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세간에 퍼져 있는 이야기는 한위오 삼국의 국력이 1:6:2라는 식으로 퍼져 있다.
그런데 정말 이 국력차가 삼국 정립 이후 서진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흘러갔을까? 나는 이에 대해 다소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한이나 오는 위를 상대로 희망없는 싸움을 하며 국력을 소모하기만 했을까?
그러던 중 우연히 우리가 코에이 게임 등을 통해 흔히 아는 '주'의 구분이, 서진 시대에는 더욱 늘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행정구역을 분할해 늘리는 것은 그 영역이 너무 광대해서 일 수도 있으나, 보통은 '인구의 증가'로 하나의 행정구역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행정구역을 분할, 신설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른바 '화북' 혹은 중원 지역에는 기주, 예주, 서주, 연주, 청주 등 작은 주들이 즐비하지만, 비슷한 영역의 강동 지역엔 양주 하나 뿐인 것은, 그만큼 인구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은 인구가 증가하면서 더욱 가속화하는데, 이를테면 연의의 대표적 오류 중 하나인 '강동 81주'가 그런 현상을 보여준다.
아주아주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다들 알다시피 강동 지역은 양주(揚) 단 한 개 주다. 이랬던 지역이 수, 당, 송 시대를 거치면서 인구가 증가하면서 주를 계속 분할, 신설하다보니 81개 주로 늘어난 것이다. 후대의 창작자들은 자기네 시대를 기준으로 '강동 1주'였던 시대에 '강동 81주'라는 서술을 집어넣은 것이고.
당나라는 이렇게 증가한 '주'를 묶는 행정단위로 '도(道)'를 새로 만든다.
자 그렇다면, 한위오가 삼국시대 전반에 걸쳐 증대시킨 국력은 인구의 증가로 측정할 수 있고, 인구의 증가는 행정구역의 증가로 대략적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물론 기록에 구체적으로 남은 인구를 바탕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인구를 너무 세세히 파악하는 것은 징발을 목적으로 한 가혹한 정치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는 기주, 예주, 병주, 연주, 청주, 서주, 유주, 사례, 옹주, 량주, 형주, 양주(揚), 이렇게 총 12주에 걸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중에서 양주(揚)는 그 대부분이 오나라의 영역이니 제외하고, 형주도 북부 절반을 가져갔으니 10.5주를 차지했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서 서진 시대로 넘어가면 주가 개편되는데, 일단 유주에서 요동과 낙랑 일대를 떼어내 '평주'가 신설되고, 농서와 무도, 음평 일대(촉한의 영역)를 합쳐 '진주'를 신설한다. 위의 영역이었던 진주를 0.5주, 평주를 1주로 치고 계산하면 위는 10.5주에서 12주로 국력을 증대시킨 셈이다.
오는 양주, 형주 남부, 교주를 차지했으니 2.5주라고 볼 수 있지만, 교주는 이후 '광주(우리가 아는 광서, 광동 일대)'가 떨어져 나오게 되니 대략 3.5주라 생각할 수 있다. 서진 시대로 넘어가면 형주 남부는 '상주'라는 번듯한 하나의 주가 되고, 양주도 서부 일대를 '강주'로 분할하니 대략 5주라고 볼 수 있지만, 이러한 분할은 혜제 이후의 일이라 온전히 손오만의 성과인가 생각하기엔 애매하다.
촉한은 건국(소열황제 즉위)부터 멸망까지 익주 1개 주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의 유지는 승상 제갈량이 북벌을 위한 국력 결집을 위해 '익주목'을 겸하면서 이루어진 조치라 생각된다. 이미 제갈량이 살아있던 당시에도 이엄이 '파주'를 따로 분리할 것을 건의했는데, 이는 이엄의 권력욕도 있지만, '파주'라는 하나의 주를 만들어도 무방할 만한 근거가 분명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촉한 멸망 직후 위나라(이미 실권은 사마씨에게 넘어갔지만)에서는 익주를 분할, 양주(梁), 녕주, 진주를 신설한다. 촉한의 땅에는 익주, 양주, 녕주, 진주, 이렇게 4개의 주가 들어선 셈이다. 이 중 진주는 위의 농서 일대에 걸쳐 있으므로 0.5주라고 한다면, 촉한은 삼국시대에 1주에서 3.5주로 국력을 세 배 이상 늘린 셈이다.
그렇다면 다시 계산을 해보자. 한위오 삼국의 '국력=주의 수'라고 가정했을 때, 그 비율은
3.5 : 12 : 5 라고 볼 수 있고, 여기서 진혜제 이후 신설된 주를 제외하면
3:5 : 12 : 3.5라는 식의 계산도 가능하다.
즉, 오나라의 국력 증대를 최소로 잡고 봐도 위나라와 대결할 때 촉오 동맹은 12 : 7이기 때문에, 6 : 3보다는 좀 더 유리하며,
오나라의 국력 증대를 최대한 높게 잡으면 12 : 8.5 라는, 결코 만만치 않은 수치가 나온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세간에 퍼져 있는 것처럼 촉한과 위의 국력 차는 6 : 1이 아니라, 12 : 3.5라는 셈인데, 제갈량과 촉한의 정치가들은 6배의 국력 차이를 4배 미만으로 줄여내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그것도 그렇게 전쟁을 하면서.
또한 위는 촉한과만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 북방의 여러 이민족들과도 대항해야 했기 때문에, 국력 전부를 대촉 전선에 쏟을 수가 없다. 촉한이 승승장구하면서 옹, 량주를 집어삼킬듯하자 위나라 정치가들이 그토록 긴장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촉한의 백성들이 제갈량을 그리워 한 데에도 다 이유가 있고.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와 당의 종교 문제에 대한 상상 (0) | 2021.04.22 |
---|---|
연개소문, 고구려의 마지막 희망을 짓밟다 (0) | 2020.10.29 |
『비잔티움 연대기』에 실린 내용 정리 (0) | 2020.10.08 |
조조에 대한 상상 (0) | 2018.01.28 |
만약 그리스가 세브르 조약을 비준했다면? (0) | 2018.01.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