유의 전략을 밀어붙이려고 손유 단독으로 군을 밀어넣자, 유비는 본인이 잔릉현, 관우가 강릉현, 장비가 자귀현에 주둔하는 방식으로 손권에게 무력시위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종친 타령', '머리 풀고 입산 타령'과 더불어 이 '진로 방해'를 유비의 속임수였다고 생각하십니다만, 저는 이게 속임수였다고 해도 손권이 분노한 바로 그 속임수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손권이 분노한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2장. 손권-유비의 익주 공략 '두 번째 논의'

이듬해인 211년.

3월에 종요, 하후연이 장로를 정벌한다는 소문과 함께 크게 동요한 관중 군벌들은 결국 반란을 일으킵니다. 반란군 연합의 수장 마초가 동관에 주둔하고,

7월에는 마초와 조조가 동관에서 대치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것은 서쪽 모든 군벌의 위기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유비와 손권에게는 조조의 발이 묶인 사이 움직일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관중 지역 정세 변화에 두려움을 느낀 유장은 장송, 법정 등을 통해 유비를 일종의 '용병'으로 끌어들여 장로를 치고자 합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장송과 법정은 오히려 유비에게 익주를 넘길 모의를 하게 되죠.

손권이 장송과 법정의 모의를 전부 알지는 못했지만, 이후 유비가 이 논의의 내용을 일부(혹은 매우 왜곡된 형태로) 알려주었음은 분명합니다.

장송과 법정은 유비에게 넘겨줄 생각인데, 손권에게는 '장송과 법정이 장군을 맞이할 생각이던데요'라고 왜곡한다든가,

아니면 작전 내용 자체를 비틀어, '장로를 치는 척하며 익주 내부로 들어가 기회를 노립시다'라고 한다든가.

어떤 식이든 손권을 설득할 근거를 유비는 이미 작년(210년)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앞서 제가 말한, 210년에 유비가 손권을 설득한 내용을 다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익주 땅은 부강하고 험해서 유장 같은 놈도 지키기 쉽다. 보급선이 만 리에 걸쳐 이어지는 건 오자나 손무가 와도 안 된다."

이것이 211년에는

"내부에서 치면 방법이 있다!"

라는 방식으로 설득의 근거로 활용되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동맹끼리 싸우면 조조에게만 이득이 된다"라는 것도

"손권도 유장의 동맹이니 원군을 파견한다는 형식으로 익주 안으로 들어가는 건 자연스럽게 가능하다!"

라는 식으로 설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래서 손권은 용병으로 뛰러 간 유비와 함께 여대를 보냈습니다(「여대전」)

여기까지의 과정이 손권이 유비를 활로(猾虜)라 부르며 분노케 한 첫 번째 속임수입니다.

3장. 유비에게 익숙한 방식

유비가 손권을 속일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로는

유비 무력집단이 기존의 무력집단을 밀어내고, 토착 호족/명사들에게 자신의 무력집단으로서의 성능을 어필하여, 양측이 협력하여 주(州)의 정권을 장악하는 방식을 이전에도 이미 해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211년 시점까지 유비는 이걸 두 번 해봤습니다.

첫째는 194년 서주입니다.

193년과 194년, 그 사이 겨울에 잠깐 조조가 회군한 것을 제외하면 도겸이 이끄는 단양병은 계속 조조에게 패하기만 했습니다.

그 전에도 도겸은 공손찬의 요청에 따라 연주 동북부까지 올라갔다가 격파당했죠.

'무력집단 도겸-단양병'은 서주 호족에게 '과연 이들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가' 회의가 들게 했습니다. 그러던 서주 호족의 눈에 194년 오환 및 유주 기병을 이끌고 내려와, 담현에서 (비록 이기진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조조를 저지한 유비가 들어왔습니다.

