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오곡이냐 기산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자오곡 계책은 「위연전」에 인용된 「위략」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를 둘러싼 많은 말이 오갔고, 또 오가고 있습니다.
제갈량이 위연의 말을 들었다면 1차 북벌이 성공했을까를 논하는 IF 논쟁부터 시작하여, 이 계책의 진위 여부를 논하는 것까지 다양합니다. 「위략」의 해당 기록은 하후무의 어리석음을 조롱하기 위한 것으로, 실제로는 이런 계책이 나온 적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저는 「위연전」에 인용된 「위략」의 다른 부분에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해당 부분은 장완, 비의, 동윤, 양의의 일방적인 주장과 달리, 제갈량은 자신이 죽은 후 군무의 후임자로 위연을 지목했고, 위연은 이를 실행하던 중 장완, 비의, 동윤, 양의의 모함 및 쿠데타로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제갈량이 장완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은 장완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점
제갈량이 장완을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근거는 「장완전」에 나오는, 제갈량이 유선에게 올린 표문입나다. "신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거든 뒷일은 (장)완에게 맡기십시오." 하지만 이 표문은 230년에 제갈량이 '은밀히' 올렸다고 주장되고 있습니다.
-둘째, 유선이 중립적인 입장에서 일단 위연의 말을 들어보고자 하는 데도 장완, 비의, 동윤 등은 일방적으로 황제의 의견을 묵살하고 있는 점.
위연의 죽음과 삼족 참살은 장완, 비의, 동윤, 양의 등에 의해 멋대로 진행하고 있지, 황제 유선이 여기에 관여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즉 이는 유선이 구금 상태로 위연의 처분에 자기 의사를 내비칠 수 없었음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셋째, 제갈량의 건강히 극히 악화된 시점에, 위연처럼 유비를 오래 따른 신하 유염(즉, 비(非)형주계로서 이 시점에서 유비의 본래 친위집단의 원로 역할을 하고 있을 사람)이 상당히 극단적인 스캔들로 인해 처형당한 점. 이 스캔들의 원인이 된 유염의 처가 다른 곳이 아니라 '태후(오씨=오의의 누이)'에게 붙잡혀 있었다는 점.
즉 오의의 누이인 태후 오씨의 협력으로 유염의 처가 사로잡힌 상황에서, 황후 장씨를 통한 궁궐 밖 '옛 유비 친위집단'과 유선의 연락망이 완전히 두절되었고, 친위집단의 거두 유염을 처형하여 유선은 고립되고 촉한 내부에서 위연과 협력할 사람들 역시 제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이것은 제가 아직 궁리 중인 가설인데, 제갈량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후계자는 유선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갈량이 후한대의 일반적인 권신과 다른 매우 특이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제갈량이 유선을 가르치는 주요 교재로 「상군서」, 「한비자」가 있는데, 이는 아시다시피 법가의 서적으로,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자하는 권신이 들이밀만한 책이 아닙니다. 이것은 황제를 진시황같은 철혈 군주로 디자인하기 위한 교재입니다.
게다가 제갈량이 유선에게 올리는 글에서 장완, 비의, 동윤 등을 언급한 부분을 보면 하나같이 '그 자들 게으르거나 자기 역할 똑바로 못하면 죽이십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건 권신이 황제를 대하는 태도라기보다는 아버지 혹은 스승이 마키아벨리적 제왕학을 가르치는 태도에 더 가깝습니다.
따라서 저는 장완 등이 마침내 유선에게 넘어가려는 한중 막부의 권력을 중간에 찬탈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마침 유선의 나이 20대 후반. 한중으로 나아가 친정을 하기에 딱 적절한 나이였죠.
(*여기서 더 나아가 저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남긴 유언 또한 유비-제갈량-유선으로 이어지는 실질적 후계구도를 암시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위에 언급한 네 가지 이유를 토대로, 「위략」의 내용이 위나라로 도망친 옛 위연의 부하들의 증언을 담고 있다고 본다면, 마찬가지로 「위략」에 전하는 자오곡 계책 역시 어느 정도는 교차검증을 거친 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촉한은 위연의 사망과 동시에 위연 휘하의 부곡장(이를테면 장교, 부사관 층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을 잃고, 이들을 통해 가능했던 많은 공격적 전술 역량을 상실했으며, 촉한 전략의 허실까지 모조리 위나라에 탐지당하게 된 것이지요.
여기서는 위나라 쪽에서 촉한의 전략을 분석하기 위해 위연 밑에 있던 투항자들을 심문, '자오곡 계책'의 증언을 들었고, 그것이 「위략」에 수록되었다는 전제 아래 이야기를 이어가볼까 합니다.
