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유비의 패배 직후 정황
유비의 본거지 하비에서 일어난 단양병 반란. 그 배후에 원술이 있다고 추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원술은 조조가 서주에 정신이 팔린 동안 의욕적으로 강동 일대의 평정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서주 호족과의 제휴는 끊어지고 유비를 윗선에 세우기도 싫었던 단양병들 입장에서 '강동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원술은 매력적인 새 주군이었다.
둘째, 단양병 반란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포의 신속한 개입과 함께 이루어졌다. 마치 그런 변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했다는 듯이. 그렇다면 이 여포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을까? 누가 여포에게 난의 정보를 제공했을까?
셋째, 여포가 서주를 차지한 후 원술은 이에 감사하는 서신과 함께 쌀 20만 곡을 보내며 호의를 표했다. 그런데 단순히 유비를 격퇴하는 데 도움을 줘서라기엔 '쌀 20만 곡'의 선물은 뭔가 이상하다.
애초에 원술은 유비에게서 방어전을 치르는 것도 아니었고, 명백히 자신이 서주를 차지하기 위해 유비를 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원술이 유비의 발을 묶어둔 사이, 여포가 원술의 몫인 서주를 훔쳐먹었다고도 할 수 있다.
혹시 쌀 20만 곡은 그저 '용병'인 여포에게 제공될 군량미였고, 서주는 원술이 차지하는 것이 계약의 원래 내용이 아니었을까?
넷째, 여포 측에는 학맹, 진궁처럼 이미 원술과 손을 잡은 사람들이 있었다. 진궁은 학맹의 반란 이후에도 여포에게 지속적으로 원술과의 동맹을 주장했다.
이상의 정황을 볼 때, 195년 여름(4월~6월)부터 사건의 순서를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95년 여름, 여포가 연주에서 최종적으로 조조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여포는 도망쳐 유비에게 의지했다.
196년 봄(1월~3월), 조조가 예주에서 원술군 및 원술의 영향을 받은 군대와 계속 싸웠으며, 협천자를 방해받았다. 한편 원술은 여포 및 하비성 내 단양병과 접촉하며 반란의 씨앗을 뿌렸다.
196년 여름 4월, 준비가 끝난 원술은 마침내 서주 정벌을 시작했다. 이후 유비와 한달 가량 하비국 우이현, 회음현에서 대치했다.
196년 여름 5월, 하비성에서 조표를 비롯한 단양병의 반란이 일어났다. 여포가 미리 원술과 약속한대로 진격해 신속히 하비성을 접수했다.
유비의 군대는 이에 사기가 떨어지고 흩어져 원술에게 패배했다. 유비는 동쪽 바닷가에 가까운 광릉군 해서현까지 도망쳤다.
원술에게서 감사 서신까지 받았건만 여포는 서주를 원술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여포는 다시 유비와 손을 잡고 원술을 격퇴했다.
「여포전」에는 원술의 장수 기령에게 영문에 세워 둔 극의 가지 부분을 화살로 맞추는 묘기를 보여주었고 이에 기령이 물러났다고 되어 있지만, 아마도 이것은 일종의 화친 의식으로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이 일은 패성(소패, 패국 패현) 남쪽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광릉군 해서현까지 도망쳤던 유비가 여포에게 항복하고 다시 소패로 들어간 뒤의 일일 것이다.
광릉군 해서현에서 소패로 가려면 여포가 있는 하비성 남쪽을 지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령이 유비를 추격해 하비성 남쪽을 휘젓고, 여포가 그런 유비를 맞이해 소패로 보내주는 동안 교전이 없을 수가 없다.
따라서 실제로는 유비-여포 연합군이 기령을 격퇴하고, 최종적으로 원술에게서 여포가 서주의 주인으로 인정받는 화친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196년 여름 6월, 여포가 서주를 내놓지 않기도 했고, 또 쓸모가 없어진 여포를 토사구팽할 생각으로 원술은 이번엔 진궁 및 학맹과 접촉, 다시 반란을 시도하나 이번에는 고순과 조성의 활약으로 진압된다.
