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흉노 유표는 삼국지를 찢어

가비능, 미완의 칸

by 루모로마노 2024. 11. 22.
728x90
반응형

전작인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에서 선비 대인 가비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었다.

이번에 기획 중인 신작의 주인공이 흉노 유표이니만큼, 가비능은 다시 한 번 중요한 역할을 맡을 예정이다.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에서 등장한 가비능은 신선하다는 평가를 (그간 삼국지물에서 가비능이 이 정도로 활약한 작품이 거의 없었으므로) 받았지만, 동시에 나 자신부터 가비능을 제대로 그려내긴 했는지 아쉬움이 많았으므로, 이번에 신작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한 번 그의 일생을 정리해볼까 한다.

 

가비능을 일컫는 표현 중에 '소종(小種)선비'가 있다.

이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통일 선비의 영웅 단석괴와는 거리가 있는, 선비 실력자 중 주류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나 단석괴 사후(181년), 단석괴의 일족 간 내전이 벌어지면서 가비능에게도 기회의 사다리가 내려왔다.

단석괴의 죽음 뒤 그 아들 화련이 아버지의 자리를 이었으나, 182년~184년 선비의 습격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선비는 한동안 내부의 혼란을 수습한 듯하다. 이전 글에서는 화련이 181년에 사망하고 185년 이후 조카 괴두가 계승한 것으로 서술하였으나,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을 확인해 보니 화련의 사망을 '영제 말년'으로 서술하고 있어 주장을 수정한다.

그러니까 184년까지 아버지 사후의 혼란을 수습한 화련은 185년~186년에 다시 한의 북변을 침략하다가, 선비 침략 기록이 끊기는 187년 이전에 북지군에서 전사한 듯하다.

이후 조카 괴두(魁頭)가 화련의 뒤를 이었으니, 이 괴두를 단석괴의 3부 중 동부 괴두(槐頭)와 같은 인물로 본다면 선비의 주도권은 동부로 넘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선비의 동부에는 소리(素利), 미가(彌加), 궐기(厥機) 등의 대인이 있어, 이들은 이후 가비능과 대립한다.

우북평군부터 서쪽으로 멀리 돈황군, 서역의 오손국까지 국경을 마주한 구간이, 단석괴의 3부 중 서부에 해당한다. 이후 가비능이 위를 치는 주요 공격로가 대군, 상곡군 일대에 집중되고, 또 북지군으로 출병하기도 하니, 가비능의 세력은 3부 중 서부라 할 수 있겠다.

여하튼 187년 무렵 화련의 전사, 괴두의 계승, 이후 화련의 아들 건만이 장성하여 사촌형 괴두와 내전을 벌이면서 단석괴 일가의 세력은 약해진다. 괴두가 죽은 뒤 동생 보도근이 자리를 이었다고 하나, 괴두와 보도근(歩度根) 사이에는 또 부라한(扶羅韓)이라는 형제가 있고 따로 무리를 거느렸다고 하니 보도근은 할아버지 단석괴의 유산을 모두 계승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단석괴의 후손들이 약해지는 동안, 가비능은 서부에서 실력을 길렀다.

「오환선비동이전」에 따르면 가비능의 본격적인 성장은 '원소가 하북을 점령한 이후'다. 이것이 정확히 어떤 시점을 가리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대한 늦게 잡아 공손찬의 사망(199년)으로 본다 해도, 관도대전 이전에 가비능은 선비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한 듯하다.

원소에게 반발하는 한인들이 북쪽으로 국경을 넘어 가비능에게 귀순했는데, 이러한 한인의 북방 귀순은 가비능 시대에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흉노 역시 전국시대의 혼란, 진한교체기의 혼란, 흉노-한 전쟁의 혼란 중에 많은 한인들을 받아들였고, 환관 중항열의 사례처럼 선우의 책사가 되어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큰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가비능이 다른 선비 대인들과 다른 점은, 이렇게 받아들인 한인들을 통해 병기, 갑옷, 방패 제작을 익혔다는 것이다. 한무제 이후 흉노의 약화 요인 중 하나로 한군에 비해 흉노군의 무장이 빈약한 점을 들곤 하는데, 가비능은 이 문제를 정확히 의식했던 것 같다.

