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은퇴하신 지 4년 정도 되었는데, 10월 17일 목요일 아침, 갑자기 아버지께서 '명동 놀러가지 않을 테냐'고 하셨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나... 그 이후로는 아버지가 어디 놀러가자고 하신 적이 거의 없어서 (가족끼리 여행을 간 것도 아버지가 가자고 했다기보다는 그냥 가족들 모두의 뜻이 맞아서였다) 나는 한편으로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명동역으로 향했다.
명동역에서 내리니 11시 반쯤 되었는데, 우리는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아버지는 내가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했고,
나는 예전에 명동에 와서 맛있게 먹었던 것 두 가지를 말씀드렸다.
하나는 명동돈가스(상호가 돈까스가 아니다!), 다른 하나는 명동교자.
연애든 썸이든 타면서 맛있는 걸 먹으러 갈 때마다, 나는 언젠가 부모님과 함께 내가 맛있게 먹었던 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었으니까.
아버지는 명동돈가스를 고르셨고, 우리는 딱 좋은 타이밍에 가게로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가서 안심, 등심 각각 하나씩 시키자 사람들이(주로 주변 회사에서 점심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계단에 가득 늘어서서 기다리기 시작했으니까.
조금만 늦었으면 우리도 저런 신세가 되었겠다며 아버지는 웃으셨다. 이런 소소한 대화로 서로 웃어본 것도 얼마만인지.
예전에 여자친구와 함께 갔을 때보다 가격은 올라갔지만, 나는 명동에서 유명한 곳이라면 꼭 부모님께서도 드셔보셨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설령 그 집들이 부모님 입맛에는 조금 안 맞더라도, 부모님이 지인이나 친구분들과 이야기할 때 '아, 나도 거기 가봤어'하는 식으로 기가 죽지 않으셨으면 하는 자식의 욕심이라고 해야 하나.
돈까스를 먹고 나와서는 주변 상가들을 구경하며, 아버지가 보고 싶으시다던 청계천으로 향했다.
가는 중에도 아버지는 사람들이 줄을 선 왕돈가스 집이나, 최소한 3개 국어가 적혀 있는 간판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셨다.
아버지는 은퇴 후에 이른바 '국뽕' 유튜브를 즐겨 보신다. 그런 거 보시지 마시라... 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오랜 직장생활 끝에 은퇴하신 아버지에게 그것 말고 별다른 취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어렴풋이 아버지가 그런 국뽕 유튜브를 통해 자신이 이 나라와 사회를 힘들여 일궜다는 자부심을 찾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꼈다. 아버지가 '어서 와 서울은 처음이지'나 '영국남자' 같은 TV프로그램, 유튜브 채널을 좋아하시는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명동 거리는 그 많던, 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포차들을 전부 치워서 시원시원했고, 그 길 위로 정말 다양한 외국어가 들려오는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TV나 폰으로만 보던 것들, 그러니까 한국이 좋아서 찾아온 외국인들을 실제로 확인하니 무척 즐거우신 것 같았다.
청계천에 도착하니 외국인 관광객이나 직장인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특히 직장인들은 점심을 먹고 커피 한잔 씩을 손에 들고 산책 중이었는데, 나는 그런 모습을 보다가 "아버지, 우리도 커피 한잔씩 들고 걷죠."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20대에 충청도 태안에서 상경하셨지만 아무래도 옛날 사람이다보니 확실히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는 시골같은 면이 있으신 분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신문물을 접하면서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이른바 '요즘 사람들'처럼 커피 한 잔을 들고 아버지와 걷고 싶었다.
내가 사 들고 온 커피는, 나한테는 참 익숙한 메가커피(혹은 매머드커피나 더벤티) 같은, 직장인들을 위한 싸면서도 양도 많고 카라멜을 풀어 달착지근한 커피였다. 아버지의 놀라움과 즐거움이 섞인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이고, 이건 커피 열 잔은 되겠다, 야."
아버지가 드시던 커피는 늘 캔커피나 자판기 커피 같은 것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너무 많다고 하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커피를 마시며 도심 속 공원을 걷는다는 생각에 무척 즐거워하셨다. 커피를 사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걸으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 같은 인구 천만의 도심에 이렇게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공원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라며, 아버지는 높게 자란 풀과 하천 속 수조를 보고 감탄하셨고, 또 정말 많고도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보고 신기해하시면서도 뿌듯해하셨다. 나는 청계천의 다리 곳곳에, 벽에 있는 우리 전통 문양 같은 것을 보며 '외국인들이 이런 걸 이국적이라며 좋아하더라'라고 아버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버지가 즐거워할만한 대화를 나누며 걸을 수 있다는 건 참 큰 복이었다.
그러다 참새를 보았다.
"우리 동네에도 없는 건데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 몰려 있는 걸 볼 줄이야."
"요즘에는 비둘기보다도 참새가 참 귀하죠 아버지."
"그래. 예전에는 먹을 게 없어서 참새도 잡아 구워먹곤 했다지만, 요즘엔 정말 귀해졌다"
아버지는 확실히 옛날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당신께서 어렸을 적 처음 서울에 놀러왔을 때는 사람들이 강남 쪽 한강변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도 보셨다고 하니까. 하지만 나는 그 옛날 이야기가 무척 즐거웠다.
그러다 왜가리도 보고.
그렇게 쭉 걷자니 세운상가며 광장시장이며 지나다, 아버지가 문득 말씀하셨다.
"야, 이거 돈까스에 커피까지 너무 먹으니까 배가 부른데. 나는 너랑 광장시장에서 뭘 먹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배가 불러서야."
"그럼 아버지, 청계천 광장에서 좀 돌아가면 광화문인데, 전에 광화문 앞에 그 계단(월대)인가 뭔가 복원했다고 뉴스에 나왔잖아요. 거기 구경하러 가볼까요?"
