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흉노 유표는 삼국지를 찢어

어부라 - 유표 - 유연의 계보에 대한 생각

by 루모로마노 2024. 11. 18.
728x90
반응형

정재훈은 『흉노 유목제국사 : 기원전 209~216』 및 「曹魏, 西晉時期 幷州 匈奴社會 -五胡十六國의 前奏曲-」에서 흉노 좌현왕 유표(豹)가 남흉노 선우 어부라와 이어지는 계보가 맞는지 의심했다.

이러한 의심의 이유로는 유표의 활동 연대가 지나치게 늘어진 점, 조조의 병주흉노 5부 개편이 실상은 서진 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일단 조조의 병주흉노 5부 개편은 확실히 서진 시대의 일이고, 조조 당시에는 6군 분할 배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병주흉노 5부 개편(실상은 6군 분할) 당시인 216년 유표의 좌부수 취임은 매우 의심된다 할 수 있겠다.

정재훈은 유표와 유연의 부자 관계는 확실하다고 본 듯한데, 이에 따라 251년 유표의 흉노 재통합 시도와 279년 유표의 사망, 유연의 계승 등의 정황을 따져 유표-유연 부자가 병주에 신설된 신흥군 출신의 세력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또한 정재훈은 195년 유표의 좌현왕 취임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본 듯한데, 195년에 유표가 20세라면 유연이 태어난 251년 무렵에는 80에 가까운 나이가 되기 때문이다. 279년에 사망했다고 보면 100세가 훌쩍 넘어간다.

정재훈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지 않더라도 무척 의심스러운 것은 확실하다.

 

반면에 장진퀘이는 『흉노제국 이야기』에서 유표와 유연 사이의 계보를 의심했다. 유연은 도각흉노(도객/휴저도각/휴저각호)의 지도자이며, 이 휴저도각은 전한 시기 항복한 휴저왕(휴도왕)의 잔여 세력이지 일축왕 비의 남흉노 계통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나 역시 정재훈의 의견보다는 장진퀘이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데, 정재훈의 의견대로 195년 유표의 좌현왕 취임을 의심할 경우, 195년 삼보의 난으로 흉노에 약탈당해 유표의 첩이 되는 채염의 존재가 붕 뜨기 때문이다.(『후한서』 「동사처채염열전」)

즉 채염의 존재로 교차검증되는 좌현왕 유표의 195년 무렵 행적, 『삼국지』 「등애전」에서 등애의 상소에 따른 251년 무렵의 행적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조작된 쪽은 279년 유표-유연의 계승 관계이지 않을까. 물론 조작의 당사자는 한(전조)을 건국하여 왕조의 신화를 날조할 필요가 있었던 유연 본인일 테고 말이다.

(*게임 삼국지13은 장진퀘이의 설 쪽에 가까우면서도 유연의 부친임을 인정하는지 유표의 생몰년을 173~252로 설정했다. 반면 최근 발매된 삼국지8 리메이크는 유표의 279년 사망 및 유연의 계승설을 받아들여, 279년에 게임 시스템 상 수명 한계인 99세가 되는 181년을 유표의 생년으로 설정했다. 이로 인해 184년 시나리오에서 유표의 나이 4세, 채염의 나이 17세라 둘의 결혼 관계가 그려지지 않는다. 채염이 조조에 의해 돌아오는 이벤트는 따로 '흉노대장' NPC를 설정하여 진행된다)

그 외에도 나 개인적으로도 유표의 행적에서 의심스러운 정황을 몇가지 들고 싶은데,

첫째, 어부라 사후(195년 이후), 선우를 계승한 숙부 호주천 및 우현왕 거비와의 행적이 따로 논다는 점.

둘째, 아무리 변방이라고는 해도 251년 무렵, 위진(魏晉)의 간섭을 벗어난 유표에 의한 흉노의 재통합이 가능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정황에 대해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하고 싶은데,

195년 이후 유표는 호주천, 거비와 결별하여 남흉노 고지(故地)로 돌아가 남은 흉노를 통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195년 헌제의 장안 탈출 과정까지는 호주천, 거비, 유표가 모두 헌제를 도운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사건을 전후한 무렵에 어부라가 사망하고, 어부라의 흉노선우 자리는 동생 호주천이 계승한다. 이 이후로 호주천과 거비는 조조 또는 원소, 원상, 고간 등과 협력하는 행적을 보이나, 유표의 행적은 뚝 끊겨버린다.

다만 195년 장안에서 납치한 채염을 첩으로 삼은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이 채염을 돌려받을 때 조조가 보인 행동이 조금 이상하다. 사자를 보내 금은보화를 바치고 채염의 몸값을 치렀다는 것이다.

우현왕 거비를 통제 아래 두고, 선우 호주천을 업에 가둬둘 정도로 위세가 높았던 조조가 사신을 보내 몸값을 치르고 채염의 해방을 청한다? 채염은 12년을 흉노 땅에 있었다고 하니 207년 무렵, 그러니까 조조가 원소의 아들 원상, 오환의 답돈을 격파하고 형주 원정을 준비하며 한창 기세가 높을 시절의 일인데 말이다.