유비는 일단 최전방이자 서주 바깥인 예주 패국 패현에 배치되었다가, 서주 호족 미축과 진등의 주도로 단양병을 대신하여 서주의 지배 무력집단이 됩니다. 단양병 무력집단의 수장 도겸은 자식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유비에게 지배권을 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주의 지배권을 넘겨받고, 원소의 인정(*여포-조조 화친 제안, 태산태수 응소 보호와 더불어 원소가 조조의 원수가 된 3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을 받은 유비는 평화적으로 서주를 장악한듯 보였으나, 유비의 주(州) 장악 첫 번째 모델은 결함품이었습니다.

먼저 기존 무력집단인 단양병 집단을 해체하거나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고, 이것은 단양병 조표의 반란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호족/명사와의 협력도 불완전했습니다. 미축을 비롯한 미씨 집안은 일단 219년 이전까지는 유비에게 충성을 다합니다만, 219년 미방의 배신으로 쌓인 문제를 드러냅니다. 미축에게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탔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주 기반을 떠난 미축은 '유비 무력집단'의 일원으로 흡수된 듯합니다만, 미방은 그러지 못했고, 그게 결국 미방의 배신으로 터져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유비를 추대한 진등, 그 아버지 '패국상' 진규는 유비가 서주에서 쫓겨나 다시 소패(패국 패현)로 돌아간 196년부터 여포 정벌이 있는 198년까지 유비와 협력적 관계는 유지합니다만, 결국 조조의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무력집단 유비는, 손권의 표현대로라면 그 '교활함'을 업그레이드 합니다.

둘째 경우, 형주입니다.

형주의 기존 무력집단 유표는 새 무력집단 유비를 받아들입니다. 유비는 박망까지 치고 올라가 하후돈을 격파하는 등의 군사적 성과로 자신의 성능을 어필합니다.

늙은 유표는 도겸과 비슷한, 아니 더 나쁜 실수를 저지릅니다.

유종을 양양의 후계자로 두는 한편으로, 유종이 몰락할 경우의 '보험'으로 강하(얼마 남지도 않은 강하의 경릉현)에 유기를 배치해 둡니다.

그리고 유비를 영형주자사를 삼아 두 아들의 후견인으로 내세웁니다.

유종이야 조조에게 넘어갔으니 유비가 알 바 아니고, 유비는 유기를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208년 조조를 패주시키는 동안 유기의 군권을 철저히 해체, 흡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형주 호족/명사 집단의 우두머리 제갈량을 '삼고초려'라는 의식을 통해 사적으로 깊은 의리 관계를 형성하여 자신의 무력집단에 반쯤 발을 걸치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장사군 임증현에 배치하여 형주의 행정을 일임합니다. 어쩌면 임증의 제갈군사는 이른바 '한중막부'의 프로토타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방식으로 제2의 조표 출현을 막고, 형주 호족/명사 집단에 막대한 권한을 줘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는, 보다 업그레이드 된 방식으로 주(州) 장악에 성공하는 유비입니다만,

유기는 209년 무렵에 그냥 병들어 죽었습니다.

정말 병들어 죽었는지, 후사는 누구인지, 일단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무도 모릅니다. 손권도 주유도 노숙도, 그 누구도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그냥 유비가 형주목이 되는 걸 승인합니다. 제 추측으로는 여기에 강하군 경릉현 일대와 형주목 자리, 무릉군과 유기의 목숨을 두고 상당히 더러운 거래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다른 글에서 이 추측의 내용만 상세히 풀 수 있을 뿐 앞선 의문은 해결되지 않겠죠.

여하튼 괴뢰 형주목 유기를 형주 호족/명사 및 형주의 기존 무력과 철저히 단절시킨 뒤에 유비는 마침내 형주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11년, 유비는 익주의 무력집단 유장-동주병을 상대로 같은 일을 반복하려 합니다.

