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 그래서 황개는 어디로 갔는데?
앞서 우리는 유기가 형주자사가 된 이후에 무릉군으로 옮겨졌을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유기가 제거, 혹은 완전무력화 된 상황 속에서 무릉군의 태수 자리야 주유나 손권에겐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겠습니다만(손권에게 더 중요한 건 상수-영거를 통해 남중국해 무역로를 장악할 수 있는 장사-영릉이 더 중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유기 사후 무릉군의 상황에 추측을 몇가지 더해보자면
첫째, 형주목 유비의 공식적 치소는 무릉군 한수현이었지만 주둔은 공안에서 계속했다 : 사공 조조 또한 공식적인 집무실은 허도에 있었지만 관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는 관도에 더 오래 머물렀던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유비가 공안에 주둔한 기간은 얼마 안 됩니다. 아무리 빨라도 209년 초에 머물기 시작해서 211년에는 익주로 들어가 백수, 가맹을 주둔지로 삼으니까요.
둘째, 유비가 자리를 비운 뒤로는 조운이 무릉군의 일까지 주관한다 : 「조운전」에는 유비가 익주에 들어가면서 편장군 조운에게 '유영사마'를 겸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본래의 군영에 남아서 군사 일을 책임지는 사마라는 것인데, 이때는 계양태수가 아니라 최소한 공안이나 무릉군 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야 지난 글에서 살핀 것처럼 213년 2월~3월 무렵에 있었을 손부인의 유선 납치 시도를 의도군(임강군)의 장비와 함께 막았다는 것이 지리적으로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손부인은 잔릉현 근처에 자기만의 성을 쌓고 있다가 공안으로 가서 유선을 납치했으니, 무릉군에 있던 조운이 급보를 듣고 달려가 유선을 구하려면 말입니다.
(*그 후 누가 계양태수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215년 익양전쟁 때 「요립전」이나 「여몽전」에서 확인되는 장사, 영릉 태수와 달리, 계양태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장비전」에서 장비는 의도(임강)태수-남군태수로 있다가 유비가 익주를 얻은 이후에는 파서태수를 겸했다고 하는데, 「조운전」에는 따로 조운이 계양 말고 어딘가의 태수를 겸했다거나 전임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냥 계양을 잃기까지 계속 공식적인 계양태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마지막으로 하나의 문제가 남습니다.
대체 황개는 어디로 간 것인가?
(*여기서부터는 상당히 무리한 추측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읽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과감히 뒤로 가셔도 좋습니다. 재미있는 상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황개전」에는 황개의 죽음에 대해 이런 기록이 붙어 있습니다.
"황개의 초상화를 그려 사시사철 제사지냈다"
초상화를 그려서 그 공을 기리는 것. 제가 이 의미를 너무 과대해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후한의 공신인 '운대 28장'의 경우에나 해당하는 것으로 압니다.
말하자면 오나라에서는 황개를 굉장히 중요한 건국 공신으로 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황개와 비슷한 경력, 비슷한 공을 세운 다른 세 명의 장수, 한당, 정보, 주치는 이런 기록이 없습니다. '초상화를 그려서 제사를 지내며 그 공을 기리기'는 황개에게만 전하는 내용입니다.
한당은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한당의 아들 한종이라는 놈이 자기 아버지 시신이랑 어머니를 포함한 일족, 부하들을 데리고 위나라로 망명해 버렸거든요(「한당전」)
하지만 주치와 정보에게 그런 내용이 없는 건 여전히 이상합니다. 두 사람도 황개처럼 산월 토벌에서 활약한 기록이 있고,(황개는 「황개전」 에만 전하고 「오주전」에서는 확인이 안 되는 공적이 많습니다만, 주치나 한당은 자기 전이나 「오주전」 양쪽에서 확인됩니다) 정보는 적벽대전에서, 주치는 손책의 강동 평정 과정에서 공을 세워, 어찌보면 황개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공을 세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황개에게 이런 특별 대우를 한 것일까요?
본 - 오의 국가안보로서 이민족 정벌
보통은 오나라의 내륙 국토 확장 및 인구 확보의 관점에서 산월이나 무릉만 등의 정벌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황개전」에는 황개가 산월의 습격이 있을 때마다 그 현으로 보내졌다고 하니, 황개 또한 그런 중요한 국책 사업에 참여한 셈이지요.
그런데 이 이민족 토벌은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오나라의 국가안보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이건 손책, 아니 원술 시절부터 이어지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원술이 193년 연주 침공을 벌이다가 조조에게 패하고, 남양으로 돌아가는 길은 유표한테 끊겨서 구강군 수춘으로 왔을 때, 여기에는 양주자사가 진우가 있었습니다. 진우는 다른 누구도 아닌 원술에 의해 양주자사가 된 사람인데, 여기서 원술을 배신해 버립니다.