또 가비능은 한인들을 통해 군대를 통솔하는 방법을 익혀, 출입과 사냥 때 정휘(旌麾, 군사지휘용 큰 깃발)를 세우고, 북을 울려 진퇴의 신호로 삼았다고 한다. 중국의 선진적 군사전술 또한 받아들인 것이다.

내정의 측면에서도 가비능은 다른 선비 대인들을 앞서나갔다. 그는 한인들을 통해 한자를 배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비록 어설프더라도 문서화된 체계적 행정 처리를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비능의 내실 다지기는 헛되지 않아, 이후 가비능의 행적을 보면 다른 대인들과의 전쟁에서 단 한 번도 불리한 위치에 서지 않는다. 가비능은 늘 다른 대인들보다 우세를 점했으며, 위나라가 선비 여러 세력 간 균형을 위해 '가비능에게 공격당하는' 다른 대인을 도운 적은 있어도, '다른 대인들에게 공격당하는 가비능'을 도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206년 이후, 조조가 원담을 베고 원상을 격파하며, 북쪽으로 요서까지 계속 추격해갈 무렵, 가비능보다 먼저 북방민족을 이끌고 독립적 세력을 구축한 사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오환의 섭정왕 답돈으로, 사촌 누반을 오환선우로 추대하고 백랑산에서 조조에 맞섰다.

그러나 답돈은 207년 조조에게 패하고 참수당하는데, 가비능과 보도근을 비롯한 여러 선비는 오환의 패배를 관망하다가, 승패가 결정되자 오환교위 염유를 통해 조조에게 공물을 바친다.

이 207년의 사건은 단순히 가비능이 조조에게 굴복한 사건으로 볼 수도 있지만, 「무제기」와 「오환선비동이전」을 함께 살펴보면 답돈의 패배는 가비능이 크게 성장하며 북방의 정세가 요동치는 계기가 된다.

답돈이 조조에게 패할 때, 그 휘하에는 우북평군, 대군 일대의 실력자 능신저(能臣氐)도 있었다. 누반을 비롯한 오환은 요동으로 도망쳤다가 공손강에게 목이 잘리거나, 아예 요서로 흩어져 살다가 30년 뒤인 237년에 관구검을 통해 위에 항복하는데, 능신저의 행적은 조금 달랐다.

이 사람은 곧바로 단석괴의 손자 부라한과 접촉했다. 선비인 부라한과 오환인 능신저 사이에 이런 제휴가 가능했던 것은 선비와 오환 모두 동호의 후예로, 언어와 습속이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오환선비동이전」).

부라한은 유주 대군 상건현에 1만 기를 이끌고 주둔하면서 능신저의 망명을 받아주었는데, 능신저는 막상 부라한을 보자 그가 대업을 이룰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부라한은 위엄도 없고 법령도 느슨해, 그가 이끄는 부족의 기강이 해이했던 것이다.

이에 능신저는 다른 주군을 찾는데, 그가 바로 가비능이었다.

가비능은 능신저의 연락을 받자마자 대군을 기습하여 부라한을 죽이고, 부라한의 아들 설귀니(泄歸泥)를 비롯해 그 세력을 흡수한다.

「오환선비동이전」은 가비능이 부라한을 죽인 것을 미안해하며 설귀니를 잘 대우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에 대해 조금 다른 가설을 세워볼까 한다.