여기서 일단 어부라가 망명하게 된 상황, 호주천의 계승 전후의 상황을 다시 살필 필요가 있다.

어부라와 호주천의 아버지, 강거 선우는 188년 남흉노 내부의 반란으로 사망했다. 이후 어부라는 사예 하동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데, 189년에 남흉노 내 반란의 우두머리가 사망하자 다시 돌아가려 했으나 고지의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195년 호주천의 계승까지도 이어져, 호주천은 하동군 평양현에 머무르게 된다.

나는 195년 어부라의 사망 직후 호주천의 선우 계승에 유표가 불만을 품고 흉노 고지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가정해본다.

「동사처채염열전」에 따르면 채염이 끌려간 곳, 즉 유표의 영지는 호지(胡地)다. 반면 호주천의 업 억류 이후 흉노에 대한 표현은 병주호, 즉 병주의 흉노로 표현이 약간 다르다.

게다가 우현왕 거비에 대해 살펴보면 좌현왕 유표와 호주천 계통은 '다른 것'처럼 취급된다는 느낌을 준다.

장진퀘이는 우현왕 거비에 대해 기존의 계보, 즉 어부라와 호주천의 아버지 강거의 동생이라는 설을 거부하고, 어부라의 아들로 본다. 강거의 아버지가 늦은 나이에 거비를 보았을 수도 있지만, 나는 장진퀘이가 추측 쪽에 좀 더 기울고 있다. 훗날 나라를 세우는 혁련씨가 자기네 조상인 거비의 계보를 유표보다 윗선인 강거의 동생 쪽으로 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거비의 후손들과 거비의 활동 연대를 생각해 보아도 이쪽이 더 신빙성이 있다.

우현왕 거비는 195~196년 헌제의 장안 탈출과 조조의 허 천도까지 협력하는데, 이때의 인연 덕인지(그리고 선우 호주천이 원소 쪽으로 선을 잘못 탄 탓인지) 호주천을 대신하여 병주흉노를 다스릴 인물로 지목된다.

이후 251년 무렵, 어떻게 가능했는지 여전히 의문인 유표의 흉노 재통합에 대해 등애는 거비의 후손을 내세워 유표의 세력을 견제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정재훈의 의견을 참고하여 유표가 216년 조조의 5부 흉노 좌부수로 편입되지 않았다고 본다면,(애초에 5부 흉노가 서진 시대의 일에 대한 착오라면) 251년 유표가 통합한 병주 흉노는 위진(魏晉)의 통제 바깥에 있는, 「동사처채염열전」에서 표현한 '호지(胡地)'의 흉노가 아니었을까?

요컨대 189년 어부라 때는 불가능했지만, 195년 삼보의 난에 따른 관중 지역 약탈을 통해 어느 정도 재화를 확보한 유표는 옛 땅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향후 수십년 간 흉노 재통합을 노렸다는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듯하다. 반면 유표와 이런 식으로 대립하게 된 데다 거비 또한 독자적인 세력으로 움직이게 된 호주천의 세력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어 『후한서』 「남흉노열전」의 표현대로 옛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 게 아닐까.

만약 215년 1월의 병주군현(삭방, 오원, 운중, 정양, 상 등) 철폐가 조조와 유표 사이에 일종의 협약 같은 것이었다면, 조조의 216년 5부 흉노 재편은 흉노의 6군 분산 배치와 215년 병주군현 철폐의 기억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삼국지』 「등애전」의, 유표에 대해 거비의 후손을 보내 대항시키라는 주장은 조금 다르게 읽힌다. 흉노 고지, 즉 호지에서 유표가 흉노 세력을 통합하자 병주흉노 역시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고, 이를 통제하고자 거비의 후손을 이용했다면 「등애전」의 내용대로 흉노가 둘로 나뉘어 대립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동흉노와 서흉노의 대립, 남흉노와 북흉노의 대립이 이와 비슷한 양상이기에, 위와 진 역시 같은 정책을 써 호지흉노와 병주흉노를 대립시켰다고 가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유연과 그가 조작했을(지도 모르는) 계보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유연은 장진퀘이의 말처럼 휴저각호의 우두머리일 수도 있고, 정재훈의 말처럼 신흥군의 흉노 세력일 수도 있으며, 둘 다 일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유연이 거비 계통과 대립했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위와 진에 복종하는 거비 계통'과 대립하여 '새로운 흉노 국가'를 건설하려는 유연에게 '거비와 대립하며 위진의 통제 바깥, 남흉노 고지(호지)에서 흉노를 통합'한 유표는 훨씬 매혹적인 계보였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어부라-유표의 계보를 상당한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의 핏줄에 연결하려는 이유는 아니었을까.

(*한편, 195년의 유표와 251~279의 유표가 동명이인이라는 설도 있음을 밝혀둔다)

 

 

 

 

흉노 유표는 삼국지를 찢어

루모로마노 - "내가 유표(劉表)였으면 천하통일 했다." 그러자 신은 나를 흉노의 유표(劉豹)에 빙의시켰다.

novel.munpia.com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