일단 가장 먼저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위연의 자오곡 계책은 제갈량의 기산 방면 공세 작전을 완전히 대체하는 뭔가가 아니라는 겁니다.
2. 망치와 모루, 주공(主攻)과 조공(助攻)
전장에서는 흔히 망치와 모루라고 하여, 모루가 될 부분이 적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망치인 부분이(기병이나 전차 등) 빠르게 기동해 적의 측면이나 후방을 쳐서 승리를 얻어냅니다.
주공과 조공도 비슷한 것으로, 조공이 적의 발목을 잡는 동안, 주공이 빠르게 움직여 전략의 목표 지점을 장악하든지 적 주력을 격파하든지 성과를 냅니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한 사례가 초한전쟁으로, 고황제 유방이 항우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한신, 팽월 등이 망치로서 움직여 항우의 전략적 패배를 굳혀가죠.
『삼국지』의 시대로 오면 주유의 전략이(흔히 천하이분지계라고 불리는) 한 예가 되겠습니다.
주유의 대전략은 이렇습니다.(「주유전」)
-주유, 손유가 함께 유장, 장로를 연달아 격파한 뒤, 손유가 익주 방어를 맡아 조조의 공세를 감당한다
-마초와 동맹을 맺어 서북방향에서 조조의 전력을 분산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은 한중에서 양양 방면으로 내려와 손권과 합류, 양양을 치며 북진한다.
역사상 많은 전략가들이 그렇듯 주유 또한 서북, 서남, 정남 방향에 각기 주공과 조공을 배치, 조조의 강대한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을 북벌의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럼 제갈량은 어떨까요?
많은 분들이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와 주유의 천하이분지계를 다른 것으로 말씀하십니다만, 사실 이 둘은 공세의 주체와 지점만 바뀌었을뿐 본질은 같은 전략입니다.
제갈량 전략의 본질은 형주와 익주를 가져라, 가 아닙니다.
상장(上將)이 형주에서 완, 낙(낙양) 방면으로 공격하는 동안, 유비 본인이 진천(秦川, 관중)으로 진격한다 - 서북 방향의 마씨 일가가 아니라 동남 방향의 손권을 동맹으로 상정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세 방향에서 공세를 펼친다는 골자는 주유와 같습니다.
이런 전략이 훌륭한 방식으로 발휘된 전쟁이 유비의 익주 공격(212년 10월? ~ 214년 5월)입니다.
여기서 유비는 부와 면죽을 함락시키면서, 동시에 형주에서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장강을 거슬러 올라오게 합니다.
(*『연의』는 유비의 전략이 방통의 죽음으로 어그러져 어쩔 수 없이 제갈량 등 형주 주력을 부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와룡과 봉추 중 봉추의 탈락으로 유비의 꿈이 좌절될 것이라는 암시, 관우의 형주 고립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문학적 장치로는 훌륭하지만 사실과는 다릅니다. 「선주전」은 제갈량 등의 익주 진입을 낙성을 포위하기 전으로 적고 있고, 낙성 포위 기간은 213년 4월~214년 4월이며 「방통전」에서 방통은 낙성 공성 중에 사망했기에, 유비는 방통의 죽음과는 관련 없이 안팎으로, 조공과 주공을 활용하여 유장을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다고 봐야합니다.)
유장의 주력을 낙성에 1년 이상 묶어두는 한편으로 유비는 별동대를 활용하여 주변 현을 제압했으며, 또 형주의 제갈량, 장비, 조운이 이끄는 부대로 동쪽에서부터 차근차근 익주를 공략해 나갑니다.
이러한 유비 군단의 전략은 말하자면 '물이 올랐다'고 할 것입니다. 법정 등이 합류한 뒤의 유비 군단은 전략을 더욱 성숙시켜, 한중 전투에서는 장비, 마초, 오란, 뇌동 등을 무도 방면에서 조홍을 상대할 미끼로 쓰는 동안, 유비 본인과 법정, 황충, 조운, 유봉 등을 이끌고 장합과 하후연을 격파하는 전략을 보입니다.
이러한 전략은 조조를 상대로도 먹혀들어, 유비는 때로는 자신이 화살이 닿는 곳 바로 앞까지 가 격전을 지휘하고, 또 때로는 조운과 황충, 유봉 등에게 조조를 상대하게 하면서 마침내 조조가 진령산맥을 넘어 도망치게 하고 한중을 정복합니다.(「선주전」, 「황충전」, 「법정전」, 「조운전」, 「장비전」, 「하후연전」, 「유봉전」)
그러나 이처럼 화려한 유비의 절성기는 한중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후 멸망 때까지 촉한군의 결함이 될 특성이 이 무렵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3. 모루만 있고 망치가 없는
「양부전」은 한중전투 직후 유비의 상황에 대해 흥미로운 증언을 전합니다. 유비가 한중을 취하고 무도군 하변현까지 진격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선주전」은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유비가 한중 전투 이후 성도로 돌아가면서 백수관에서 성도까지 400여 곳에 관사, 정(관측소), 장(산중 작은 성)을 세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둘이 상반되는 걸까요?