가비능은 단석괴의 일족이 아니었고, 이에 설귀니를 옹립하는 섭정왕 정도로 자신을 설정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칭기스칸이 몽골을 통일하고 대제국을 세운 이래, 황금씨족 보르지긴이 아닌 인물이 칸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유목민 전체의 엄청난 반발을 사는 일이 되었다. 마치 한고제의 백마지맹 이후 유씨 이외의 왕이 탄생하는 게 금기였던 것처럼 말이다.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를 정복한 군주 티무르도 칭기스칸 일족의 '부마'를 칭했을 뿐이지 감히 칸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 역시 황금씨족의 후예를 꼭두각시 칸으로 옹립해야 했다.

가비능에게도 이런 유목민의 불문율이 작동한 게 아닐까.

가비능이 설귀니를 옹립할 무렵, 그 모델이 될만한 사례가 중원에서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조조의 헌제(유협) 옹립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답돈이 사촌 누반을 선우로 옹립한 것도 가비능에겐 참고할 모델이었을 수 있다.

여하튼 부라한-설귀니 세력을 흡수한 후, 가비능은 확실히 동부의 대인들(보도근, 소리, 미가, 궐기 등)보다 우위에 선 듯하다. 이 과정에서 괴두와 대립한 건만, 단석괴 시대 중부의 모용(慕容), 가최(柯最), 궐거(闕居) 등이 따로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서부뿐만 아니라 중부까지 모두 가비능에게 흡수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형 부라한이 가비능에게 죽임을 당하자 보도근은 가비능에게 원한을 품는데, 이를 이용한 위나라의 이간책으로 한동안 둘의 경쟁이 이어진다.

또 오환은 능신저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이들이 가비능의 휘하로 편입되었다. 능신저뿐만 아니라 이후 이름이 확인되는 왕동(王同)과 왕기(王寄), 수무로(修武盧), 무신저(無臣氐) 등이 모두 가비능의 휘하에 속했다.

이 오환인들은 이미 원소 시대에 견초 휘하에서 오환돌기(烏丸突騎)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조조 시대 이후에는 보부로(普富盧), 나루(那樓), 골진(骨進), 노석(魯昔) 등이 위나라 군대에 흡수되어 '천하에 이름난 기병'으로 불리며 맹활약했다. 그런 기병을 손에 넣었으니, 가비능의 세력이 다른 대인보다 당연히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답돈을 비롯하여 누반, 오연, 속부환 등 통일 오환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던 인물들은 조조나 공손강의 손에 목숨을 잃었으니, 오환은 선비와 위나라 사이에서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는 처지가 되었다 하겠다.

가비능이 염유를 통해 조조에게 공물을 바친 207년 이후, 가비능은 한동안 위나라의 기세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211년, 조조가 마초와 전쟁에 돌입할 무렵에 기주 하간국에서 전은(田銀)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킨다. 염유가 반란군 토벌에 나섰는데, 가비능이 이때 기병 3처을 이끌고 종군하여 전은을 격파한다.

그러나 조조가 한중에서 유비에게 곤욕을 치를 때에는 가비능도 태도를 바꾼다. 218년, 대군과 상곡군 일대 오환 실력자가 무신저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자 조조는 아들 조창을 효기장군으로 삼고 진압 명령을 내리는데(「무제기」), 「오환선비동이전」에 따르면이 반란의 배후에는 가비능이 있었다.

218년 무신저 반란 및 가비능의 침공은 전예의 북방 데뷔전이기도 하다(「전예전」). 공손찬의 몰락 이후 오래도록 북방에서 활약이 없었던 전예는 이때 조창에게 상(相)으로 발탁된다.

조창을 따라 역수(易水) 북쪽에 주둔했을 때, 가비능과 무신저가 기병을 매복시켜 두었다가 공격하는 바람에 조창의 군대가 큰 위기에 빠진다. 전예는 군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형을 이용해 수레로 둥근 진을 친 뒤, 그 안에서 궁노로 가비능과 무신저의 선비-오환 연합군에 맞섰다. 그리고 빈틈마다 가짜 군대를 세워 병력을 부풀리니 결국 가비능과 무신저는 퇴각했고, 조창은 유주 대군을 평정할 수 있었다.

