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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후기

by 루모로마노 202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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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일) 여자친구와 함께 보고 왔다.

은퇴를 번복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진정 마지막 작품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또 작품을 두고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나 또한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중점으로 글을 적어볼까 한다.

먼저, 제목에 대해.

이 영화는 동명의 소설을 원안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마히토 역시 어머니의 유품인 해당 소설을 읽게 되는데, 그런 점을 유의해서 본다면 이 영화의 제목은 독자를 향해 '어떻게 살 것인가' 묻는 것보다는, '저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라는 감독의 답변이 아닐까 싶다.

특히 이 영화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제목의 방향은 영화의 내용을 향해 있으며, 내용은 그 자체로 '어머니, 저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라는 답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둘째, 은유에 대해.

이 영화는 은유의 덩어리다. 앞서 제목의 해석에 비춰보면, 영화는 어디까지나 감독의 사적인 답변이므로 '그대들은 이러저러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잔소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제국 시기 일본의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 폭력성을 은유를 통해 다루는 방식을 택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침묵'이 길어지면서, 중요한 부분에선 계속해서 관객이 이 은유들을 해석하게끔 유도한다.

가르쳐주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라, 어떻게 보면 효율적이지는 못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주는 영화이면서, 또 관객을 무척 지치게 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아래 이어질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 은유에 대한 나 나름의 해석이다.

셋째, 아버지와 자해

도쿄에서 전학을 온 첫날, 마히토는 시비를 걸어오는 급우들과 주먹다짐을 한다. 싸움이 끝나고 돌아오던 중 마히토는 돌 하나를 들어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때려 피를 흘린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 의사의 처치를 받은 마히토에게, 아버지는 누구의 짓인지 묻는다. 하지만 마히토는 혼자 넘어져서 다친 것이라 말한다. 아버지에게는 그런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보복해주겠다며 학교에 다녀와서는, 학교에 기부금을 듬뿍 안겨주었다며 자랑삼아 말한다.

이 부분은 대사가 정말 적기 때문에 마히토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긴 어렵다. 단순히 자신에 대한 분풀이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급우들에게 보복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는지 마히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의 단서는 영화의 후반부에 나온다.

마히토는 종증조부(증조부의 형)와 대면하여, 자기가 스스로 돌로 머리를 쳤으며, 거기에는 악의가 있었노라 고백한다.

나는 이것이 제국 시기 일본을 받아들이는 감독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의 만주 작전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미국의 도교대공습이나 히로시마-나카사키 핵투하라는 참극을 겪었다. 문제는 일본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이를 '전쟁의 비극'이라는 말로 모호하게 처리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한다고 말할 뿐,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만다는 점이다.

마히토가 돌로 자기 머리를 치게 된 계기는 급우들과의 갈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흘린 피는 분명 그 자신의 자해로 인한 것이며, 거기에는 어떤 식으로든 (급우들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었든, 단순 울분의 표현이든) 악의가 들어 있었다.

감독은 마치 '결국 전쟁의 비극은 일본의 자해나 다름없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도쿄가 불타오르고 핵폭탄을 맞은 것에 대해,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원인을 상기시키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건 열강의 석유 금수 조치 때문이었다는 변명에 대해, 그것은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에 이르는 침략 전쟁 동안 무수히 반복되었던 국제 사회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원인을 상기시킨다.

일본은 중국의 반일 정책 때문에 중국을 침략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에 대해, 그것은 일본이 아시아를 정복하고 초강대국이 되려는 추악한 야망 때문이었다는 이유를 상기시킨다.

소련의 만주 작전은 배신이라는 푸념에 대해, 그것은 일본이 할힌골 전투에서 만주를 넘어 몽골까지도 침략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상기시킨다.

전전과 전후 가리지 않고 반복되었던 비겁한 변명에 대해, 감독은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일본 스스로의 잘못'이었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게 아닐까. 적어도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돌로 머리를 칠 때 이상할 정도로 과장되었던 출혈 표현은, 그것이 단순한 출혈이 아닌 '전쟁'임을 은유하는 듯하기에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자신의 악의를 인정한 뒤 이어지는 마히토의 말 '친구를 만들겠다'는 것 역시, 일본이 진정 이웃과 친구가 되는 길은 자신의 악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넷째, 금기와 화해

작중 탑 속 세계의 붕괴에는 히미와 마히토가 범한 금기가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금기라는 것은 나츠코가 출산을 기다리는 산실에 들어간 것.

나는 여기서 '금기'인 산실 출입이 왜 금기가 되는가보다는, 그 금기를 범했던 사건이 어떻게 마히토와 나츠코의 '화해'의 계기가 되는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임산부의 방에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인류의 어떤 사회든 보편적인 금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게 왜 금기인가를 따지기보다는, '너무나도 당연했던 금기를 깨려고 하는 마히토'에 주목해야 한다.

전후 일본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일본이 잘못했다'고 말하길 금기시하는 경함이 강하다. 간혹 행동하는 양심들이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개인의 행동으로 머문다. 아무리 '전직' 고위 관료가 옛 식민지나 침략당한 나라에 가서 사죄하더라도, 일본 '정부'는 그것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 아님을 철저히 못박는다.

그러나 그래서는 화해에 이르지 못한다.