『삼국지』의 각 기록은 여기서 무척 혼란스럽다. 조조의 일대기인 「무제기」는 196년 유비가 패전한 직후 조조에게 귀순한 듯이 적고 있다. 그러나 이때 조조는 협천자 때문에 정신이 없던 때였다. 그는 이 해 초부터 원술의 훼방을 물리치고, 여남의 황건 잔당을 격파하고, 동승과 제휴해 양봉과 한섬을 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가 협천자에 성공해 황제 유협을 영천군 허현으로 데리고 온 것이 음력 9월 7일의 일이다. 즉, 5월에 원술에게 패하고 6월 이후 시점에는 소패에 있을 유비가 조조를 찾아가 귀순하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비의 일대기인 「선주전」은 유비가 소패에서도 여포한테 공격받고 쫓겨나 조조에게 귀순한 것이 2년 뒤인 198년의 일로 적고 있다. 『후한서』의 「효헌제기」나 『삼국지』의 「여포전」과 비교해 봐도 이것이 사실에 부합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196년 유비의 귀순은 오류인가?
「선주전」에는 유비가 소패에서 쫓겨나 조조에게 귀순하자, 조조가 다시 패로 가서 군사를 모으고 함께 여포를 치자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소패가 곧 패국 패현이고 패성이다. 어떤 사람은 그러면 조조가 유비더러 빼앗긴 성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격이니, 조조가 말한 패는 다른 곳이다라고 해석하지만 정말 그럴까?
만일 이것이 기록이 뒤섞이고 어긋나서 생긴 오류일 뿐, 어느 정도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면 어떨까?
만약 196년 6월 이후, 유비가 이때부터 이미 조조와 밀약을 맺고 있었다면?
「선주전」과 「무제기」는 이에 대한 힌트를 준다.
바로 유비와 조조 모두 역임한 관직, '진동장군'이다.
여포가 서주자사를 자칭했다가 원술의 사주를 받은 학맹의 반란에 시달릴 무렵인 196년 6월, 조조는 양봉, 한섬과 씨름하던 중 황제 유협에게서 '진동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선주전」은 유비 역시 이 해에 진동장군으로 임명되었다고 되어 있고, 이에 대해 주석은 '이 때는 여기저기서 멋대로 관직을 내리던 시대라 조조도 진동장군, 유비도 진동장군일 수 있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하지만 이 역시 시간이 맞지 않는다. 조조는 황제를 자기 것으로 만드느라 분투하던 때인데, 자신이 받은 진동장군직에 유비를 또 올려놓을 여유도 이유도 없다.
조조는 9월 7일에 황제 유협을 허로 데려오고, 9월 12일에는 대장군으로 승진한다. 따라서 조조가 칙령을 빙자하여 유비를 진동장군으로 임명하는 것은 9월 이후의 일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서주 군벌인 유비를 회유하기 위함'으로 보고, 유비와 원술의 전쟁을 196년 9월 이후의 일로 서술하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여포가 하비성을 차지한 뒤 일어난 학맹의 반란이 분명히 196년 6월의 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유비는 6월 이전에 원술에게 패배해야 하며, 한달이 넘게 끈 전쟁이므로 유비와 원술의 전쟁은 4월~5월에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렇다.
조조는 '패전해서 소패로 돌아간 유비에게 진동장군직을 내렸다'.
이것이 앞서 말한 유비의 196년 귀순 기록의 전말이다.
유비는 여포에게 패배한 후 소패로 돌아가 순식간에 병력 1만을 다시 모았고, 여포에게 복수할 기회를 엿보았다. 한편 조조는 연주에서 자신을 멸망시킬 뻔 한 여포가 서주의 주인으로 앉아 있는 꼴은 볼 수가 없었다. 여포도 이걸 의식했는지 '제가 조조랑 싸웠는데 그래도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은 변치 않았습니다'라며 납작 엎드리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어쨌든 유비와 조조의 이해관계는 이렇게 일치했다.
그렇다면 사건 순서를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6년 6월 이후 어느 시점, 유비는 소패로 돌아갔다.
196년 8월 이후 어느 시점, 유비는 조조가 협천자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조조가 낙양에 입성한 것이 8월 18일, 유협을 데리고 환원관을 통해 빠져나온 것이 8월 27일의 일이다), 여포에게 복수하고자 조조에게 접근했다. 이것이 귀순 기록으로 남았다.