이는 전예의 활약이기도 하지만, 가비능이 한족 보병이 어떻게 북방 기병에 대처하는지 배운 전투이기도 하다.

218년 역수 전투 패배 이후 2년 정도 내실을 다지던 가비능은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220년), 사자를 보내 말을 바친다. 이때 조비는 가비능을 부의왕(附義王)에 봉한다.

그러나 가비능이 위나라에 완전히 복종한 게 아니듯, 조비 역시 가비능의 저자세를 완전히 믿진 않았다. 221년 무렵, 조비는 견초와 전예를 각각 '호선비교위', '호오환교위'로 삼아 유주 광양군(연국) 창평현에 주둔하게 했다.(「문제기」, 「오환선비동이전」)

선비교위 견초와 오환교위 전예의 손발은 착착 맞아, 이들은 선비 각 대인 간 이간계를 벌여 북방에서 거대 선비 세력이 자라지 못하게 막는다. 두 사람이 선비를 대하는 정책은 '굿캅 배드캅'을 연상시킨다.

앞서 가비능은 소리, 미가 등 동부 대인들을 압도하면서 그들이 중국에 말을 팔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등한 관계로 맺은 맹세가 아니라, 가비능이 선비의 대중국 말 무역을 독점했다는 의미로 보인다. 가비능은 소리가 전예에게 1천 필의 말을 팔자 곧바로 공격했지만, 그 자신은 위나라에 얼마든지 말을 팔며 무역을 했기 때문이다.

견초는 회유 정책을 펼쳐 건의중랑장(建義中郞將) 공손집(公孫集) 등의 귀순을 유도한다.(어쩌면 이 공손집은 원소에게 몰락한 공손찬 일가일 수도 있겠다.)

동부 선비 대인 소리, 미가 등이 이끄는 10만여 락(落=家) 또한 견초에게 회유되는데, 이때 '관새(款塞)'라는 표현이 보인다. '요새의 문을 두드린다'라는 것으로, 이민족의 귀순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변방에서 소리와 미가의 교역을 허락했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견초의 이런 행적은 곧장 전예와 소리의 말 무역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감히 자신이 금한 위나라와의 무역에 손을 댄 소리를 벌하고자, 가비능이 군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전예전」은 한 차례의 전쟁을 그리고 있으나, 「오환선비동이전」이나 「문제기」, 「명제기」와 종합해보면 최소 세 차례(221년, 224년, 228년)의 전쟁을 혼란스럽게 엮은 듯하다.

소리는 가비능의 공격을 받자 전예에게 도움을 청했고, 전예는 곧장 소리를 도우러 선비 영역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소리는 요서군 인근 국경 지대에, 미가는 우북평 인근에, 궐기는 어양군 인근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비능은 전예의 이런 무리한 기동을 이용하여 위군의 앞뒤 길을 끊어버린다. 전예는 소똥과 말똥을 모아서 태워 자신이 위치를 속인 뒤 샛길을 통해 겨우 퇴각한다.

한편 가비능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보도근은, 가비능을 견제하는 것인지 역시 조비에게 말을 바쳤고, 조비는 이에 보도근을 왕으로 봉한다. 보도근은 조비의 지원을 받으며 가비능과 수차례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보도근의 역량은 가비능에게 미치지 못했고, 결국 세력이 약해져 병주 태원군, 안문군 일대로 도망치고 만다.

그러나 이때 보도근은 가비능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데, 바로 조카(형 부라한의 아들) 설귀니를 설득한 것이다. 보도근이 '가비능은 네 아버지 부라한의 원수인데, 너는 어째서 가비능을 따르느냐'고 하자 설귀니는 숙부 보도근을 따라 병주로 들어간다. 가비능은 설귀니를 추격했으나 잡지 못했다.

