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글에서 나는 유표(豹)와 유연 사이의 계보를 의심하는 한편으로,
최소한 유표와 호주천 사이, 어쩌면 유표-호주천-거비까지도 서로 대립하는 세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에 더해 '병주'호와는 다른 호지(胡地)라는 표현(『후한서』 「동사처채염열전」) 및 조조의 유표에 대한 태도를 바탕으로, 그리고 기존 설과 달리 조조의 흉노 5부 설치는 서진대의 일이 잘못 기록된 것이라는 설을 바탕으로,
유표가 215년 철폐된 병주 서부에 독립적 세력을 이루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러한 가설이 맞는지 검토하고자 몇 가지 기록을 더 검토하던 중 흥미로운 사실들을 찾아내, 지난번 글을 보충하고자 한다.
1. 단석괴 사망(181년) 이후 선비의 분열 양상.
옛 흉노 국가와 유사하게 단석괴는 선비를 통합하고 3부로 재편하는 등 국가체계를 갖춰나갔다. 채옹이 영제에게 올린 글에 따르면 단석괴 시절에도 한족 지식인들을 많이 받아들여 참모로 삼았다는 내용이 보일 정도다.
이 단석괴가 사망하자 아들 화련이 뒤를 잇는데, 화련은 '형'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분명 장남은 아니다. 어쨌든 단석괴의 후계자 화련은 량주 북지군을 공격하던 중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형의 아들, 즉 조카인 괴두가 화련의 자리를 잇는다.
문제는 화련이 전사한 시점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나는 『후한서』 「효령제기」와 「효헌제기」의 선비 습격 기사를 바탕으로 시기를 추론해 보았는데,
영제 시기 거의 매년 이어지던 선비의 습격이 182년~184년 사이에 끊긴다는 점에 주목했다.
흉노의 역사를 통해 보자면, 선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흉노의 대패 등으로 인해 혼란을 수습하고 내부 결속이 필요한 경우 수년 동안 흉노가 한을 공격하지 않는 양상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181년 단석괴 사후 화련이 계승하자마자 화련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고, 182년~184년까지 괴두가 선비 내부를 수습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185년과 186년에는 다시 선비의 습격 기사가 보이는데, 괴두가 내부 수습에 성공하고 한 약탈에 나선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화련에게는 건만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화련 전사 당시 건만은 어려서 아버지의 자리를 잇지 못했다고 한다. 181년에 건만이 10세 정도였다면 187년에는 16세가 되고, 15세 정도였다면 21세가 된다.
187년부터는 다시 선비의 습격 기사가 뚝 끊긴다. (*「효헌제기」를 199년까지만 확인했기 때문에, 이후 200년부터의 기사를 또 점검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부라한, 보도근, 가비능 등의 행적도 따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
즉 187년에 장성한 건만이 사촌형 괴두와 선비 내 패권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면, 건만과 괴두의 내전으로 선비가 흩어졌다는 기록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는데, 「효령제기」와 「효헌제기」는 선비의 습격 기사가 끊기지만 195년 호주천의 흉노선우 즉위 이후 '하동군에 주둔하다가 선비에게 지속적으로 약탈당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번 글에서 유표가 195년 장안(넓게는 삼보까지) 약탈에서 얻은 재화를 바탕으로 흉노 고지, 즉 호지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추정했는데,
가설대로 유표가 숙부 호주천과 대립했다면, 어쩌면 187년 이후 내전으로 흩어진 선비들을 휘하로 끌어들여 호주천을 공격한 것은 아닐까 한다.
2. 서기 251년, 유표의 흉노 통합과 '거비의 아들'
흉노선우 호주천은 212년 조조의 유수구 원정에 종군한다든가, 213년 양습의 병주자사 취임 이후 황제의 시위를 선다든가 하는 식으로 조위에 복속되는 모습을 보인다.
결정적으로 216년 호주천은 위국의 수도 업에 억류되며, 이후 그의 남은 세력은 거비가 관리한다.
이후 35년이 지난 뒤인 251년, 『자치통감』과 『삼국지』 「등애전」에서 등애가 사마사에게 한 진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선우'는 국경 안에 받아들였으나, 약해지고 있다.
외토(外土)의 호로(胡虜)가 강해지고 있다.
유표의 부에 반란이 일어났다.
그 반란을 이용하여 유표의 나라를 둘로 쪼개기 위해 거비의 아들을 안문으로 보내자.
요컨대 유표의 세력은 '외토의 호로'로서 국경 안에 받아들인 '선우(호주천의 후예)'의 세력과는 명백히 구분되고 있다. 등애는 이 유표=외토의 호로를 분열시키고자 거비의 아들을 안문군에 배치하자는 제안을 올린다.