수춘 입성을 거부당한 원술은, 197년까지 정말 끈질기게 유비와 여포와 조조를 괴롭히는 놀라운 인간답게, 패잔병을 이끌고 있음에도 진우를 물리치고 수춘을 차지합니다. 진우는 사촌형 진규가 패국상으로 있는 패국으로 도망친 듯합니다.
이 진우라는 사람이 조조의 눈에 띈 것은 원술이 황제를 칭하고 손책이 원술로부터 독립한 197년입니다.
「손책전」과 인용된 『강표전』을 보면, 아니 다른 기록에서도, 우리가 『연의』에서 오나라가 유비와 관우를 괴롭힌다고 느끼듯이, 조조가 정말 악의적으로 강동을 괴롭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조조는 손책이 원술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한나라 황실에 충성을 맹세하자, "그래 여포랑 같이 협력해서 역적 원술을 토벌하렴"이라고 말하는 한편으로 "여기 진우라는 사람을 보내는데 같이 잘 해봐"라고 소개해 줍니다.
손책은 이때 회계태수였고, 아버지의 옛 부하이자 오군태수인 주치와 함께 단양군(훗날 건업이 들어서는 곳) 정복에 나섭니다. 그렇습니다. 손책의 강동 평정은 크게 두 차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1차는 원술의 부하로서 간신히 회계태수가 되기까지의 과정(195년~196년)이고, 2차는 원술에게 반기를 들고 단양군을 정복하는 과정(197년)입니다.
손책이 단양군을 정복하려 할 때 단양 태수는 주상이라는 사람입니다. 주유의 친척 아저씨지요. 『연의』는 손책이 1차 강동 정복을 시작할 때 주유가 손책을 따라가는 것처럼 그리지만, 주유는 이때 그냥 원술 부하였습니다.
원술은 주상보다는 사촌동생 원윤을 단양태수로 임명해 손책의 공격을 방어하려 합니다. 주상과 주유는 별 말 없이 수춘으로 돌아갔습니다만, 새로 단양태수가 된 원윤은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순식간에 손책한테 패하여 수춘으로 도망갑니다. 단양태수는 손책의 외삼촌인 오경이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우의 활약은 바로 이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진우는 강동 '각 현'에 보낼 인수, 조조가 준 인수를 잔뜩 들고 강동에 들어왔습니다. 이 '현'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내륙, 산월의 땅으로 봐도 무방한 곳입니다.
이때 진우에게 호응한 사람 중, 손책의 오군 정벌 때 도주한 엄백호도 있었습니다. 음모를 알아챈 손책은 진우와 엄백호 등의 무리를 쳐서, 진우를 강북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진우는 원소에게 도망갔고, 엄백호는 이때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컨대 조조는 강동의 산월이나 호족을 이용, 손책-원술 간 전쟁을 틈타 강동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조조와 손씨 가문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민망해진 조조는 자신의 4남(조앙, 조삭, 조비 순입니다) 조창과 손책의 5촌 조카딸(종질녀, 손책의 사촌형 손분의 딸)을 혼인시켜 동맹을 맺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위와 같은 사건이 손책에게 '내부의 배신자'에 대한 의심을 부추긴 탓인지, 손책은 자신에게 항복했던 옛 오군태수 허공을 조조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죽여버리고 맙니다. 앞서 죽은 엄백호와 이 허공의 식객들이 손책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됩니다.
198년 조조가 여포를 정복하면서, 광릉태수 진등도 조조의 밑에 들어갑니다. 진등은 손책한테 쫓겨난 진우의 5촌 조카로, 진우의 원한(?)을 갚아주려 합니다.
200년, 진등은 조조가 했던 것과 비슷하게 인수들을 잔뜩 보내서 손책의 영토를 안에서 뒤흔들려 하지요(*인수를 보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조도 이 일을 모르진 않았을 겁니다.)
앞서 손책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허공과 엄백호의 식객들이 손책 암살 작전을 벌이고, 손책은 치명상을 입고 결국 26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맙니다.
(*「진등전」은 이때 손책과 진등이 두 번이나 대규모 접전을 벌여, 진등이 대승을 거두어 총 2만의 손책군을 참살한 것으로 표현합니다만, 아무래도 이는 「진등전」의 과장이 아닐까 합니다. 승리를 거뒀다고 해도 손책이 원정 중 암살되고 혼란에 빠진 강동 군대에 약간의 타격을 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곽가전」을 보면 곽가 역시 이 암살 작전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여기까지만 보아도, 오나라에게 이민족의 반란이란 '외부 세력'인 조조와 내통해서 일어나는, 경우에 따라서는 국군(國君)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황개를 비롯한 각 장수가 이민족 토벌에 나서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닙니다.