타격을 입은 가비능은 선비 측에 있던 위나라 사람 5백여 가를 대군으로 돌려보내 거주케 하는 등, 위나라를 향해 유화책을 펼친다.

222년, 가비능은 자신이 이끄는 선비 부족들뿐만 아니라 대군의 오환 수무로까지 3천여 기를 이끌고, 소와 말 7만여 마리로 위나라와 교역한다. 이때 다시 위나라 사람 1천여 가를 상곡군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그러나 가비능은 요서의 소리, 병주의 보도근과 설귀니와는 계속 투쟁하는데, 전예는 가비능의 경쟁자들을 지원하며 가비능의 선비 통일을 계속 방해한다.

즉 이 무렵 가비능은 위나라의 신임을 얻어 자신의 선비 통일에 대한 위나라의 간섭을 배제하려 했던 듯하다.

한편 전예뿐만 아니라 견초도 조비의 오나라 원정 때 낙양을 지키러 갔다가, 원정이 중단되자 안문태수가 되어 병주로 돌아온다. 보도근과 설귀니가 태원군, 안문군에 있었으니 당연히 안문태수 견초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견초전」에서 견초가 병주 오환 5백여 가의 세금을 면제한 것이 그 증거이다.

견초는 백성들에게 전투의 진법을 가르치고, 정찰부대를 운용하면서 가비능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이를 격파했다. 또 보도근과 설귀니를 시켜 가비능을 공격케 했다.

이러한 공격과 유화책은 큰 효과를 거둬, 하서(하서 4군이나 하서회랑이 아니라 말 그대로 황하의 서쪽, 안문군 서북쪽을 말한다)의 선비 부두(附頭) 등이 귀순한다.

견초의 지원을 받은 보도근과 설귀니의 공격으로 가비능은 또 큰 타격을 받는데, 가비능의 동생 저라후(苴羅侯), 가비능 휘하의 오환(烏丸) 실력자인 왕동(王同), 왕기(王寄) 등이 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견초까지 출병해 보도근, 설귀니를 철폐된 옛 운중(雲中) 일대에서 가비능의 본대까지 격파한다.

그러나 가비능은 굴복하지 않았다. 224년, 가비능은 이번엔 다시 소리를 공격한다. 이번엔 전예가 경기병 부대로 가비능의 배후로 기동한다. 가비능이 장수 쇄노(瑣奴)를 보내 전예를 막게 했으나 전예가 쇄노를 격파하자, 가비능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예의 도움을 받은 소리는, 이후 전예의 요청을 받아 기주, 유주 일대에서 산적 고애(高艾)를 격파하는 등, 협력 관계를 다진다.

이에 가비능은 위나라 내부의 정치를 이용하는 전략을 세우는데, 전예나 염유의 선배격인, 원래 유주목 유우의 부하였던 보국장군 선우보에게 연락을 취한다.(225년)

“우리 이적(夷狄)들은 문자를 모르니 교위 염유가 나를 대신해 천자에게 보고했습니다. 나는 소리(素利)와 원수인데, 지난 해에 그를 공격할 때 전(田)교위(전예)가 소리를 도왔습니다. 내가 전장에서 쇄노를 보냈는데 전교위가 온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군을 물렸습니다. 또 보도근이 여러 차례 침략하며 내 동생 저라후를 죽이고는 오히려 내가 침략했다고 무고했습니다. 나는 이적(夷狄)이라 예의를 모른다지만, 소나 말도 맛있는 물과 풀을 알아보는데 하물며 내게 사람의 마음이 없겠습니까! 장군(선우보)께서는 나를 위해 천자에게 분명히 보고해 주기 바랍니다.”

이 전략은 성공을 거뒀다.

가비능의 서신을 받은 선우보는 조비에게 이를 보고했고, 조비는 다시 전예에게 명을 내려 가비능을 달래게 했다.

