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낭만의 껍질을 벗겨내면 그 안에 또 다른 낭만이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조조 역시 마찬가지다. 근대 이전에는 조조에게 철저한 ‘학살마’이자 국정을 농단한 ‘역적’의 가면이 씌워졌고, 근대 이후의 조조에게는 ‘비정하고 냉혹하지만 개혁가적 면모를 갖춘 인물’이라는 가면이 씌워졌다. 그리고 다시 최근엔 그의 개혁가적 면모가 지닌 ‘허상’과, 철저한 ‘귀족’적 성격, 그리고 ‘학살자’로서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면모들을 다 걷어 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지의 오랜 팬으로서, 그에 대한 상상의 붓을 들어보자 떠오르는 건 평생토록 처절하게 투쟁해 온 한 인간이 모습이었다.
상상의 출발은 ‘조조의 승상 취임 시기’이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황제를 맞이하고 허로 천도하자마자(196) 승상 및 대장군의 자리에 올라 국정을 장악한 듯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조조는 처음에는 사공에 취임했으며 대장군 자리는 원소에게 양보해야 했다. 조조가 승상에 취임한 것은 그로부터 12년 뒤인 208년으로, 하북을 평정한 뒤의 일이다. 정권의 정점에 오르는 데에 12년의 세월과 북중국 대부분을 정복했다는 군사적 위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살펴보면, 게임과 소설을 통해 삼국지를 접한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조조의 권력은 의외로 취약한 면이 있었고, 또 그 권력의 구조 역시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상상의 영역을 황궁, 조조의 권력 ‘획득’ 수단, 조조의 권력 ‘유지’ 수단, 조조의 한계 이렇게 네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풀어나가 볼까 한다.
먼저 황제 유협의 황궁을 상상해보자. 궁정이라는 공간은 화려한 모습 뒤에 의외의 음습함과 잔인한 음모의 칼날을 감춘 공간이다. 또한 공식적이고 의례적인 공간이며, 무력 이전에 제도와 형식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나는 코에이 사의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서 후한 황제들을 마치 현대 일본의 천황처럼 실권 없는 그림자로 표현한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무력은 군벌인 조조 안으로 들어와야 했던 황제 유협이 불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황제는 400년을 이어온 정통 정부의 수반이며, 한(漢)의 국가원수이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식적인 제도와 거기서 비롯된 정부의 명령은 강력한 명분을 준다. 흔히 ‘명분’이 실체는 없고 ‘허울’만 있는 애매모호한 무언가라는 착각들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명분’은 결코 허공의 메아리가 아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안정을 바란다. 한 사회가 적절한 ‘원칙’에 의해 안정적으로 작동하길 원한다. 이 ‘원칙’에 속하는 것이 곧 ‘명분’이다. 사회는 원칙-명분에 따르는 이에게 적절한 보상을 제공한다. 그리고 원칙-명분에 따르지 않는 이에게는 벌을 내린다. 이러한 보상과 벌은 보통 권력구조에서의 상승과 하락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명분은 그 사회의 식자들을 움직이고, 그 시기 식자들은 보통 귀족이기 때문에 그 가문에 속한 사람들과 그 가문의 무력을 움직이고, 마침내 무력의 기반인 대중까지 동원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조조를 주살하라’는 황제의 공식적인 명령이 황궁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 강력한 ‘명분’은 한나라 사회 전체를 조조를 죽이기 위해 작동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을, 명령을 받은 이들에게 부여하게 된다.
그렇다면 동승의 조조 주살 음모와 유비의 저항, 그리고 관도대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황제의 밀칙을 명분으로 한나라의 사회 시스템이 조조를 제거하기 위해 작동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조조는 이 글을 쓰는 나보다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영향력을 벗어난 그 어떠한 황제의 의사도 황궁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철저히 경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시 말해 깨어 있는 동안에도, 심지어 자는 동안에도 언제든 깨어나 보고를 받을 수 있도록 지속적인 긴장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계하고 있는데도 자신의 감사를 벗어나 새어나간 밀칙은 조조를 더욱 긴장상태로 몰아붙였을 것이다. 황궁을 품은 것은 그에게 강대한 권력을 가져다주었지만, 강대한 권력은 늘 그래왔듯이, 소유자의 육신과 정신에 막대한 피로를 안겨준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황제가 조조의 심기를 거스르면 무력을 동원하면 되는 일 아닌가, 하고. 하지만 무력을 동원한 황제 제거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과 달리 결코 속 시원한 결단이 아니다. 황제가 제거되었을 경우를 상상해보자. 더 이상 황제를 등에 업은 것도 아닌데다, 확실하게 역적이 되었기 때문에 안으로는 권력 기반이 불안정해진다. 동탁에 반대하면서 임관해 온 신하들이 대거 이탈해 올 것이 뻔하다. 밖으로는 유비와 원소 등이 더욱 세력을 불려서 조조 토벌의 기치를 드높일 것이다. 조조에겐 원술처럼 저항하다 비참하게 죽는다는 결말 밖에는 남지 않는다. 즉, 조조는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대안의 범위를 줄여버리는 ‘무력을 통한 황제 제거’를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때는 무력이라는 수단을 동원한다’가 아니라, ‘그 경우에는 무력 외에 다른 수단이 조조에게 남지 않는다’가 정확한 표현이 된다.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황제를 무력으로 제거하면 ‘책임을 황제에게 묻는다’는 꼴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조조 스스로 자신을 제거하라는 밀칙이 ‘공식적’인 효력이 있음을 인정해버리는 꼴이 된다. 따라서 조조는 동승을 비롯한 동씨 일족만을 죽여 그 책임을 ‘동승’에게 한정시키고, 동승의 단독 범행임을 내세워 ‘정치적 타협’으로 내부 세력들을 무마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야 간신히, 유비 및 원소와 대결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조는 그 야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존을 위해 끝없이 황궁 내, 그리고 자신의 영내 귀족들과 타협하고 이해득실을 조율하며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수십 년을 분투해야 했다.
