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게임 등을 통해 흔히 알려진 량주, 옹주, 사예의 위치와 대략적인 영역입니다.
이런 지도가 각인된 우리는 '마초는 멀리 서량(량주)에서 온 이국적인 장수'라든가, '옹주는 장안' 같은 이미지를 품고 있지요.
하지만 삼국지를 좀 깊이 파거나, 본격적인 삼국시대 이전 초반부의 이야기를 할 때 이 지도는 완전히 틀렸습니다.
위 지도는 220년대 조비가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난 뒤의 지도입니다.
그러면 220년 이전, 삼국지 초반부의 량주, 옹주의 지도는 어땠을까요.
이것이 삼국지의 첫머리, 황건적의 난 무렵에 마주하는 량주와 사예(수도권)의 모습입니다)
애초에 옹주라는 주 자체가 없고, 량주는 남쪽으로 무도군(역시 게임의 영향으로 익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데 량주입니다!), 동북쪽으로는 북지군, 서북쪽으로는 돈황군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삼국지 게임에서는 '무위'가 중국의 서북쪽 끝으로 등장하는데, 실제 지도로 보면 무위는 량주가 좁아지는 길목 쯤에 있습니다. 그 서북쪽으로도 군(郡)이 세 개나 더 있고, 그 너머는 서역, 실크로드(비단길)이지요.
그럼 삼국지물을 깊이 다루는 데 있어 이런 이해가 왜 필요할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서량의 금마초'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초든 그 아버지 마등이든 서량(량주) 사람이 아니라 수도권인 사예 사람입니다.
장안 서쪽에 있는 도시, 부풍(우부풍) 출신이지요.
이는 일반적으로 코에이 사의 게임에서 수도권인 사예 지역의 묘사를 장안-홍농-낙양-하내 정도로 떼워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마저도 홍농과 하내는 생략되기 일쑤이며, 장안을 둘러싼 풍익(좌풍익)과 부풍(우부풍)은 한 번도 도시로서 묘사된 적이 없습니다(그나마 있다면 진채 같은 거점으로 나왔을까요?)
마등과 마초 등이 배치되어야 할 우부풍(부풍)이 사라졌다보니, 별 상관도 없는 무위 같은 데 배치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역사적으로는 한수가 마등보다 훨씬 서북쪽에 있는데 게임 상에서는 마등이 저 멀리 변방에 처박혀 있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집니다.
위 지도를 바탕으로 설명드리자면
1. 서평, 금성, 천수, 부풍 일대의, 중간 정도로 짙은 분홍색이 마등(마초)-한수의 주 영역입니다.
마등과 한수의 반란, 마초의 반란이 얼마나 장안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는지 아시겠나요?
2. 장안을 둘러싼 가장 짙은 분홍색(거의 자주색)이 마초의 반란 때 마초가 장악한 지역입니다. 다만 게임이나 연의와 달리 장안은 함락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파란색(조조)으로 두었습니다.
3. 옅은 분홍색은 마등(마초)-한수와 협력한 군벌을 표기한 겁니다.
장안 동남쪽의 남전현(남전산), 풍익(좌풍익), 안정, 농서 일대에는 마등 부자, 한수와 협력한 여러 군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마초가 이 지역에서 최종적으로 패퇴한 214년 이후로도 종종 위나라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며, 심지어 이런 반란은 조비 시대까지도 이어집니다.
보고있으면 왜 마초가 그 영향력으로 유비에게 중히 쓰였는지, 왜 제갈량의 1차 북벌에 네 개 군(천수, 안정, 남안에 농서까지)이 호응했는지 알 수 있죠.
4. 노란색은 조조에게 반기는 들지만 마등-한수와의 관련성은 애매한 지역입니다.
이들 중 무위군 역시 한나라 조정에는 반란을 일으킨 입장이라, 210년 한수가 '제가 토벌할 게요'라는 식으로 쳐들어가기도 합니다만, 딱히 장악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 211년~214년 마초의 난에도 협력하진 않은 듯합니다.
다만 무위에는 안준, 왕비,
주천에는 황화, 소형,
장액에는 화란, 장진,
서평에는 국연, 국광
금성에는 장석,
등의 군벌이 난립하여 위나라의 통치를 계속 거부하며, 이는 조비의 시대까지 일시적인 굴복과 반란이 반복되는 방식으로 계속됩니다.
5. 파란색은 당연히 조조입니다.
그런데 왜 멀리 떨어진 돈황군에 파란색이 칠해져 있느냐... 그것은 저 서북방의 군(郡) 중에서 조조에게 '새로 태수를 보내주세요'라고 청한 유일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마초의 일족을 죽이는 데 활약한 윤봉을 태수로 보내는데, 4번 노란색 지역에서 그 길을 방해한다는가, 여러가지 분란이 일어납니다. 그래도 215년 이후로는 일단 공식적으로는 위의 영역이 됩니다.
이처럼 삼국지 행정구역 변화를 제대로 이해해야, 삼국지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정확한 추이를 알 수 있습니다.
위의 마등(마초)-한수 반란뿐만 아니라, 다른 사건에서도 이해를 돕거든요.
예를 들어 위 지도는 194년, 이각-곽사 정권이 서북쪽을 따로 '옹주'로 재편한 뒤의 지도입니다.
이 행정구역 재편성 직전에
익주의 유언(유장 아버지)이 마등-한수와 손잡고 북벌군을 일으킵니다. 이때는 오두미도의 장로도 유언의 부하였죠.
그러나 장안 내부에서 유언의 아들들(유장의 형들)이 호응하고 밖에서 마등과 한수가 친다는 이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마등과 한수는 패했고 유장의 형들은 죽임을 당했죠.
이 사건 직후에 이각-곽사는 무위군 서북쪽 지역의 행정을 회복하고자 따로 옹주를 만들게 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지도와 달리, 여기서는 옹주와 량주의 위치가 완전히 정반대죠?
촉한이나 오는 딱 여기까지만 행정구역 변화를 인정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비가 손권에게 "량주를 얻은 뒤 형주를 돌려주겠다"라고 한 것을 "저 멀리 있는 서량을 얻은 뒤"라고 해석하면 절대 안됩니다.
유비는 장안 근처, 농서, 천수, 안정 등을 얻고 형주를 돌려주겠다고 한 겁니다.(실제로 그런 발언을 했는지는 의심이 가지만)
위의 행정구역은 위나라에서는 213년까지 적용되기 때문에
194년 이후 ~ 214년 이전 '옹주자사'로 부임했다고 하면 장안 일대로 부임한 게 아니라 서북방으로 갔다는 이야기고,
'량주자사'로 부임했거나 량주에서 뭔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사예(장안)에 보다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213년 이후의 지도입니다.
이때는 장안(경조) 일대(삼보 : 경조, 부풍, 풍익)와 량주가 모두 옹주에 통합됩니다. 220년까지 지속된 이 체계는, 이후 이 글의 가장 첫 지도로 개편될 때까지 7년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이 개편은 조조가 위공으로 즉위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위나라 측 인물이 이때 '옹주자사'로 취임했다면 저 넓은 영역을 관할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다만 촉한과 오에서는 이 개편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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