전예와 견초의 견제책이 무산되자 가비능은 급속도로 세력을 불려나갔다.

가비능의 기마궁수(공현控弦)는 10만여 기에 달했고, 이 10만여 기가 가비능을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가비능 본인의 지도자로서의 역량 덕이기도 했다.

「오환선비동이전」에는 가비능이 '전리품을 고르게 나누고, 결정을 한결같이 하며 사사로이 하는 법이 없었다. 이에 부하들이 사력을 다했고, 다른 부의 대인들도 모두 그를 경외했다'라고 쓰여 있는데, 내가 아는 한 유목군주 중 이런 평가를 받는 이는 대표적으로 칭기스칸이 있다.

그런데 225년 3월, 「문제기」에 따르면 병주자사 양습이 가비능을 토벌하여 격파했다고 되어 있다. 정작 「양습전」에는 해당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견초, 전예와의 작전에서 양습이 함께한 것이 이때 오기된 것이거나, 가비능의 가벼운 습격을 격퇴한 것이 과장되게 기록된 듯하다. 무엇보다도 이 내용은 「오환선비동이전」에서 세력을 불려나가는 가비능의 기록과 충돌한다.

이후 전예의 행적 또한 엉뚱하다. 그는 오환왕 골진에게 찾아가 교활하고 복종하지 않는다며 죽여버리는데, 한과 선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교를 펼치전 오환의 사정상, 골진 역시 가비능과 내통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전예는 225년부터 가비능이 선우보를 통해 낙양 정계를 움직여 자신의 행동을 제한하자, 화풀이 겸 해서 오환왕 골진을 죽여버린 것일 수 있다.

3년 뒤인 228년, 전예가 역관 하사(夏舍)를 가비능의 사위인 울축건에게 보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사는 울축건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이를 구실로 전예는 가비능과의 전쟁을 재개한다. 어쩌면 낙양의 정책 변화로 가비능에 대한 견제책이 불가능해지고, 가비능의 세력이 날로 커지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전예의 음모였을지도 모르겠다.

가을(7월~9월), 전예는 서부(西部) 선비 포두(蒲頭, 222년 귀순한 하서선비 부두附頭와 동일인인 듯하다), 병주의 설귀니(泄歸泥)까지 이끌고 울축건을 크게 격파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비능의 기만책이었던 듯하다. 전예가 대군 마성(馬城)현에 이른 순간, 가비능이 직접 이끄는 부대 3만 기가 나타나 전예를 7일 간 포위해버린 것이다.

이후의 전투 전개에 대해서는 「오환선비동이전」과 「전예전」, 「견초전」이 전하는 내용이 다 다르다.

「견초전」은 견초가 전예를 구원하고자 평성현까지 진격하여, 서북쪽의 가비능 본거지를 치려하면서 전예의 포위를 풀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퇴각하는 가비능 군대를 평주(平州)에서 격파했다고 하는데, 이때 평주라는 지명이 없으므로(요동 공손씨의 평주는 아닐 것이므로) 무주현(武州縣)의 오기로 본다.

그러나 가비능이 안문군 무주현에서 견초에게 격파당하려면 대군 마성현에서 '서남쪽으로' 한참 이동해야 한다. 설령 가비능의 본거지가 무주현 서북쪽 어딘가에 있어 그곳에서 견초의 군대를 방어했다고 하더라도 「견초전」의 기록은 과장되어 있다. 견초가 대승을 거뒀다면서 가비능이 제갈량과 연계할까봐 걱정하는 모순된 내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환선비동이전」 및 「전예전」과 충돌한다.