이때 안문군에 배치되는 거비의 아들이 유맹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불명확하다. 어쨌든 거비의 아들이 배치되고 20년 뒤인 271년 유맹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유맹은 '장성 밖으로 빠져나가' 공야성에 주둔하며 서진의 군대와 맞섰는데, 이간계에 넘어간 부하의 손에 죽는다.( 『진서』 「사이열전」)
즉 251년에서 271년 사이, 유맹이 이끄는 '병주호'는 '외호'와의 대립을 통해 장성 밖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으며, 이 성장을 바탕으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3. 상군(上郡)과 흉노호, 그리고 철불의 혁련씨
271년에서 272년까지 이어진 유맹의 반란이 진압된 후, 점차 흉노의 원망과 분노가 극에 달해 서진의 국경에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272년 이후로 유맹의 잔여 세력, 그러니까 거비계 세력이 유표계 세력을 무너뜨리고 하투 일대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추정해 보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곽흠이 사마염에게 올린 글의 내용이다.
곽흠은 흉노가 거주 중인 여러 군이 위험하다면서 나열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상군(上郡)과 다른 군은 약간 언급이 다르다.
북지군, 서하군, 안정군의 군대를 동원하여 상군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동사처채염열전」의 '호지', 「등애전」의 '외토'와 마찬가지로 상군은 '국경 바깥'의 잃어버린 땅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216년 조조의 병주 서부 군현 철폐 혹은 교치 당시, 유독 '상군'만이 언급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상군 역시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철폐되었지만 기록에서 누락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유표의 주둔지로서 특별히 취급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유표가 상군의 지배권을 조조에게 정식으로 승인받았다면, 유표의 '흉노 5부 중 좌부수 취임' 기록에 따르는 혼란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 284년부터 287년에 걸쳐 흉노 일부 세력의 서진 귀순이 이어지는 것을 근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284년 귀순한 태아후, 286년 귀순한 도대박과 위사호는 '흉노호'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확실히 '병주호'와는 구분되는 표현이다.
287년 귀순한 대두득일육국은 '흉노도독'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역시 '흉노호'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284년~287년 사이 귀순한 이들은 대규모 인구와 가축을 이끌고 귀순한 것으로 나와, 단순히 서진 국경 내부의 반독립적 세력들이 새삼스러운 충성 맹세를 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던 어떤 흉노 세력'으로부터 망명했음을 짐작케 한다.
즉, 이상의 기록을 바탕으로 아래와 같은 타임라인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87년 이후, 단석괴의 자손들 사이에 내란이 일어나 선비가 흩어진다.
195년부터 251년 사이, 유표 또는 유표계 세력이 남흉노의 옛 땅(호지)에서 자립, 흩어진 선비들을 끌어들여 병주호 호주천을 공격한다.
251년 무렵, 유표가 남흉노 옛 땅의 통합에 거의 성공한다. 같은 해, 등애의 제안대로 조위는 거비계 세력을 통해 유표에게 불만을 품은 자들을 지원하며 유표의 세력을 분열시킨다.
251년에서 271년 사이, 거비계의 우두머리 유맹이 서진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킨다.
272년에서 287년 사이, 진압당한 거비계 세력은 남은 유표계 세력을 공격, 유표계 세력의 대규모 서진 망명이 이어진다.
앞서 유표가 선비를 끌어들여 호주천을 공격했다고 추정했던 것처럼, 이때의 거비계 세력 또한 하투 고원 일대의 선비와 하나의 국가 체제로 통합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훗날 북하를 건국하는 철불부 혁련씨는 거비의 후예를 자처하기 때문이다.
4. 유연은 어째서, 에 대한 하나의 가설
다시 곽흠의 상소로 돌아가 보면, 서진의 국경 내 거주하는 흉노의 범위는 서쪽으로는 안정, 북지에서 삼보(경조=장안, 부풍, 풍익), 홍농, 서하, 상당, 평양(옛 하동군 평양현)에서 심지어 위군(업)까지 대단히 넓었던 듯하다.
한=전조의 건국자 유연은 264년~265년 무렵에 낙양에 인질로 있었는데, 나는 유연이 유표의 아들이 아니라 곽흠이 말한, 국내의 흉노 중 어떤 세력의(아마도 정재훈의 추측대로 신흥군의) 아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팔왕 중 하나인 사마영의 휘하에서, 유연이 북부도위로 세력을 이루는 것은 289년~290년 무렵이다. 즉 앞서 언급한 284년~287년 '흉노호의 귀순' 이후의 일인데, 이 귀순한 흉노호들이 유연이 오호십육국 시대를 여는 데 큰 활약을 했던 건 아닐까?
유연의 주력이 된 귀순 흉노호가 유표계 인사들이었다면, 유연은 이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유표의 몰년을 날조해서라도 '아들'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조조의 좌부수 유표'의 신화, '유표의 아들 유연'이 날조된 전후 사정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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