여기서 황궁의 구성원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존 낙양 및 장안 황궁을 채우고 있던 한나라의 귀족, 그리고 죽은 동탁의 세력에 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황궁이 조조의 세력권인 허도로 들어왔기에 많은 사람들이 조조가 마치 한의 조정을 흡수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조조의 세력이 한의 조정에 ‘편입’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러한 ‘편입’의 과정을 통해 조조는 자신과 휘하의 지위를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었고, 이렇게 ‘공식적’인 지위를 가졌기에 그는 ‘명분’을 확보하고 중원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편입’된 조조의 부하들이, 과연 결정적인 순간에 조조와 한 황실 사이에서 누구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순욱의 사례에서 보듯, 조조의 부하들 중 상당수는 조조가 지닌 무력과 그의 군사적 역량이 한나라 사회에 안정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전망으로 임관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조조는 엄밀히 말해 주군이 아니라 조정에서의 상급자이고, 어디까지나 주군은 황제인 유협이었을 것이다. 조조의 야망이 과연 권력자의 단계에서 머물렀는지, 아니면 자신의 왕조를 여는 데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조조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수십 년 동안 조정에서 한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서서히 증대시키기는 투쟁을 해야만 했다. 연의에서 표현하듯 하루아침에 뚝딱 절대적 권력을 쥐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황제 유협을 생각해보자. 그는 낙양 황궁에서 나서 자라고, 동태후와 하태후 간의 궁중 음모, 동탁의 권력 장악, 그리고 동탁과 반동탁 연합 간에 벌어진 내전 등을 겪었다. 동탁, 여포, 왕윤 등과 함께 궁정에 있었고, 동탁의 실각과 이각 및 곽사의 집권, 그리고 목숨을 건 탈출까지,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것이 열여섯 살 때까지 그의 삶이다. 생각해보면 소년 치고는 상당히 철이 들고 궁중 음모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며, 열아홉 살이 되자 조조 주살의 밀칙을 내릴 정도로 음모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게 발각된 200년에 황제는 스무살이 되었고, 조조의 나이는 마흔 여섯이었다. 곧 50대가 될 남자가 궁중에서 피튀기는 암투를 해야 할 상대는 정력이 넘쳐나는 스무살 청년이었던 셈이다. 당시 조비는 겨우 열네 살 소년으로, 처음 허도에 온 황제보다 두 살이 어렸다. 당시 한의 조정은 조조가 양날의 검인 황제의 권위에 의존하면서도 경계하고, 또 황제 역시 조조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는 선에서 견제하는 미묘한 균형 위에 성립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적으로 귀족층에 대한 회유와 타협을 거듭해야 했던 조조의 정권이 개혁적인 성격을 지닐 수 있었을까?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귀족 사회가 지닌 모순, 결국 난세를 불어온 폐단은 거의 개혁되지 않았다. 난세라는 환경이 귀족들에게 실력주의를 요구해 뛰어난 자만 살아남게 만들어, 귀족 사회의 수명을 조금 연장했을 뿐, 그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후한 시대의 모순은 둔전으로 대표되는 군사국가화, 엄격한 법치라는 탈을 뒤집어 쓴 공포정치, 그리고 촉한과 오라는 외부의 긴장요인에 의해 간신히 억눌려져 왔을 뿐이다. 결국 이 사회 모순은 긴장 요인이 사라지고 권력이 안정되어 실력주의가 요구되지 않는 시대가 오자, 통일 수십 년 만에 폭발하고 만다.
다음으로 조조의 권력 획득과 유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조조가 지닌 권력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무력이었기 때문에, 조조는 권력을 더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일정한 ‘군공’을 세워 황궁에 내보여야 했을 것이다. 이것은 같은 군사 지도자인 나폴레옹이나 카이사르에게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오십대 중반에 접어든 조조가 적벽까지 직접 원정을 나서야 했던 점,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한중으로 직접 나아갔던 점을 보면 이러한 특징이 좀 더 명확해진다. 한편으로는 조조 자신이 한나라 사회를 안정시킬 군사지도자임을 한의 충신들과 조정에 계속 나타내 보일 필요가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끝없이 조조 자신의 강성함과 건재함을 알려야만 했다.
