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링크의 글을 보고 든 짧은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이라 훗날 쓰게 될 대체역사소설에 적용하는 것 외의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윗글을 보고 펼쳐본 상상은 이러하다. 만약 일본 고대, 중세의 많은 관습이 한반도의 삼국과 닮았고, 이 중 천황의 지위와 대우에 대한 것도 삼국, 특히 고구려를 닮았다면 어땠을까.
윗글의 일본 천황처럼 고구려의 태왕은 이른바 ‘천손’이라 하여 신의 자손으로 간주된다.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대를 지나면서, 특히 장수왕 시대에 평양천도를 비롯한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고구려의 ‘태왕 신격화’ 역시 그 정도가 깊어졌던 것 아닐까?
태왕이 함부로 말을 탈 수 없고, 지면을 밟고 걷는 것도 꺼렸고, ‘종교적으로 정갈한 음식’을 먹느라 영양 상태도 나빴다면, 자연히 유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상당한 기력을 요하는 정치 행위에 힘을 쏟기 어려워진다는 의미이며, 곧 왕권의 하락까지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태왕의 유약함과 왕권의 하락은 ‘추군과 세군의 내란’과 같은 사건을 통해 드러났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영양왕의 사례에서 보듯이 고구려 후기 태왕이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일도 있으므로, 일본 천황처럼 엄청난 금기들을 떠안은 종교적 존재까지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주몽과 유화부인을 정점으로 하며,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통해 드러나는 독특한 종교의 국가였다는 점은 확실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로도 이 종교는 일본 내에서 신토와 불교의 관계처럼, 중국에서 도교와 불교의 관계처럼 공존하지 않았을까.
고구려의 고유 종교에 주목한다면, 영류왕 7년과 8년, 보장왕 2년의 도교 도입 노력을 조금 달리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전에 나는 ‘황제’란 ‘삼황오제’에서 비롯된 도교적 호칭이며, 따라서 독자적 세계관을 갖춘 한반도 국가들은 오래도록 황제라는 칭호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식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는 근현대 일본에서도 나타나는데(『미완의 파시즘』), 천황의 황(皇)을 白+王의 조합으로, 즉 ‘하얀(白) 왕(王)’, 그만큼 존귀한 군주로 설명하려 하면서 ‘삼황오제’와는 거리를 둔다.
고구려에서도 마찬가지로 ‘왕들의 왕’에 대한 표현은 ‘태왕’으로 이미 충분했다고 본다. 따라서 고구려가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페르시아가 임페라토르가 아니라 ‘샤한샤’라는 독자적 표현을 쓴 것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추측했었다. 페르시아가 로마의 세계관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듯, 고구려도 삼황오제의 세계관을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즉 어떤 이들이 이야기하듯 도교의 도입은 고구려 내 다양성의 증대나 불교의 견제 같은 문제 이전에, 고구려인 고유의 ‘세계관’을 포기 또는 양보하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전면적으로 주몽과 유화부인을 폐기하는 건 아니고, 다신교적인 방식대로, 도교의 만신전에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수, 당에서 도교의 성행은 그만큼 ‘삼황오제’의 적통을 잇는 황제의 신격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까. 고수전쟁, 고당전쟁이 국제질서나 실리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러한 종교적 세계관의 충돌이라는 측면이 있었다면, 고구려의 도교 도입은 중화의 ‘황제 중심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전쟁을 종식하자는 제스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장왕 2년, 연개소문의 도교 도입은 여기에 다른 의미를 더해볼 수 있다. 연개소문 본인이 ‘천손’을 죽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반란 직후의 연개소문은 고구려 세계관 내에서는 ‘하느님 자손의 피를 손에 묻힌 자’가 된다. 이를 벗어나려면 하느님의 자손을 ‘인간으로 끌어내릴’ 필요가 있다.
전에 나는 영류왕이 고구려를 봉건 국가에서 관료 국가로 개편하고(연개소문의 연태조 작위 계승 거부, 연개소문의 영지를 강제로 동부에서 서부로 옮김),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과정에서 연개소문에게 당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과 오늘의 글을 이어서 생각해본다면, 역시 연개소문에게 ‘자주성’이라든가 ‘구국의 맹장’같은 칭송은 너무 과분하다. 나는 그를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을지문덕 및 영류왕 고건무가 양성한 수많은 인재들을 살해했고, 나라를 내분으로 몰아넣어 방위체계를 엉망으로 무너뜨렸으며, 영류왕이 이십 년 넘게 구축한 국가의 대규모 동원 역량을 주필산 전투로 증발시킨 역적으로밖에 그려내지 못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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