조조의 손오 내부 뒤흔들기, 이민족 선동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육손전」에 전하는 반림, 우돌, 비잔 중 비잔은 확실히 조조의 인수를 받고 산월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산월은 기존의 이민족 산월에 강남으로 온 피난민까지 뒤섞여, 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살면서 모두 한꺼번에 산월로 불리곤 했습니다. 반림에 대해서도 앞에 '오군, 단양군, 회계군에는 숲속에 숨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 뒤에 '회계군 산적 두목 반림'을 이야기하니, 그 또한 산월에 속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우돌은 파양의 도적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지형도 지형이거니와 「육손전」 초반부 내내 산월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걸로 봐서 그도 비슷한 부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손책이 죽고 손권이 세력을 이어받은 후, 손권의 동생이자 단양태수인 손익, 친척인 손하가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 반란군은 '조조의 양주자사인 유복'과 내통하여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했습니다.
앞서 손권의 사촌형, 손분의 딸이 조창과 결혼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손분에게는 손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이 사람도 손권의 사촌형입니다.
손보는 자기 조카가 조창과 결혼한 인연으로 뭔가 해보려 했는지, 역시 조조와 내통합니다. 이게 발각되는 바람에 손보는 유폐됩니다.
앞서 가정해 본 것처럼 황개가 무릉태수가 아니라 해도, 유비의 영역 내에 있는 무릉만, 장사만의 토벌에 나서는 것은 손오 측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조조와 내통할 가능성이 있는' 심각한 안보 위협이니까요.
실제로, 조조는 아니었지만 유비가 무릉만 사마가와 내통하여 안보의 위협이 된 일도 있었습니다. 이릉대전 말이죠.
혹시나 조조가 업으로 도망치면서 무릉만과 장사만에 인수를 잔뜩 뿌려놓고 선동했다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악화시켜 손책처럼 손권도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오나라 측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요컨대 조위나 촉한의 침공 다음으로 중요한 손오의 안보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결 - 혹시? 일남태수 황개와 동일인물?
일반적으로는 「설종전」에 언급되는 '남해의 황개가 일남태수가 되어'에서 이 황개는 동명이인으로 봅니다. 저도 그럴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황개의 고향은 영릉군이고 남해군은 가장 빠른 루트를 거쳐도 상수-영거-창오군을 거쳐야 할 정도로 거리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말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을 말하는 것이라면, '남해의 황개'는 남해 출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 남해에 있던 황개'라는 의미는 아닐까요? 설종 역시 본인이 봤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어 시기가 크게 다르지는 않는 듯합니다.
황개가 왜 뜬금없이 남해군에 가 있는지, 사실상 죽으러 가는 귀양지로 취급받는 오지 중의 오지, 일남군 태수로는 왜 가는지 의문일 수 있습니다만, 개연성 자체는 있습니다.
210년 보즐의 교주자사 취임입니다. (「보즐전」, 「사섭전」)
이 교주 문제는 유표가 살아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조의 협천자(196년) 이후 어느 시점(황제의 조서가 유표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사섭은 교지태수이자 수남중랑장(남해, 창오, 울림, 합포, 교지, 구진, 일남 7개 군의 수비)으로서, 유표가 파견한 교주자사 뇌공, 창오태수 오거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창오태수로 사황이라는 사람이 따로 있었고, 남해태수는 사섭의 동생 사무가 하고 있었으며, 교주자사로는 장진이 있었는데, 이 세 사람이 죽자 유표가 기회를 노리고 남쪽 바다로의 확장을 시도한 거죠.
영릉군을 흐르는 상수는 진시황이 개착한 영거(靈渠)를 통해 리수로 이어지고, 리수를 따라 내려가면 창오군이 나오며, 여기서 다시 울수와 합쳐집니다. 울수 하구로 나오면 왼편(북쪽)에 남해군 치소 번우현(=교주자사부)가 있죠.
유표는 상수-영거-리수-울수를 통해 뇌공과 오거를 보내 이 지역을 장악하고, 같은 루트로 남중국해 무역의 혜택을 형주로 끌어오려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유표 사후, 유종의 항복, 적벽대전, 유비와 손권의 형주 분할 등 정세가 격하게 변하자 오거와 뇌공 사이에 분란이 터집니다.
「설종전」은 이때 뇌공이 (아무래도 유표 때 실컷 싸우던 사섭을 부를 수는 없으니까) 오나라 쪽에 원군을 요청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210년 보즐이 사태에 개입하여 교주자사로 취임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표의 교주자사 뇌공은 영릉군으로 도망친 후, 재미있게도 유비의 휘하로 들어갔다가, 유비의 황제 추대에도 이름을 올리고, 촉한에서 태상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오릅니다.