저는 이것을 관우가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을 죽인, 양번 공략전에서의 홍수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219년의 일인데, 공교롭게도 이 219년을 기점으로 한수현(가맹현)이 위치를 옮기고 '가맹'이라는 이름이 한동안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219년 한수 상류 부근에서의 폭우 등으로 인한 범람은, 익주 내부로 흐르는 서한수에도 영향을 끼쳐, 백수관, 가맹관에서 성도에 이르는 유비 본대의 주요 보급로(특히 수로)를 크게 망가뜨렸던 것은 아닌가, 하고 추측해보는 것이죠.
즉 유비는 한중이 정리되자 한중 수비는 위연에게 맡기고, 유봉과 맹달을 상용 방향으로 보내 관우를 보조하고(이 부분은 주유가 손권과 함께 양양을 공략하려 했던 것과 거의 일치합니다), 자신은 량주 무도군 하변현으로 나아가 "량주를 얻으면 형주를 돌려주겠다"는 말대로(량주를 얻으면 까지만 진심인 것 같지만) 량주 공략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중간에 홍수로 보급로가 망가지고, 「양부전」이 전하는대로 무도군의 이민족을 포함한 백성 다수가 관중 지역으로 강제 이주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더는 북방 공략에 나설 수 없었던 유비는 성도로 회군했다는 게 제 추측입니다.
문제는 유비의 이 회군과, 2년 전인 217년 이미 조조와 밀약을 맺은 손권으로 인해 망치들이 사라지면서, 관우라는 모루가 위의 모든 공세를 감당해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수군을 준비한 관우와 달리 유봉과 맹달은 그런 정황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범람한 한수 수로를 이용하지 못하게 된 두 사람은 관우를 보조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맹달은 소수의 군대를 보냈던 것 같지만 모두 육손에게 격파당합니다)
관우라는 모루는 조인을 포위하고 우금을 격파하는 것으로 이미 한계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시점에 조조는 서황의 뒤를 이어 장료까지 형주로 보내고 있었으므로(「장료전」), 설령 서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고 손권의 배신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패퇴했을 것입니다.
앞서 「제갈량전」에서 살펴봤듯이, 관우라는 상장이 완, 낙양으로 가는 데는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유비 본인이 진천(관중)으로 나아가는 데에만 성공했다면 전략적으로는 성공이었을 것입니다. 진창에 장합과 곽회가 있다한들 조조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고, 위왕에서 위황제가 되기까지 조비의 격렬한 정치투쟁을 보면 위의 정세를 활용할 기회는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비는 하변에서 회군해버렸죠.
다들 아시는 것처럼 그 해에 관우는 죽습니다. 우금을 잡고 화하를 진동케 했던 한수 범람의 행운이, 대전략의 측면에서는 관우에게 불운이었던 셈입니다.
관우가 처한, '모루만 있고 망치가 없는' 상황은 이후 촉한군의 고질병이 됩니다.
당장 관우의 복수전인 이릉전투에서부터 이 고질병이 드러나는데, 장비, 황충, 유봉, 법정 등은 이미 사망한 뒤였고, 조운과 마초는 후방에 머물렀습니다. 황권과 풍습은 망치가 되기는커녕 속된 말로 '네가 와', 그러니까 유비를 포함한 모두가 '망치가 어디서 저절로 생겨날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입니다. 아니면 여전히 장비나 황충이 살아있다는 착란이라도 일으킨 듯한 움직임이지요.
망치는 장수 하나만으로는 되지 않고, 그 장수가 휘하에서 직접 양성하고 부리는 장교, 부사관단이 장수와 병사를 연결해주어야 작동합니다. 장비를 측근인 장달과 범강이 죽였다는 것은, 그 사건이 장비 개인의 죽음으로 끝난 게 아니라, 엄안과 장합을 격파한 풍부한 경험의 장교, 부사관 역시 증발해버렸다는 뜻입니다.
육손은 그런 촉한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마침내 '215년과는 달리 모루만 있을 뿐 망치가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을 때,(「마초전」은 유비와 관우, 장비, 마초가 한자리에 모인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배송지는 신빙성을 의심하지만 저는 215년 익양전쟁에서 유비 진영에 관우, 장비, 마초라는 망치들이 다 있었다고 봅니다) 한 번에 촉한군을 대파하고 촉한의 미래 '망치'가 될 중추 인재들까지 모조리 태워버립니다.
