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러시아의 패배에 대해
"아직 러시아에 숨겨진 비장의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러시아가 꾸민 거대한 계획의 일환이다"
라며 정신승리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러시아 옹호자, 속된 말로 "러뽕"이라 부릅니다.
또 일각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좌파인가 우파인가 정치적 견해를 문제 삼기도 합니다만, 저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다소 자신만만하게 나설 수 있는 것은, 저 자신이 어렸을 때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사실 요동에 있었으며, 백제는 요서, 산동, 장강 하구를 지배했다"
는 유사역사학을 믿는 부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를 아시는 분이라면 저의 과거를 듣고 꽤 놀라시겠지만, 어쨌든 10대 말~ 20대 초의 저는 그랬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과 같이 변한 것은 '세계관의 붕괴'가 일어났을 때, 그 세계관을 붙잡고 아Q처럼 정신승리를 할 것인가, 아니면 세계관을 깨고 나올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골랐기 때문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른바 '러뽕'이라 불리는 분들의 문제 역시 '세계관 붕괴'에서 사람들은 어떤 식의 반응을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에 가깝다고 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세계관'은 '강력한 러시아'라는 설정이 아닙니다. 좀 더 근본적인 '원리'에 가깝습니다.
세계가 어떤 식으로 작동한다, 하는 '원리' 말입니다.
'러뽕'이라 불리며 추태를 드러내는 분들을 살펴보면, 평소 정치성향(좌파인가 우파인가)에 관계 없이, 하나의 공통점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 칭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현실주의'란 대체 무엇인가를살 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의 현실주의란 요약하자면 '힘의 논리', 즉 강대국은 무슨 짓이든 해도 되고, 그것을 약소국이 막을 방법은 없으며, 도덕이나 윤리는 허구이고, 약소국이 다른 강대국과 힘을 합쳐 저항하는 것은 세상의 유일한 규칙에 대한 반역이라는 식의 해석입니다.
정치성향이 이분들의 결론에 끼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합니다.
굳이 끼친다고 한다면 우파는 "그래서 한국은 일본에 복종해야 한다", 좌파는 "그래서 한국은 러시아, 중국과의 사이에서 다소 굴종해야 한다" 정도로, 별반 큰 차이가 없습니다.
때문에 이분들은 한국의 국방력 강화, 이를테면 항공모함 문제를 두고도 한쪽에선
"약소국 한국이 뭔가를 주도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망상"이라며 비웃고, 다른 한쪽에서는
"쓸데없이 중국과 북한, 러시아를 자극해 평화를 해치는 행위"
라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분들의 현실주의란 현실을 냉철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운명론적 관점'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칭' 현실주의라 하니 '현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에 대해서는 '감상주의'라는 말로 비난을 퍼붓게 됩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소식을 전해주시는 <오로라의 공상>님이 받았던 비난 중에 '오그라든다'는 식의 표현이 종종 보였던 것에는 바로 이런 맥락이 숨어 있습니다.
'러뽕'들의 세계 원리에 따르면 '약자'는 현실에 굴복하든지, 현실에 저항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합니다. 약자가 현실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고 공허한 말장난이어야 할 '도덕'이나 '윤리'에 따라 행동하면서 '강자'에게 저항하는 것은 그 세계 원리를 뒤흔드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저항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공격이 됩니다. 얼핏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무례와 적대감을 뽐내며 돌격해오는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이른바 '독뽕'이라 불리는 분들에게까지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치 독일이든 독일 제2제국이든 그 마니아들 중 '일부'는(왜냐하면 세월이 세월인지라 많은 분들은 결국 세계관을 깨고 밖으로 나오시기 마련이므로) 앞서 말씀드린 정신승리가 극에 달하면 어떤 지경에 이르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분들이 특히 집착하는 것이 전술 단위에서의 '교환비'입니다. 결국 전략 단위에서의 승패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귀를 막고 한 명의 군인이 일당백이었는지, 한 대의 전차가 얼마나 잘 싸웠는지에 대해서만 몰두하지요.
이게 외교 분야로 가게 되면 약소국의 외교적 노력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혹은 의미가 없어야만 하고), 약소국이 운 좋게 강대국의 이익에 걸려들어 살아남은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1 이었을 때의 '교환비'를 '가정'하거나, 1:1로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았으니 비겁한 승리이며, 실질적으로는 패배하지 않았다는 정신승리를 일삼게 됩니다.
이것은 다시 '영미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을 뿐, 한 짓을 보면 똑같은 제국주의 국가'라는 식의 매도로 이어집니다. 이른바 양비론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한국에서는 자칭 현실주의자들에 의해 우파 쪽에서는 '미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일본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게 뭐가 나쁘냐'가 되고, 좌파 쪽에서는 '미국, 서구중심적 시각의 피해자인 중국과 러시아'가 되니, '러뽕' 현상의 근원을 파고들어가 보면 이처럼 정치성향이라는 것은 별반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과제는 '러뽕'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실상은 러시아 마니아가 아니라 '현실주의자 지망생들의, 냉혹한 세계 원리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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