군공으로 권력을 확보해야 했기에, 조조는 반드시 승리해야만 했으며, 승리에 대한 집착이 강했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가 전쟁에서 저지른 학살에는 바로 이러한 요인이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조조에게 패전이란 권력의 상실로 직결될 수 있는 요인이었기에, 적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지역에 대한 철저한 파괴, 다시 적으로 돌아올지도 모를 투항병의 학살이 이어졌던 것이 아닐까. 점령한 적의 성에 대한 학살도, 승전을 무색하게 만들지도 모를 반란을 예방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패전을 겪거나, 혹은 적이 우세할 때를 전후해서 일어나는 궁정의 음모는 그런 그의 성향에 기름을 끼얹었을 것이다.
또한 조조는 군사적 성과를 위해 자신의 동원력을 최대로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른 불만은 공포정치를 통해 잠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그의 권력 장악과 유지에는 일정부분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모든 강압적 수단이 그러하듯이 한계에 부딪힌다. 앞서 조조가 유지한 사회의 모순이 결국 서진 시대에 폭발한다고 말했지만, 그 이전에, 조조는 끝내 중국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조는 뛰어난 능력으로 중원을 정복하고 강남을 향해 진격하지만, 그 소득은 형주 북부를 얻는 데에 그쳤다. 조조의 정책은 단기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내는 데에는 적절했지만, 그러한 정책이 결국 한계를 보인 것이 바로 적벽대전이다. 유비 및 손권의 휘하에는 조조의 서주대학살 당시 피난한 인재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조조에게 원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조의 통치방식 그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강남에 이미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극렬한 저항으로 맞부딪혀 온 것이 ‘적벽대전’이며, 이 적벽대전은 조조 개인의 패배일 뿐만 아니라 조조가 펼쳐온 정책이 거부되고 패배한 전투라 볼 수 있다. 게다가 조조의 최대 장점인 군사적 역량도 여기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인간은 학습하는 생물이기에, 조조에게 계속해서 패배하면서 경험을 쌓아 온 사람은 그 패배한 경험을 통해 조조를 물리칠 방법을 연구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관도 대전과 그 이후 보여준 승전들 역시, 고스란히 조조의 전술을 연구하는 자료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유비와 손권 연합군이 자신들의 기반을 바탕으로 반격을 가하자, 조조는 끝내 무너지고 만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조조에 반대되는 유비 측 정책의 승리이기도 하다. 조조가 사회를 엄격히 통제하고 동원력을 높이는데 몰두했다면, 유비는 일단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망가진 경제와 사회를 복구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당연히 이런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는 기존 귀족 사회의 모순, 부정과 부패를 제거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단순히 조조는 무섭고 유비는 선량해서가 아니라, 일반 대중이 보기에 훨씬 더 살만한 곳은 유비의 영지였기에, 유비가 민심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유비의 이러한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조조처럼 폭발적인 군사력을 양성할 수는 없다는 단점이 있으나, 시간이 충분하고 배후가 될 지역이 넉넉하다면 장기적으로는 조조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러한 유비 정책의 승리는 신야 시대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해, 유비가 완전히 기반을 갖춘 입촉 이후에 빛을 발한다. 강압적으로 동원된 군대에 맞서, 생활이 안정되고 부정부패가 어느 정도 제거된 사회의 군대가 동원되었다. 비록 세력 기반이 없어 계속해서 도망쳐야 했지만, 그렇게 도망치는 와중에도 군의 핵심 전력을 유지하며 살아남은 장수들이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그 장수들은 수십 년 세월 동안 조조군의 전술을 철저하게 학습하고 대응책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한중전의 승리는 결코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촉한군의 기세는 형주의 상실과 이릉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꺾이게 되지만, 위나라 역시 이후 수십 년 간 촉한을 병합하지 못한다. 촉한이 병합되는 것은 219년 한중전 이후 44년 뒤인 263년의 일이다. 그 사이 위나라에서는 촉한과 오에 대한 원정을 말리며 ‘아직은 국력을 회복해야 할 때’라는 서술이 종종 등장하는데, 망가진 중원의 경제와 격감한 인구가 회복되어 마침내 촉한을 병합하는데 걸린 세월이 44년이나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황건의 난, 후한 사회의 모순도 한 몫 했겠지만, 조조 개인의 야심을 위해 천하가 희생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촉한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44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데에는 조조와는 반대되었던 유비의 정책, 그 정책을 계승한 제갈량의 안정적 정책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상당한 상상이 섞여 있기에 역사적으로 엄밀한 서술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껍질을 벗겨보면, 과연 <삼국지>가 냉혹한 개혁가 조조와, 그에 반발하며 한황실이라는 구세력을 재건하려는 유비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맞는지 의심해보게 된다. 오히려 구제도의 모순이 편승하여 강대한 세력을 차지한 조조와, 그런 그에게 맞서며 구제도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개혁가 유비의 대결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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