4장. 활로(猾虜)의 두 번째 속임수

「여대전」에 따르면, 211년에 유비와 함께(유비와 따로 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저는 같이 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2천 병사를 이끌고 촉 땅에 들어선 여대는, 한흥(漢興) 건성(寋城)에서 장로를 서쪽으로 유인하려다 실패합니다.

제가 한흥(漢興) 건성(寋城)의 위치를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오범전」에는 분명 여대가 촉에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기에, 일단 익주의 지명은 확실하다고 봅니다. 장로를 서쪽으로 유인하려 했다는 것은 어쩌면 한중군 서쪽 양평관을 나오도록 도발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서남 방향 파군 일대로의 유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건 다른 분들의 고견을 기다립니다.

어쨌든 장로 유인 및 격파가 실패로 돌아가자, 손권은 여대에게 철수 명령을 내립니다.

앞서 손권과 유비의 '두 번째 입촉 전략 논의'에서 이런저런 추측을 해봤습니다만, 이 부분을 보면 유비가 '먼저 한중, 파군을 차지하고, 자신이 한중의 후방을 지키는 동안 여대가 안에서 촉을 휩쓸고, 형주, 양주가 밖에서 치면 이긴다'라는 식으로 작전 내용을 속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손권군이 활약하여 유장의 동주병을 대체하고 익주 호족/명사(법정, 장송)와 제휴하자'고 속였을 수도 있겠죠.

속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여대가 촉에 가긴 갔으니 속이긴 한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이상이 첫 번째 속임수라면, 두 번째 속임수는 손권의 철수 명령 직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대의 철수 과정에 대해서는 「여대전」이 아니라 뜬금없이 「오범전」에 그 내용이 실려 있는데,(*「여대전」은 215년의 익양전쟁으로 넘어가, 장사군 동남부에서 두 번에 걸쳐 있었던 봉기 진압 및 여대의 여릉군 태수 취임으로 이어집니다)

정말 갑자기 임진년(壬辰 = 212년)에 오범이 손권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갑오년(甲午 = 214)에는 유비가 반드시 익주를 얻을 것입니다."

이걸 앞의 「여대전」과 종합하여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211년에 유비와 여대가 함께 입촉

-1년 간 큰 군사적 성과는 없었음

-212년, 손권은 이 작전은 안 통한다는 생각 or 이 해 10월부터 시작된 조조의 유수구 원정으로 인해 여대를 회군시킨다는 결정을 내림.

-이를 들은 오범이 "여대를 철수시키면 유비가 2년 안에 익주 혼자 다 먹어버린다고요!"라며 손권을 만류.

이렇게 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손권도 그건 바라지 않는 일이니 여대가 오자 일단 유비의 상태를 물어봅니다.

여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유비의 상태는 이렇습니다.

"제가 백제에서 유비를 만나 보니, 부대는 흩어지고, 죽은 자도 절반입니다. 그러니 유비는 익주 장악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손권이 여대의 증언은 당신 말과 다르다며 오범에게 따지니, 오범은 "저는 천도를 이야기했지만, 여대가 본 건 사람의 일입니다"라고 반박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오범전」에 달린 주석들은 「선주전」과 비교하며 반박합니다. '유비는 그때 백수-가맹에 있었는데 백제에서 여대랑 만난 게 말이나 되냐. 오나라 사람들 거짓말 좀 치지 마라'.

하지만 「오범전」과 「선주전」이 둘 다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둘 다 진실이라면,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백수-가맹에서 장로와 안 싸우고 민심을 위로했다(「선주전」)는 건 앞의 일이고, 그 후에 장로와 교전이 발생해서, 유비군이 절반 이상 소모됨.(「오범전」)

둘째, 백수-가맹에서 장로와 안 싸우고 주력 부대를 유지하며(「선주전」), 유비가 급히 백제로 달려와 여대에게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부대만 보여줌(「오범전」)

제 추측으로 손권은 두 번째 가능성에 무게를 둔 듯합니다. 설령 첫째 가능성이 '진실'이어도, 일단 손권에게 214년 5월에 눈앞에 보이는 건 유비가 익주를 차지했다는 사실 뿐이니까요.

