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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

사이토 아유무, 『쿠로노 전기』 1권

by 루모로마노 2020.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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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300쪽 분량의 책인데, 구입한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아 단숨에 읽어내려간 책은 정말 오랜만이다.

중세풍의 어두운 세계관을 무대로, 세상의 어두운 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보이면서도, 또 거기서 주인공이 자그마한 희망을 일궈나가는 모습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흔히 ‘다크 판타지’라고 하면 음울한 분위기의 세계관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작가 사이토 아유무는 여기서 작가들이 흔히 빠지는 실수를 교묘하게 피했다.

다크 판타지를 쓰든 뭘 쓰든 일단 소설은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소설의 기본이며, 이른바 ‘순수소설’이라는 소설의 사생아들이 사멸해가는 것은 이 기본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크 판타지를 쓰겠다는 많은 작가들은, 자기가 재미있게 읽었던 해외 다크 판타지 작품의 세계관과, 분위기를 자기 작품에서 구현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자기가 감명 깊게 읽었던 분위기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 작품이 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끌어나갔는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작품들이 설정놀음을 일삼거나, 폼만 잡다가 망하고 만다. 그러면서 ‘독자가 수준이 낮아서……’ 운운하는 것이다.

작가가 자기 작품에 자부심을 가진다면 자기 작품의 성패에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실패는 ‘일단은’ 작가 탓이다.

다시 『쿠로노 전기』로 돌아와서, 이 작품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함정을 벗어났다. 하나는 주인공 쿠로노의 캐릭터 형성 측면에서, 다른 하나는 여성과의 관계 측면에서다.

나는 답답할 정도로 도덕적인 캐릭터도 싫어하지만(하지만 답답함을 넘어 어떤 숭고한 신념으로 화하는 주인공은 무척 좋아한다. 페이트 시리즈의 에미야 시로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기 잇속만 챙기면서 ‘손해보기 싫다’는 핑계로 ‘배려’를 잃어버린 주인공도 싫어한다.

이건 쿨한 게 아니라 그냥 찐따일 뿐이다. 내가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라는 작품은 좋아하지만, 주인공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격이 파탄난 찐따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 인간한테 ‘너무 위대한 이야기’가 맡겨졌다고 해야 할까.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둠의 실력자가 되고 싶어서!』 2권도 비슷한 문제 때문에 사놓고도 읽기를 망설이고 있다.

물론 적들에 대해 가차 없어야 할 필요도 있긴 하지만, 때로는 자비나 도덕, 도량, 선량함 등도 필요한 법이다. 주인공 쿠로노는 이런 점들을 갖췄다. 모든 노예를 해방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기 영지 내에서 도망친 노예들을 ‘구입’해서 보호해주는 현실적인 자비심은 있다. 노예상인들을 습격해 노예를 해방해 온 용병 케인을 자신의 부하로 삼을 도량도 있다. 오랜만에 정말 마음에 드는 주인공이다.

여성과의 관계 측면에서 보자면 상당히 현실적인 정신적-육체적 교류(나는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섹스가 단순히 성욕의 만족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보듬어주고 위로하는 과정상에 놓여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을 단순한 에로틱 판타지가 아니라 주인공의 ‘삶’을 그려내는 작품으로 거듭나게 한다.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권 내에서 쿠로노가 성관계를 맺는 사람은 하프엘프 미소녀 ‘레이라’와, 여관 안주인에서 주인공(후작으로 출세한다)의 요리사가 되는 ‘셰라’, 이렇게 두 사람이다. 전자는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는, 사춘기의 열기로 맺은 관계가 점차 ‘마음’을 담은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는 주인공이 남자로서 지니는 보호본능을 충족하게 된다. 후자는 어른 대 어른의 성관계, 그러면서도 연상의 여성 쪽이 리드하는 성관계를 보여준다. 이는 모성적 포용을 받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만족시켜 준다.

이 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남성 독자는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과 보호받고자 하는 욕구 모두를 충족한다. 즉 상업적인 성공도 충분히 내다볼 수 있게 되는 한편으로, 정말로 이런 경험들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서로의 체온이 정신적인 위로를 전달해주는 ‘삶의 한 모습’까지 구현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는 이런 측면에서 철저하게 실패해 굉장히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역사소설은(대체역사소설까지 포함하여) 지도를 늘려나가는 작업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그려내는 작업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나부터.

요즘 참 2권이 기대되는 작품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이건 정말 많이 기대된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번역 오류가 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70쪽,

‘그의 화살이 어깨에 꽂혔다.’

이 문장은 문맥상

‘그의 어깨에 화살이 꽂혔다.’가 맞다. 그=케인이 리크의 화살을 맞는 장면이니까.

그 외에도 35쪽,

‘머리 위에서 통나무에 떨어져 찌부러진 것이다’라는 문장은

‘머리 위에서 통나무가 떨어져 찌부러진 것이다’로 바뀌어야 한다.

어순이나 조사의 쓰임에서 자잘한 오류가 좀 있는데, 이런 점들만 개선한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를 생각하더라도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

하굣길에 우연히 마주친 소녀는, 암살 시도를 피해 도망친 국가원수 미리안이었다. 소년 주견하는 도와 달라며 내민 소녀의 손을 잡았지만, 음모에 휘말리며 부모를 잃고, 복수를 위해 전장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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