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합니다.
얼마만큼 존중해야 하냐면, 당신과 당신의 작품이 존중받고 싶은 만큼 존중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BL을 좋아한다면 당연히 다른 이가 좋아하는 로맨스 장르도 존중해야 합니다. 당신이 판타지를 좋아한다면 누군가의 GL취향도 존중해야 합니다.
존중하라는 말은 좋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최소한 위 사진과 같은 짓거리를 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위 사진은 최근 트위터에서 화제가 된 것입니다. 어떤 늙은이가 자신의 자신의 편견을 실컷 드러낸 글귀이지요.
여기서는 타인의 작품, 타인이 좋아하는 작품을 굉장히 모욕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친것들, 저질, 왜쪽바리, 쓰레기보다 못한 것들, 더러운 것들”…… 이런 건 비판도 무엇도 아닙니다. 타인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겠다는 추잡한 의도만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만, 저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특히 더 웹소설 작가 지망생분들은 타인의 취향을 존중했으면 합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차근차근 살펴봅시다.
첫째로 소설가는 사람을 관찰하고 그 모델을 탐구하여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어찌 비웃음 한번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마는…… 비웃음으로만 일관한다면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타인을 존중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다양한 유형의 캐릭터, 생동감 있는 캐릭터는 타인을 비웃기만 해서는 나오기 힘듭니다.
둘째로 소설가는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배울 것은 세상에 넘쳐나고, 사람의 시간과 체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하는 것들만 탐구하면 오히려 편협해질 수 있습니다. 지혜는 의외로 선현의 저서가 아니라 지나가다 읽은 잡지에서 나오기도 하니까요.
이런 지혜를 하나라도 더 많이 건지려면 최대한 문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지혜는 완성되었고 문은 닫아도 된다’는 사람이 주변에 보인다면 멀리하십시오. 그런 사람은 당신마저 무지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갈 사람입니다.
저는 라이트노블만 읽는 지망생이 조언을 구하면, 하세쿠라 이스나가 그러했듯 “라이트노블만 읽고 뭔가를 쓰려고 하지 마라”고 합니다만, 반대로 라이트노블을 전혀 읽지 않았다면 라이트노블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권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웹소설은 옛 시대의 여러 장르소설에도 뿌리를 두고 있지만, 동시에 한국 라이트노블을 정착시키려 했던 수많은 노력들에도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연리지처럼 말입니다.
이른바 ‘사이다’라고 하여 통쾌함을 주는 전개 방식이 대여점 시대 판타지 소설에서 왔다면, ‘캐릭터’를 중시하고 그 캐릭터가 부각되는 ‘표지’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라이트노블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우리는 거인 한 명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가 아니라, 수많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입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으로 유명한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작가 조지 R.R. 마틴은, “어떻게 하면 당신 같은 작가가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쓰레기’라 부르는 것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쓰레기’의 범주는 단순히 취향이 아닌 것을 넘어선 것입니다. 아동청소년들에게 보여주기엔 ‘유해’하다거나 ‘교육에 좋지 않다’고 거부된 것들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소설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학교에서 읽으라고 하거나 부모님이 읽으라고 했던 책을 제외하고, 제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독서 경험은 트리거소프트의 게임 <장보고전>입니다.
독서 경험이 게임에서 시작되었다니? 의아하신 분도 많을 겁니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게임이 공부와는 거리가 먼 분야라고 인식했으니까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저는 <장보고전>을 하다가, 부모님을 졸라 파랑새어린이에서 펴낸 장보고 위인전을 집어 들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자발적 독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게임의 광고 문구, ‘『삼국유사』에 전하는 대룡취월도의 비밀’을 보고 『삼국유사』 독서를 시작했네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해리포터』 1~3편, 『반지의 제왕』 등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다 중학교로 넘어가고부턴, 처음으로 라이트노블을 접해서 읽기 시작했죠.
그때 처음 읽은 작품이 시구사와 케이이치의 『키노의 여행』 시리즈, 카도노 코우헤이의 『부기팝』 시리즈입니다. 아,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도 빼놓을 수 없겠군요.
뭐 다른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만, 이후 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가고, 군대를 전역하고,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국어교육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기까지 저의 라이트노블 독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멈추지 않았죠.
여기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국어국문학과를 다닐 때, 장르소설, 특히 라이트노블을 읽는다며 비웃음을 던지는 사람들이 몇 있었습니다. 그렇게 비웃는 사람들은 이른바 순문학 작가를 하겠다는 분들이었는데, 애석하게도 그중 소설가가 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대략 이런 느낌으로 말입니다.
하세쿠라 이스나가 했던 “라이트노블만 읽고 라이트노블 쓰지 마라”는 말은, 이렇게도 바꾸어서 할 수 있습니다.