"여대가 어떻게 속았을까. 여대에겐 소모되고 나약한 부대만 보여주고, 장로한테 패배했다고 속였을까? 그럼 애초에 같이 촉을 치자고 한 것도 주유 살아 있을 때 해 놓은 말이 있으니 그걸 무마하려는 속임수였겠네? 장로든 유장이든 자기가 독차지하려고 여대를 속여서 익주에서 나가게 했네?"

이것이 손권이 "활로(猾虜)가 감히 나를 속여!"(「노숙전」)라고 분노케 한 바로 그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걸 생각하니 210년의 일도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직접적 트리거는 211년~212년, 이상의 정황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5장. 정말로 유비가 장로와 교전했을 경우

유비가 장송, 법정과 함께 익주를 차지할 교활한 음모를 꾸민 것, 유비의 익주를 향한 야심 그 자체는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비가 과연 212년 10월 바로 그 순간에 유장을 칠 생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특히, 만약 여대의 증언대로(「여대전」), 혹은 유비 본인이 유장에게 불만을 터트린대로(「선주전」) 장로와 거듭 교전하며 병력 절반이 소진되었다면, 유비-유장의 전쟁이 기존의 그림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유비의 말과 행적을 보면, 유비 자신은 '손권-유장' 동맹 내에서, 양측의 필요에 따라 불려다니는 '용병'의 위치에 있음을 잘 아는 듯합니다.

저는 유비가 손권과 확실하게 동맹의 위상을 갖게 되는 걸 익양전쟁 이후라고 보는데, 그 전까지 확실히 대등한 동맹은 손권과 유장이고(「선주전」), 유비가 유장의 위치를 대체하고서야 비로소 동맹 관계가 첫 발을 떼는 게 아닐까 합니다. 물론 이 관계는 219년에 크게 삐걱거리며 손권은 다시 유장으로 하여금 유비를 대체하려고 하지만요.(이게 성공했다면 유장은 더이상 대등한 동맹이 아닌, 손권의 괴뢰지만)

유비가 핑계를 댄다는 『연의』의 표현과 달리, 212년 10월부터 조조의 손권 공격이 시작되는 것은 「무제기」 등을 통해서도 확인되기 때문에, 저는 유비가 이때 손권을 도우러 가야 한다고, '동맹'인 손권을 도와달라고 유장에게 청하는 내용 자체는 거짓은 아니라고 봅니다(*다만, 익주에서 잘 안되니까 익주의 군대를 빌려서 익주에서 하려던 걸 양주에서 해보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듭니다.)

유비는 이때 관우가 청니에서 악진에게 고전하는 것을(「악진전」, 「선주전」) 함께 언급하는데, 관우의 움직임이 유수구를 향한 손권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시도였다면, 이 시점의 유비는, 용병, 혹은 조조군으로 치면 이통이나 장패의 기능을 손권군에서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오범이 '그럼 유비에게 철군해서 방어전을 도우라고 하십시오'라는 대책을 내놓았을지도 모르지요.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지만 한두 번 용병으로 오가는 것으로는 익주를 공략하기가 어렵다 여겨 다음 기회를 노렸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유비는 유비대로 장로와의 교전, 소모로 불만은 한껏 올라가 있는 상황에서, 또 유장 역시 유비가 병력과 물자만 소모하며 성과가 것에 불만이 점점 커가는 데다,

결정적으로 장송이 눈치가 없었다는 겁니다. (*「방통전」의 상중하책은 장송의 내통 발각과 처형 후, 각 관문이 폐쇄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진언된 것으로 보입니다.)