혹은 224년의 전장이 대군 마성현이었고, 228년의 전장이 안문군 마읍현이었으며, 전예가 마읍현에서 포위당했다는 설도 제시된다. 그러나 전예가 광양군(연군) 창평현에서 출병하여 마읍현으로 가려면 어떤 길을 택하든 음산과 군도산, 연산으로 이어지는 산맥 사이의 길을 따라 너무 멀리 우회해야 한다. 반면 마성현은 상곡군의 거용새 중심으로 창평현과 직선으로 이어지기에, 전예가 포위당한 곳은 마성현이 맞을 듯하다. 즉 「견초전」의 마읍현은 마성현의 오기이다.

아마도 양한 시대에 마읍이 흉노와 한의 전장이 되는 일이 잦다보니 선비와의 전쟁에서 마읍이 바로 연상되어 이런 오기가 생긴 듯하다.

「전예전」은 견초의 구원이 아닌, 오로지 전예 본인의 힘으로 가비능의 포위를 돌파한 것으로 언급한다. 물론 전예가 218년 역수 전투에서 가비능과 무신저를 상대했을 때처럼 수레방진을 통해 가비능의 공격을 방어하고 피해를 입혔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전예전」의 기록대로 전예가 '열겹이나 되는 포위를 돌파하고 역으로 가비능을 추격하여 선비의 시체가 땅을 뒤덮었다'는 건 과장일 수밖에 없다.

「오환선비동이전」의 기록은 「전예전」, 「견초전」과 완전히 다른데, 옛 오환교위 염유의 동생이자 상곡 태수인(상곡군이 창평현과 마성현의 딱 중간에 있으니 역사 전장은 마성현이다) 염지(閻志)가 가비능을 설득하여 포위를 푼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가비능이 유주자사 왕웅(王雄)과 교섭하여 유주 일대에서 무역을 시작한 것을 볼 때, 그리고 「전예전」에서 왕웅에 대해 '전예를 모함해 오환교위 자리를 빼앗은 간신'처럼 표현하는 것을 볼 때, 전예는 무모한 도발과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오환교위에서 경질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225년에 선우보와 정치적 교섭을 했듯이 왕웅과도 교섭했을 가능성이 있다.

228년에 소리가 사망하고 동생 성률귀가 뒤를 이었다는 기록도 이 마성전투 패배의 여파일 것으로 짐작된다.

여하튼 오환교위에서 경질되어 여남태수로 간 전예는 이후 240년에 호흉노중랑장 겸 병주자사로 돌아오기에, 가비능과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2년 뒤인 230년. 조조 시절부터 병주자사로 있으면서 흉노, 선비 관련 정책을 펼쳐 왔던 양습이 사망한다.

다음해인 231년 3월, 가비능은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하여 북지군 석성에 주둔하는데, 석성은 교치되어 옹주로 들어가기 전 옛 북지군 자리를 말하는 듯하다. 이때 가비능의 움직임을 보면 운중군 서쪽의 선비들 또한 제압했으며, 내 가설대로 흉노 유표가 상군 일대 호지(외토)에 자리했다면 그와의 제휴도 있었던 것 같다.

제갈량이 철군하자 북지군의 가비능도 철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견초가 세상을 떠난다.

전예의 경질, 양습과 견초의 사망으로 더는 가비능을 견제할 사람이 남지 않은 것이다.

4월, 가비능은 이번엔 선비인들뿐만 아니라 정령(丁零)의 대인 아선(兒禪)도 데리고 유주에서 말을 거래했다. 정령을 휘하에 거느렸다는 것은 가비능이 막남(내몽골)뿐만 아니라 막북(외몽골)까지 모조리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이다. 즉, 가비능은 초원 통일을 과시하며 유주에서 자신의 선비 국가가 보유한 군마를 자랑한 것이다.

2년 뒤인 233년 6월, 가비능은 본격적인 위나라 정벌에 나선다.