“순문학만 읽고 문학 하지 마라.”
열심히 순문학 작품들‘만’ 판 결과, 그들은 성장하지 못했던 겁니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말입니다.
오히려 그런 순문학 작품들은, 제가 라이트노블이 순문학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직접 보고 확인하려고 열심히 그런 책들을 읽는 바람에 오히려 몇몇 도움을 주었습니다. 오기로 가득 차 했던 그 독서는 제가 적어도 허술하지 않은 문장을 쓰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외에는 순문학 작품들에 빚진 바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당시 저와 같은 해에 모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사람 중 ‘소설’을 업으로 삼은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뭐 이런 이야깁니다. 타인의 취향을 비웃고 말고는 결국 개인의 자유지만, 그런 인간들은 절대로 작가가 될 수는 없을 거라는 말이죠. 결과가 보여주는 냉혹함입니다. 비웃기‘만’ 하는 사람은 배우지 못합니다. 배우지 못하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좀 덧붙여보겠습니다.
청소년의, 혹은 한국인의 독서 실태를 개탄하는 이를 볼 때마다, 저는 그들이 문제의 초점을 완전히 잘못 맞추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의 독서가 게임이나 라이트노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뿌리에 두고 파생됐듯이, 독서는 한순간에 청소년 필독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취향과 취미로부터 서서히 확장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청소년의 독서량이 저조한 이유는(만화와 웹툰, 웹소설로 확장했을 때도 과연 저조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취향을 비웃고 짓밟은 인간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경험입니다. 어떤 교사가 『람세스』라는 책을 읽고 있는 한 친구를 비웃은 일이 있습니다. 아마 람세스가 뭔지도 모르고 그랬을 겁니다. 그 교사가 정의 구현을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애석하게도 비웃음을 당한 그 친구의 독서량은 이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석사 논문을 쓸 때 저는 이런 실태를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이는 실제로 10대 여성 장르소설 독자들이 많은 좌절을 겪는 부분입니다. 이들은 이른바 ‘팬픽’이라는, 독서를 넘어 창작의 길로 나서는 첫걸음까지 옮깁니다.(저도 『룬의 아이들』과 『세월의 돌』 팬픽으로 소설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창작의 새싹들이 자라기도 전에 짓밟는 이는 다름 아닌 ‘바른 독서 습관’을 들이려는 어른들입니다. 부모일 수도 있고, 교사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저는 교사의 책임이 무겁다고 봅니다.
심한 비약이 될 수도 있지만, 청소년 독서량 저조의 가장 큰 원인은 그걸 우려하는 현직 교사들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만일 뜻있는 교사들이 그 큰 잘못을 깨닫고 고친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고 소위 자신의 ‘교육철학’만 고집하는 교사가 있다면, 시급히 교단에서 끌어 내려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결과가 바로 아래의 비극입니다.
자격 없는 교사가, 다른 사람의 취향에 대한 존중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늙은이가 청소년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가,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동시에 언젠가는 후배 작가가 되었을 지도 모를 한 아이가 짓밟힌 사건입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도 '존중하지 않는 이'에겐 절대로 존중을 돌려주지 않습니다.
사람 대접을 받고 싶거든 사람답게 행동해야 하는 법입니다.
셋째로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소설가는 독자와 상호 존중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존중은 양방향적이고 동시적이어야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여기에도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드릴 이유는 ‘악(惡)은 양방향적이고 동시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 되겠습니다.
흔히들 이를 악순환이라 합니다.
저는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는 이른바 ‘악플러’가, 반드시는 아니겠지만 높은 확률로 ‘존중받은 경험의 부족’을 통해 탄생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작가가 되려는 이는 이 악순환을 끊으리라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웹소설을 쓰려는 분들은 누구나, 타인에게 자신의 취향을 인정받지 못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비웃음를 사고, 또 꿈을 짓밟혀 본 경험도 있겠죠. 그런 상처가 있는 사람들 모두가 서로의 어깨를 부축해주고 서로 위로해주진 못할망정, 내 취향은 고귀하고 너희 취향은 천박하다 손가락질 한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존중받고 싶은 만큼 존중하십시오.
어떤 작가가 독자들의 작품 취향을 비웃고, 그 독자들에게 어쩔 수 없이 타협해서 써 준다는 생각을 품는다면, 악플러 탄생의 악순환은 절대로 끊기지 않습니다. 독자분들께도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주길 호소할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 블로그에 쓰는 이 글은 작가지망생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만큼, 이렇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잘하지 못하는 것을 잘난 척 떠드는 것 같습니다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제대로 해내길 바라기에, 그 누군가에 저 또한 들길 바라면서 이렇게 글을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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