이상의 사태에서 '황개=일남태수 동일인' 일 경우, 황개가 개입한 사건들은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1. 황개와 뇌공은 '동향 사람'입니다. 둘 다 영릉군 출신이죠. 마침 장사군 쪽으로 장사만 정벌을 나와 있던 황개에게 뇌공이 먼저 손을 뻗었을 수 있습니다.
2. 뇌공은 영릉군으로 도망쳤다고 하는데, 남해에 있을 뇌공이 영릉군으로 도망치려면 중간에 '창오군'을 지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거의 땅을 지났다는 건데, 뇌공의 경력으로 봐서 그건 불가능할 것 같고 아무래도 누군가가 구출작전을 펼쳐야 합니다.
3. 보즐은 210년에 파양태수로 있다가 뇌공의 요청에 급하게 교주자사로 전임되어 내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데려간 병력은 1천 명인데(「보즐전」), 창오태수 오거는 일단 보즐에게 굴복합니다. 오거의 굴복은 손권이나 보즐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지만, 황개가 여기 왔다면 조조의 함대를 불사른 황개의 위엄에 굴복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4. 오거는 어쨌든 유표의 사람이었던 데다, 뇌공을 내쫓은 것으로 보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보즐은 오거를 불러서 죽여버립니다. 오거가 순순히 오게 해서, 죽이기 까지 하려면 그 정도 무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때 황개가 보즐을 보좌했을지도 모릅니다.
5. 남해군과 창오군이 평정된 것이지 그 서쪽으로는 여전히 사씨 일가의 세력이었습니다. 아직은 사씨 일가와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기도 했지만, 중요한 점은 사섭이 '조조가 교지태수 자리를 승인하고 수남중랑장을 더해 창오, 남해까지 다스리게 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적벽대전 종료 후 2년 밖에 안 지난 시점에서 사섭은 손오 측 사람들에게 매우 의심스러운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사섭이 형제들과 함께 손권에게 굴복한 것은, 역시 그만한 무력이 있는 장수가 남해-창오 지역에 내려갔기 때문이 아닐까요? 「설종전」의 표현대로라면 일남태수가 된 황개는 일남군 관리의 기강이 흐트러져 있자 죽여버리는데, 이것이 사섭 일가에 대한 손권의 견제이자, 사섭이 민심을 얻고 기반을 둔 남월인들에 대한 기강잡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황개가 하필이면 '일남태수'인 것은 지리적인 정보를 종합해보면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집니다. 오거 정벌부터 보면 황개는 창오-남해-울림-합포-교지-구진을 다 거쳐야 일남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즉 황개는 교주 전체를 '순행'하면서 사섭 일가 복속 작업을 수행한 것입니다.
게다가 황개는 '조조와 연루된 산월, 무릉만, 장사만 토벌'의 달인이지요. '조조와 연루된 남월 관리인 사섭'에게 무력시위를 하기에 너무도 적절한 인물입니다.
6. 이러면 「설종전」의 '남해에 있다가 일남태수로 간 황개 이야기'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힙니다. 설종의 이 상소문은 여대가 교주자사 직에서 물러나 장사군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손권에게 올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상소문과 앞의 맥락을 종합해보면 "아니 황개가 있을 때도 교주-남월인들이 전혀 복종을 안 해서 평정이 안 됐는데, 지금 섣부르게 평정됐다고 판단하시고 여대를 물리시면 어떡합니까? 여대 후임으로 적임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식으로 읽힙니다.
이렇다면 주치나 정보, 한당이 그래도 좀 안정적인 임지에서 살아간 것과 달리, 황개는 평생을 산월, 무릉만, 장사만 뿐만 아니라 남월 저 끝까지 평정하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분투했던, 오의 내외 안보를 전부 책임진 공신 중의 공신이었던 겁니다.
'황개=일남태수 황개' 설이 옳다고 했을 때 이 정도로 공을 세운 사람은 당시까지의 한나라 역사상 딱 두 명 밖에 없습니다.
전한의 노박덕, 후한의 마원. 두 사람 다 복파장군이기에 '이복파사'라 불리는 명장들인데, 이들처럼 황개 또한 북적(조조)과 남월을 모두 물리쳤으니, 오나라 입장에서는 결코 이복파사에 뒤지지 않는 공신 중 공신이지요.
게다가 황개는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병이 남쪽 교주에서 얻은 병이라면, 황개는 210년~215년의 기간 동안 교주의 이민족 평정 및 사씨 일가 견제에 힘을 쏟다가 풍토병을 얻어 사망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게 주치도, 한당도(아이고 한종아ㅠ.ㅠ), 정보도 받지 못한 '초상화를 그려 사시사철 제사를 지내'며 그 공적을 기린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어디까지나 상상에 상상을 더한 추측이지만, 정말 황개의 인생이 이랬다면 비록 생전에는 그런 지위에 오르지 못했더라도, "대오제국의 복파장군"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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