가비능과 보도근은 각각 저라후, 부라한이라는 형제를 서로의 손에 잃은 원한이 있지만, 가비능은 보도근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만 봐도 가비능의 정치적 역량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가비능에게 설득된 보도근, 그리고 조카 설귀니는 병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에 병주자사 필궤(畢軌)가 급히 낙양에 보고를 올린다. 보고를 받은 황제 조예는 '가비능과 보도근, 두 선비가 손을 잡았다면 어떻게 진압할 수 있겠는가. 군대로 추격하더라도 절대 국경을 넘지 말라'고 명한다.

그러나 조예의 이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필궤의 군대는 병주를 탈출하는 보도근의 군대를 추격하여 안문군 음관현을 넘고 있었다. 필궤는 소상(蘇尙), 동필(董弼) 두 장수를 안문군 누번현 방향으로 기동시켰으나 가비능의 아들이 이끄는 1천 기병에 격파당하고, 소상과 동필 모두 전사한다.

가비능의 엄청난 역량에 놀랄 틈도 없이, 보도근과 합류한 가비능의 군대가 음관현의 필궤 본대를 덮쳤다. 필궤 역시 이 전투에서 대패한다.

위나라의 북방 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흉노 유표 또는 가비능의 직접적인 조종을 받은 안정군의 흉노 호박거자직(胡薄居姿職)이, 9월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반란은 사마의가 장군 호준(胡遵)을 보내 제압했지만, 위나라의 북방 국경 전체에 걸쳐 대대적인 위기 상황이 닥친 것은 확실했다.

10월, 효기장군 진랑(秦郞)이 위나라의 중군(中軍)을 통솔하여 반격에 나서, 보도근 부락의 대호아랑니(戴胡阿狼泥) 및 설귀니의 항복을 받아냈다. 가비능은 진랑이 이끄는 중군과의 직접 교전을 피하며 막북으로 철수했기에, 위나라는 가비능 군대에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한편 가비능은 대호아랑니와 설귀니의 항복을 구실로 보도근을 숙청하고 그 휘하 부족을 흡수하여 세력을 강화한다. 228년 이후 소리를 비롯한 동부 선비를 무력화하거나 제압하고, 보도근과 설귀니 등 단석괴의 남은 자손들을 제거했으며, 북으로는 정령까지 제압한 가비능의 남진을 막을 방법은 이제 없어 보였다.

그러나 234년, 유주자사 왕웅이 용사(勇士) 한룡(韓龍)을 가비능에게 보내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위나라가 가비능을 이기려면 암살 이외의 방법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 한편으로 이때까지도 가비능은 한인의 귀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장점을 활용하려는 선진적 유목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가비능의 사후 또다른 동생이 즉위한다. 그러나 가비능에게는 이 무렵 위나라 군대를 격파할 정도로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가비능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동생과 아들 사이의 내전은 필연적으로 벌어졌을 것이다.

이후 선비의 주도권은 가비능의 후예도, 단석괴의 후예도 아닌, 독발, 탁발, 모용, 우문씨 등이 쥐게 된다.

235년 1월 19일, 조예는 삭방군(朔方郡)을 다시 설치했다.(「명제기」) 옛 삭방군의 그 지역이 아니라 교치된 땅에 있었을 삭방군의 재설치 의도는 분명치 않다. 가비능과 협력한 흉노 유표에 대한 견제였는지, 아니면 흉노 유표가 위와 협력하면서 가비능의 후예들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상 가비능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나는 가비능과 제갈량이 손잡았을 때 일어난 일을 두려워한 견초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았다. 또 영웅이 분명했던 가비능의 이러한 행적을 전작인 『삼국지 군벌가 둘째아들』에서 얼마나 잘 그려냈을까 부끄럽고 후회되는 한편으로 신작에서는 가비능을 보다 멋지게 그려낼 것을 다짐해본다.

 

 

 

 

흉노 유표는 삼국지를 찢어

루모로마노 - "내가 유표(劉表)였으면 천하통일 했다." 그러자 신은 나를 흉노의 유표(劉豹)에 빙의시켰다.

novel.munpia.com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