196년 9월 이후 어느 시점, 조조는 유비에게 자신이 대장군으로 승진하는 바람에 공석이 된 진동장군 직을 내리며, 동맹을 승인했다. 그리고 계속 패국 패현(소패)에 주둔하며 여포를 감시하라 명했다.
하지만 유비가 이렇게 멋대로 조조에게서 진동장군 직을 받으면, 그것이 여포에게 배신으로 비칠 여지는 없었을까? 아마도 여포는 그렇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여포 본인이 조조와의 화해 및 동맹을 적극적으로 바랐다.
여포는 패국상 진규에게 설득되어 진규의 아들 진등을 조조에게 사신으로 보냈고, 황제 유협의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서주목으로 임명되길 간절히 바랐다.
둘째, 지난 편에서 언급한 서주의 통치 구조 때문에, 여포는 유비를 공격할 수 없었다.
유비는 진등과 미축 등 서주 호족에게 '단양병을 대체할 새로운 제휴 무장 집단'으로 선택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포는 어디까지나 '외부 세력'인 원술의 사주를 받고, 서주 안에서도 붕 떠버린 단양병과 제휴했다.
즉 여포는 기습으로 하비성을 차지하긴 했지만 서주에서 지지 기반이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예로 서주 북부의 낭야국은 소건이라는 사람이 낭야상을 자처해서 여포는 그와 동맹을 맺는 식으로 회유해야 했으며, 그 소건을 장패가 죽였어도 치지는 못하고 그냥 장패랑 동맹을 맺어야 했다. 그 정도로 여포의 서주 기반은 빈약했다.
따라서 여포는 유비를 살려서 소패에 묶어두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라도 서주 호족의 마음이 완전히 떠나지 않게 해야했다.
게다가 서주가 서주 호족 - 외부 군사 집단(단양병, 유비군 등)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포군의 구성 역시 복잡했다.
병주계 - 여포를 비롯하여 장료 등을 포함한 본가 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내계 - 하내 태수 장양과 제휴할 때 섭외한 세력으로 학맹과 조성 등이 여기 속한다.
연주계 - 장막 사후 진궁이 이 계파의 수장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여포는 진궁을 죽이지 못했다.
단양계 - 가장 마지막에 흡수한 계파다. 조표가 이 계파를 대표했다. 고순이 단양병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이 중 하내계는 한 번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고, 고순이 단양계라고 본다면 고순의 병사를 빼앗아 친척인 위속에게 준 일을 통해 볼 때 단양계도 그리 믿진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선주전」에는 유비가 여포에게 항복한 후, 관우를 하비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쩌면 여포는 학맹의 반란 당시 유비의 도움까지 받아야 했을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학맹의 반란에 진궁을 비롯한 연주계가 연루되어 있다면, 진궁이 계속 주장한 '원술과의 동맹'은 상당히 뻔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궁은 원술을 끌어들여 여포를 죽이려 해놓고서는 원술과 동맹을 맺자고 주장한 셈이다. 이런 자를 제거할 수 없을 정도로 여포의 사정은 절박했다.
셋째, 여포가 조조와의 화친에 매달리게 하려는 서주 호족의 공작이 있었다.
패국상 진규가 여포에게 조조와 화친하라 적극적으로 권한 것은 여포를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여포와 원술이 동맹을 맺는 걸 방해하기 위한 공작이었다. 무엇보다도 진규의 아들 진등은 조조에게 가서 광릉태수 직을 받는 한편으로 여포를 몰락시킬 것을 조조와 모의하고 온다.
여기서 또 한 번 생각해보자.
유비를 서주목으로 추대한 사람은 바로 그 서주 호족 진등이다.
진등의 아버지는 패국상 진규이다.
패국 패현에 주둔 중인, 조조에게서 진동장군 직을 받은 군벌은 누구인가?
조조와 유비, 그 사이에서 진규와 진등이 열심히 오가면서 여포를 무너뜨릴 계략을 꾸미는 사이, 197년이 되었다.
의외로 이 197년 한 해 동안 조조와 유비, 여포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냈다.
원술이 발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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