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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연개소문, 고구려의 마지막 희망을 짓밟다

by 루모로마노 2020.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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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개소문의 반란은 중앙집권화 개혁을 꾀하던 영류왕과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비극이라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마지막 방어 역량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려던 고구려의 미래를 가로막은, 철저히 사욕에서 비롯된 반란이었다.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대규모 회전인 주필산 전투를 살펴보자. 이때(645년) 고구려는 자국 역사상 최대 규모인 20만 대군을 동원하는 역량을 보여준다. 이 동원 역량은 집권한 지 고작 2년을 조금 넘긴 연개소문의 공로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영류왕 고건무가 평화를 지키며 618년부터 642년, 즉 25년에 걸쳐 국가를 개혁하고 내실을 다져가며 쌓아 올린 동원 역량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동원 능력은 내정을 안정시키면서 인구를 증대하는 한편으로,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 곳곳에 미쳐야 가능하다.

 귀족의 사병이 묵인되는 고대 국가에서, 특히 귀족끼리 궁궐 앞에서 내전을 벌이기도 했던 고구려 같은 국가는 이 과정에서 왕권 강화 정책이 필수적이다. 영류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사병을 혁파, 중앙군으로 그들을 대거 편입시킨다. 즉 고구려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동원한 20만 대군은, 25년이라는 기간 동안 영류왕이 귀족의 권력을 축소시키고 사병을 흡수하며, 국가의 행정을 강화한 결과물이다.

 그 흔적을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 동부(東部) 대인(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이 의당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모질다 하여 미워했으므로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귀족의 ‘세습’을 인정하지 않으려 고구려 중앙정부를 확인할 수 있다. 세습되지 않는 땅과 권리는, 당연히 중앙정부로 돌아온다. 이는 연개소문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라, 고구려 전체, 영류왕 치세 25년에 걸쳐 차근차근 진행됐을 것이다. 만약 영류왕이 시해되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더 많은 시간을 벌고, 고구려의 중앙집권화 개혁은 완료되어 다가올 당나라와의 전쟁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그 직책을 맡겨보았다가 만약 옳지 못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직위에서 폐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노라”라며 ‘머리를 조아려 여러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간청’했다. 이는 연개소문이 왕에게 대항하지 않고 세습 귀족이 아니라 한 명의 ‘관료’로 편입되겠다는, 일종의 항복 선언이다.

 그러나 이렇게 영류왕에게 항복한 이후에도 연개소문은 귀족적 야심을 버리지 못한듯 하다. 열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개소문은 아버지의 직위를 잇게 되자 흉포하고 잔인하기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이므로

 즉 영류왕은 피를 흘리기보다는 귀족을 중앙관료로 흡수하는 방식의 온건한 개혁을 시도했으나, 개소문은 세습되는 가문의 권리를 지키려 했던 것 같다. 이에 영류왕 25년(642년) 1월, 영류왕은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 감독’ 명령을 내린다.

 앞서 연개소문이 이어받은 자리가 ‘동부 대인 대대로’임을 생각해보자. 천리장성은 고구려의 ‘서쪽’ 국경이다. 즉, 영류왕은 일단 연개소문을 지역 기반에서 멀리 떨어지게 만듦으로써,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했던 것 같다.

 혹자는 연개소문이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한 ‘강경파의 거두’인 양 말하지만, 연개소문은 천리장성 축조 감독직을 고작 9개월 정도 수행했을 뿐이다. 이후에도 말하겠지만, 연개소문의 정책은 소신 있는 강경파와는 거리가 멀며, 연개소문과 영류왕의 대립도 강경파와 화친파의 대립이라고는 절대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어쨌든 영류왕이 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맡긴 게 그를 제거하려는 의도였다는 것 역시, 연개소문 열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러 대인들이 왕과 은밀히 의논해 죽이고자 했는데 그 일이 누설되었다.

 즉 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맡겨 일단 그 세력으로부터 떨어뜨려 놓고, 제거한 뒤, 그의 사병이나 동부의 역량을 모조리 중앙정부로 흡수할 계획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영류왕의 이러한 계획은 누설되었고, 연개소문은 선수를 친다.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맡은 그해(642년) 겨울, 10월이었다.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벌여놓고 여러 대신들을 초대해 함께 보자고 하였다. 손님들이 이르자 다 죽여버렸는데 무릇 1백여 명이었다. 다시 말을 달려 궁궐에 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그 몸을 몇 동강으로 잘라 도랑 가운데 던져버렸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볼 게 있다. 일단 왕의 시체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미 죽은 사람의 시신을 토막 내서 공개된 도랑에 던져버렸다는 것은, 정통성이 없는 연개소문이 국내에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의도도 있지만 연개소문 자신의 ‘원한’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류왕과의 갈등이 강경 대 화친이라는 정책 대결이 아니라, 제거하느냐 제거당하느냐의 싸움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연개소문에 의해 살해당한 100여 명의 손님들.(『일본서기』는 180명으로 두 배에 가깝다) 이들 중에는 단순한 정부 관리뿐만 아니라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했던 역전의 노장들, 그들과 영류왕이 양성했고 향후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할 수도 있었던 실력 있는 장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살해당한 직후에, 연개소문은 궁으로 달려가 왕을 시해하기 때문이다.

 이때 별달리 왕이 저항했다는 기록도 없고, 연개소문의 반란 과정에서 먼저 100~180여 명의 손님들을 죽여야 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들이 왕을 지켜줄 ‘군사지휘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연개소문은 정면에서 왕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할 자신은 없으니 일단 이렇게 기습적으로 유능한 장수들을 처단하고 그 다음에 궁궐을 친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훗날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졸전의 원인이 된다. 마치 스탈린의 대숙청 과정에서 유능한 장교들이 처형되자 이후 독소전쟁 초반에 소련군이 졸전을 면치 못한 것과 같다.