다시 「위연전」 이야기로 돌아와봅시다. 228년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위연은 1만 명 규모의 별동대 지휘권을 요청합니다. 많은 삼국지 동호인들이 잠시 잊는 것과 달리 위연은 촉한군 전체를 자오곡으로 밀어넣자는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위략」의 이 기록이 믿을만하다고 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상세한 내용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위연이 자오곡을 돌파할 별동대 규모는 1만.
-그 중에서 전투병이 5천, 식량을 나를 병사가 5천.
-제갈량의 본대는 야곡을 빠져나간다.
이 중에서 '식량을 나를 병사가 5천' 부분을 봅시다. 앞서 살핀대로 219년에 유비가 무도군까지 진격했다가 보급의 문제로 성도로 돌아갔다면, 위연 역시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위연은 전투병 규모를 5천으로 제한하고 일단 자오곡을 돌파, 기습 효과로 장안을 가격하는 망치가 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얼핏 무모하게 보이지만, '제갈량의 본대가 야곡을 돌파한다'는 부분은 위연이 '망치와 모루'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만약 위연의 기습이 막힐 경우,(위연의 예상과 달리 하후무가 도주하지 않을 경우) 위군은 사력을 다해 위연을 저지할 것입니다. 위연은 이에 대비해 식량을 나를 부대 5천이 따로 있었으므로, 나머지 5천 결사대가 위군의 발목을 잡을 모루가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야곡을 돌파한 제갈량 본대가 망치가 되어 장안을 가격하겠지요.
그러나 제갈량은 위연의 안을 기각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제갈량의 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가지요.
(*다만 『역사 삼국지』에 나오는 것처럼 실제 가정은 기존 설보다 훨씬 남쪽인 마이지구에 있었고, 「원자(袁子)」의 표현대로 제갈량이 가까이 있던 마속과 함께 장합에게 격파당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마이지구에서 '가정'이라는 이름이 첫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근대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거든요. 그렇다면 「원자」가 틀렸는가? 아니면 가정에 대한 기존 설도 옳고 「원자」도 옳다고 했을 때 제갈량 역시 약양(略陽) 일대에서 마속과 함께 장합에게 격파당했는가? 그 경우 상규에서 곽회를 상대하고 있던 것은 누구인가? 고상은? 이런 부분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여하튼 이 글에서 핵심은 이릉전투 이래 촉한군의 전략에 '망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차 북벌만 해도 위연과 조운은 망치로 활용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이 성과를 보인 3차 북벌, 4차 북벌에는 확실히 망치라고 할 만한 것이 보입니다. 위연, 고상, 오반, 맹염 등의 적극적인 공세로 무도와 음평이라는 후방의 기반을 닦고, 이를 바탕으로 더욱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곽회와 사마의, 장합을 대파하거나 전사시키기까지 합니다. 5차 북벌에서는 곽회와 사마의를 상대로 강렬한 도하작전 성공까지 선보이지요.
하지만 제갈량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모루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망치가 깨질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망치를 들어야만한다'라는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고나 할까요. 5차 북벌에서야 비로소 1차 북벌 때 위연의 '야곡으로 나가라'는 말을 비로소 알아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갈량은 5차 북벌이 이루어진 그 해에 사망했고(장완 일당의 유염 제거 움직임이 제갈량 생전에 있었으니 무공수 도하 작전 이후 이미 제갈량은 위독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후계자를 '자칭'한 장완과 비의의 시대에도 촉한은 몇 차례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여전히 '망치'보다는 '모루'이길 고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비의가 사망한 253년 이후로 강유가 북벌에 적극적이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권한은 너무나 작았고, 망치가 되어야 할 대군(요화나 장익 등)은 성도의 황제 유선이 손아귀에 꼭 쥐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황제 유선의 관심사는 친위세력인 황호를 앞세우고 강유나 제갈첨, 동궐과 염우 사이에서 절묘한 권력 균형을 맞추고 충성을 유도해내는 데에 있었습니다. 결국 강유는 모루가 되지 못할 모루(한중 청야 전술)와 망치가 되지 못할 망치(답중 주둔)로 파멸적인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모루다운 모루가 마련된 것은 263년 여름, 강유가 검각으로의 퇴각에 성공하고 유선이 손아귀에 쥐고 있던 요화나 장익을 강유에게 보내주었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갈량의 1차 북벌 실패가 사실상 촉한의 운명을 결정지었으리라 말합니다. 그 말대로 228년의 실패 이후 촉한사가 단순히 35년 간 멸망을 유예해 온 것이라면, 피할 수 없는 멸망을 피할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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