장송의 당황에서도 알 수 있듯, 내통 및 유장을 제거하자는 큰 틀은 있었으되, 212년 10월 개전이라는 구체적 전쟁 계획은 전혀 없는 상황에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1년 반 정도 되는 기간 동안 벌어진 유비-유장 전쟁은

한편으로는 유비-장송-법정의 음모가 뜻하지 않게 발각되며 벌어진 우발적 전쟁이면서

유장과 유비라는 두 무력집단이 익주의 주도권 및 대(對) 장로 전선의 진퇴에 따른 신경전에 서로 악을 쓰다가 폭발한 우발적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에필로그-『상군서』를 읽는 유비

활로(猾虜) 유비는 214년 5월, 끝내 익주를 차지했습니다. 이것은 217년~219년까지 이어지는 한중전쟁의 중요한 기반이 되어주었지요.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보았듯이 유비는 최소 두 가지 지점에서 손권의 격노를 불러일으키고야 맙니다.

승리는 승리였지만, 우발적이고 무계획적(5장) 승리, 대책없는 승리는 219년 관우의 죽음 및 익주 1주(州) 기반의 기형적 국가 체제로 이어지고 말지요.

어찌보면 권모술수를 통한 세력 확장의 당연한 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주, 형주, 익주를 얻는 데 사용된 권모술수를 살펴보면서, 저는 유비가 유선에게 남긴 유언 중 "『상군서』를 읽으라"고 특히 강조한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이 『상군서』라는 책은 진(秦)의 법가적 개혁가 상앙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책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원래 『상군』이었으나 제갈량이 『상군서』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제목 변경은 제갈량이 혹시 『상군서』를 촉한의 경전으로 위상을 끌어올리려 시도했던 것은 아닌가 상상해보게 합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기 전부터 『상군서』를 읽다가 제갈량과 의기투합했는지, 아니면 제갈량의 권유로 『상군서』를 읽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상군서』는 제갈량에게, 제갈량과 영향을 주고받은 유비에게, 제갈량의 훈육 하에 있었을 유선에게, 촉한의 정치와 사상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무력집단 수장 유비와 형주명사 제갈량의 제휴는 『상군서』로 묶이는 사상적 맹우(盟友)의 관계는 아니었는지,

촉의 토착 호족 집단이 정치에서 배제된 데에는 도참설의 영향을 받는(결과적으로 촉한의 천명을 부정하는) <촉학>과 제갈량의 법가적 사상이 대립했던 탓은 아닌지,

유선이라는 인간은 『상군서』를 비롯한 제갈량의 사상적 영향 아래 전제군주로서 디자인된 인간인지 아닌지, 혹은 자칭 제갈량의 후계자들이 그를 왜곡했던 것은 아닌지,

『상군서』로 대표되는 촉한의 변법적 국가모델은 후대의 변법사상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할 것이 참 많습니다만 다음의 과제로 미뤄둘 수밖에 없겠지요.

***

활로(猾虜) 유비가 『상군서』를 읽습니다.

그의 인생은 권모술수적, 혹은 마키아벨리스트적이라고 할 정도로 피비린내가 납니다.

한편에서는 조조가 천사도(오두미도)를 받아들이고 한(漢)에서 위(魏)로의 천명 계승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조비가 '천하위공'으로 그것을 완성합니다.

우리는 『연의』나 대중매체를 통해 "유비(유가) VS 조조(법가)"의 이미지를 종종 떠올립니다만,

실상은 "유비(법가) VS 조조(도가)"의 굉장히 독특한 사상적 대결이 그 시대의 분위기는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조조가 삼보의 난으로 상실된 황실 음악 등의 옛 문화를 복구해나가는 것과 달리, 유비가 이단적인 책을 경전화하려는 국가의 수장으로 거듭나는 것도 그렇고요)

그렇다면 앞으로 제가 쓸 『삼국지』물 역시, 이러한 독특한 분위기, 권모술수적 폭력 누아르에서 그 재미를 찾아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 작품소개: 삼국지의 촉한 황제 유선에 빙의했다.* 일부 회차에는 작가님이 직접 작성하신 지도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ridibook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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