마히토는 산실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금기를 깨고 굳이 들어간다.

이전까지 마히토에게 나츠코는 '죽은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은 계모'이면서, 동시에 이모, 즉 어머니의 하나뿐인 혈육이다.

나츠코에게도 마히토는 '전처의 자식'이면서, 동시에 언니의 하나 남은 혈육이다.

이러한 애증 관계는 마치 무수한 갈등을 겪었음에도 결국 이웃과 공존의 미래를 그려나가야하는 세계 각국의 상황과 비슷해보인다.

화해는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면 체면이 손상될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잘못을 인정할 수는 없다. 개인 차원에서는 몰라도 국가 차원에서는 절대로'라는 일본의 금기를 깨뜨렸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적어도 감독은 그런 자세로 세계를 바라봐 왔다고 생각한다.

마히토는 금기를 깨고 나츠코와 마주하여, 마침내 나츠코를 구하는 이유가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닌 또 하나의 엄마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놓는다.

나츠코 역시 자신을 '엄마'라고 불러준 마히토를 통해, '전처의 자식'이라는 껄끄러움을 걷어내고 '또 하나의 내 자식'으로 마히토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마음의 방해물'은 금기를 깨뜨리면서 함께 쓸려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감독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은유다.

다섯째, 왜 피를 이은 자여야 하는가.

종증조부가 강제로 탑 속 세계로 끌어들여 물고기가 아닌, 사람이 될 영혼을 먹다가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펠리컨들.

마찬가지로 강제로 다른 세계로 넘어와 우스꽝스럽고도 잔인무도한 파시스트들이 되어버린 앵무새들.

기껏해야 돌 몇 개로 유지되는 불안정한 세계.

그것들을 수습할 의무는 종증조부와 피가 이어진 히미나 마히토에게 있다.

어째서 여기서 '혈연'이 강조되는 것일까.

나는 이 은유에서 '침략 전쟁의 책임은 당시 제국의 군인, 정치가들에게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가, 새로운 세대가 계속 짊어져야만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혹자는 제국 일본과, 1945년 이후 일본국의 '단절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침략의 책임은 일본제국이 멸망하면서 사라진 것이고, 신생 일본국은 침략 전쟁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외면과 회피에 대해, 감독은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마히토는 종증조부가 이룩한 불안정한 세계를 그냥 계승하지 않는다. 불안정함을 외면하고 그 세계의 아름다움만 보려는 건, 파시스트(앵무새왕으로 표현되는)가 스스로 자기 세계를 부숴버렸던 것과 같은 파멸만 낳을 뿐이다.

마히토는 종증조부가 경고한, 곧 핵의 화염으로 불타오를 세계를 정면으로 마주보려 한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새로운 세대 역시, 제국 일본으로부터 이어지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혹은 제국 일본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기만을 그만두고 '외면하고 싶었던 것'을 정면에서 바라봐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여섯째, 어머니와 아들

그리하여 마히토는, 감독은 그렇게 살아가고, 살아왔다.

히미(히사코)는 자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결국 비참하게 죽게 될 것(영화 첫 장면)을 알면서도, 마히토 같은 좋은 아이를 낳을 수 있어서 자랑스럽다 말한다.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영화가 감독이 어머니께 바치는 전상서라는 가정을 뒷받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여든이 넘은 아들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총괄하는 마지막 장에서 자신이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올바른 자세로 살아왔노라'라고 밝히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렇기에 히미와 마히토의 작별 장면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감독 본인에게 돌아가는 위안일 것이다.

일곱째, 그럼에도 감독이 미처 다루지 못한 과제

나와 여자친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타지를 통한 은유'의 끝에서, 정작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 이 영화에 약간은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작품은 1944년에서 단숨에 3년(작중 사건으로부터 1년 뒤 전쟁이 끝나고, 그 후 2년 뒤)을 지나 1947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히토의 이복동생은 무사히 태어났고, 과묵하던 마히토는 부모님의 부름에 곧잘 대답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 3년 동안 무엇을 마주보았는가, 무엇이 달라졌는가, 도쿄로 돌아가면 달라질 것인가? 이에 대해 감독은 아무 답도 내놓지 않는다. 이것을 생략 기법으로 볼 수도 있고, 관객의 상상에 맡겨두는 감독의 배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자전적'이야기임에도 '판타지라는 거대한 은유'를 통해 다룰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이 결국 감독 또한 문제의 핵심을 전면에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곁눈질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 생각하면, 그다지 당당한 방식의 화법은 아닌 듯하다. 감독이 비판해왔던 것들과 마찬가지로, 은유를 통해 적당히 돌려 말하는 것으로 그쳤을 뿐 아닌가.

"나는 내가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이만큼이나 양보해서, 에둘러서 말하는 용기를 냈어. 그러니 이제 네가 내 진심을 좀 알아서 배려해주면 안돼?"라고 말하는 듯도 하다. 나는 감독의 의도를 선해하고 싶지만, 정녕 감독이 그렇게 말하고자 한다면 상당히 비겁한 방식이라고밖에 답할 수 없겠다.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

삼국지의 촉한 황제 유선에 빙의했다.* 일부 회차에는 작가님이 직접 작성하신 지도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page.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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