 연개소문은 반란으로 집권한 약점을 ‘승전’으로 보완하기 위해 신라를 치지만 결정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한 채 이중전선만 만들어 버렸고, 수나라의 공격에도 굳건했던 요동 방어선, 이후 제대로 작동해야 할 천리장성의 여러 성들도 당나라의 공격에 무너져내렸다. 앞서 언급했던 20만 대군을 동원한 주필산 전투도 패배했다. 이들을 지휘해야 할 유능한 장수들은 모조리 연개소문이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642년까지 을지문덕이 노장으로 생존해 있었다면, 을지문덕 역시 연개소문의 손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혹은 을지문덕이 그 전에 사망했더라도, 을지문덕 및 고건무(영류왕)와 함께했던 젊은 장수들, 세월이 흘러 중진이 된 장수들도 모조리 죽었을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영류왕은 살수대첩 당시 을지문덕과 함께 유인 및 격멸 전술로 맹활약한 고구려의 장수였다. 아마도 613년 요동성 및 압록수 전투, 614년의 비사성 방면 전역에서도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가 25년에 걸쳐 양성한 장수진이 연개소문의 손에 떼죽음을 당했다.

 영류왕이 만들어 둔 중앙정부 시스템을 흡수했으니 연개소문 역시 병사 20만은 동원했을 테지만, 이들을 지휘하기로 되어 있던 장수들이 없으니 어찌 졸전을 면하겠는가. 게다가 연개소문에게 굴복하지 않은 안시성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리장성의 체계적 방어 시스템도 연개소문의 손으로 망쳐버렸다. 왕과 중앙정부의 통솔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할 천리장성의 각 요새들이 손발이 맞지 않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혹자는 영류왕이 당나라에 봉역도를 바치고, 당나라 사신이 마음껏 국내를 둘러보고 간 탓에 이런 패배를 겪었다고 하지만, 이는 기록을 조금만 살펴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영류왕이 당나라에 봉역도를 바친 것은 영류왕 11년(628년)의 일이다. 당나라는 봉역도를 보았음에도 영류왕이 굳게 지키는 동안 감히 고구려를 넘보지 못했다. 당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기까지는 영류왕이 죽고도 3년이 지나야했다. 그 기간이 17년이나 된다. 왜일까?

 바로 영류왕 자신의 군사적 역량과, 고구려의 방어를 주도하는 장수진들 때문이었다. 당나라에서 고구려 원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영류왕이 죽고 나서다. 아마 당태종 이세민은 겉으로는 연개소문을 비난해도, 속으로는 연개소문에게 무척 고마워했을 것이다. 뛰어난 왕과 그 군사지휘관들은 연개소문이 알아서 제거해주다니!

 봉역도는 사실 그렇게 큰 쓸모는 없었다. 왜냐하면 천리장성을 중심으로 한 요동 방어선은 그 후로도 계속 ‘업데이트’가 되었으니까. 영류왕이 죽기까지 14년간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거친 방어선인데, 14년 전 자료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또 14년의 업데이트를 거친 최신 방어 시스템을 갖추었다 해도, 그걸 운용할 유능한 인재들이 죽고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혹자는 경관(京觀)을 허물어버린 일을 두고 영류왕이 나약했다고 하지만,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영류왕에게 쓸데없는 도발은 피해야만 할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탑 따위가 전투에서 무슨 활약을 하겠는가? 영류왕은 지극히 합리적인 전략가였다.

 당나라 사신 진대덕은 고구려를 보고 돌아가 고구려가 당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한다고 했지만, 영류왕이 진대덕을 대접할 때 ‘병사들을 장대하게 세우고’ 대접했다는 걸 잘 살펴야 한다. 진대덕은 철저하게 정비된 병사와 유능한 장수들, 그리고 어마어마한 방어 시스템을 보고 돌아갔을 것이다.

 

​ 만약 진대덕의 염탐이 우리에게 치명적이었다면, 그는 당태종 앞에서 "고구려의 약점이 이러저러하니 도모할만 합니다"라고 했으리라. 그러나 진대덕은 그러지 않았다. 진대덕은 고구려가 당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한다, 즉 "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회적인 표현으로 당태종의 위엄을 지켜주지만, 결론은 전쟁을 말리는 것이다.

 진대덕은 수나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당나라 역시 고구려와 괜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지 못하게 태종을 만류하려고 저런 말을 했다. 태종 역시 허세를 부리긴 했으나, 국력이 회복되지 않아 고구려를 칠 수 없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원정 불가’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 판단은 '영류왕이 죽기까지 유지'된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임금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살필 때는, 연개소문이 아니라 '시해된 임금'에 주목해야 한다. 영류왕이 죽고서야 당태종은 "해볼만 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만약 영류왕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리하여 고구려의 중앙집권화 개혁에 성공했다면 고구려는 더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풍파를 견딘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여 한반도 통일을 달성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고려인(광개토왕 혹은 장수왕 때부터 고구려는 국호를 고려로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라 칭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나는 우리 역사의 가장 뼈아픈 분기점이 바로, 한 역적의 야심이 망쳐놓은 바로 이 사건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

하굣길에 우연히 마주친 소녀는, 암살 시도를 피해 도망친 국가원수 미리안이었다. 소년 주견하는 도와 달라며 내민 소녀의 손을 잡았지만, 음모에 휘말리며 부모를 잃고, 복수를 위해 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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