나는 밝아지는 아버지 얼굴을 보며, 비로소 아버지가 뭘 좋아하시는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차나 비행기로 하는 여행보다 이렇게 걷는 걸 좋아하셨다. "너는 나를 닮아서 잘 걷는구나" 이 말이 어찌나 사무치던지.
걷는 걸 딱히 즐기는 건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걸으며 어딘가를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복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하튼 광화문을 향해 가던 중에, 아버지는 말씀하신대로 너무 커피를 많이 마신 탓인지 화장실에 가고 싶어하셨다. 적당한 화장실을 찾다가 깨끗해보이는 건물이 나오니 거길 들어갔는데, 마침 그곳은 전태일 열사 기념관 아니겠는가.
전태일 열사의 동상과 당시 방직공장에서 쓰던 미싱 기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화장실을 나온 아버지께 나는 무슨 충동이 들어서 그랬는지, "아버지, 여기 보고 가요"라고 말했고, 그렇게 1층부터 전시물을 보기 시작하자 시설 관계자분께서 "오늘 교육 받으러 오셨나요"라고 물었다. 아마 교육을 신청한 사람들에게 안내를 해주시려는 것 같았는데, 나는 "아뇨. 지나가다 우연히 들렀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나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제가 35년을 노동자로 살았는데, 여길 처음 와 봅니다."
35년은 고스란히 내 나이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키우며 대체 어떤 세월을 넘어 오신 걸까.
2층은 당시 방직공들의 작업장을 그대로 재현해놓기도 했고("그래, 내가 처음 보세공장 취업할 때도 이랬었지"),
세계 곳곳의 비정규직 노동자 권리 보호를 위한 노력 등 다양한 자료들을 보기 쉽게 전시해 두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전태일 열사의 일생이 전시된 공간과, 세계 곳곳의 노동운동, 그리고...
플랫폼 노동자 문제라는 가장 최근의 노동문제까지 포괄하는, 굉장히 멋진 전시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참 새삼스럽지만, 나도 노동운동의 관점에서는 '노동자'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도.
그러니까, 막 데뷔할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내가 웹소설로 버는 돈이 '노동자의 피와 땀'이라는 사실, 그들을 위한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걸 넘어 나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져야한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고, 또 반성하게 되었다.
기념관을 나와서 다시 건물 전면의 사진을 찍었다. 이제 보니 전태일 열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를 그 필체 그대로 창문에 배열한 것 아닌가. 이 자체로도 훌륭한 전시물이라, 나와 아버지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9년이면 아버지의 나이 열살 남짓, 전태일 열사가 살아 있었다면 일흔이 넘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며 광화문을 향해 계속 걸었다.
그 와중에 노벨문학상을 탄 한강 작가 이야기와, 수상 소식 바로 다음날 아침에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이 참 많이 팔렸더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광화문 광장에 와 보니 평일이라 그런가 정치 구호 같은 것도 거의 없고, 또 세종문화회관 앞길은 공원으로 만들어서 공원이 훨씬 넓어진 지라, 아버지와 나는 그 길을 그대로 즐기며 광화문까지 걸었다.
걷는 중에 분수 물로 아치형 통로를 만든 곳이 있었는데, 외국인 여성 두 분이 거길 지나갈까 말까 망설이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겸, 장난도 쳐볼 겸 해서 뛰어들어서 죽 뛰어갔는데, 아버지가 뒤에서 "야!"하고 외치시는 게 들렸다. 돌아보니 내 장난을 보며 웃고 계셨다.
서른이 훌쩍 넘은 아들의 장난인데 그렇게 즐거워하시는 걸 보니, 이것이 60이 넘은 나이에도 80 부모 앞에서 아이처럼 재롱을 떨어 효를 행했다는 노래지희의 고사와 같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종대왕 동상 밑의 전시관이나 세종문화회관이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멀리 광화문과 근정전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참 복원을 잘 했다며 감탄하셨다. 하긴 아버지가 본 광화문과는 달리 양옆으로 담벼락도 복원하고, 또 월대도 있어 무척 웅장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의 시선이 경복궁 뒤, 거대한 푸른 지붕에 머무는 것 같아 나는 "아버지, 저게 청와대에요"하고 말씀드렸다.
"저게 청와대야?"
"그쵸, 원래 경복궁 후원이 있던 자리니까."
"나 때는 중앙청(총독부) 건물 때문에 저런 시야가 안 나왔는데"
"김영삼이 그거 하나는 참 잘했죠?"
"성수대교하고 IMF전까지 지지율 98%였어"
경복궁을 향해 길을 건너기 전에 사헌부 터를 보았는데, 아버지는 그 터를 보시곤
"이 터가 참 낮은데, 그러면 지금 건물들 토대가 그때보다 높은 데 있다는 거 아니냐."
"그렇... 겠죠?"
"그럼 우리가 지금 이렇게 경복궁을 평지에서 보는 것과 다르게, 당시에는 경복궁을 우러러보지 않았을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또 광화문이 얼마나 웅장해보였을까 생각하니 아버지의 통찰이 실로 놀라웠다.
광화문 안쪽에서는 마침 당시의 군사훈련을 재현하고 있었는데, 외국인들이 몰려들이 되게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외국인들을 흥미롭게 봤지만, 우리 뒤에 있는 광화문 누각 앞에서 정말로 뿔피리를 불어서 신호를 주는 것도 무척 신기하게 구경했다.
다만 더 깊이 들어가서 보지는 않고, (그건 다음에 청와대를 구경하며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다시 광화문을 나와 이번에는 인사동 문화의 거리로 향했다. 계속해서 외국인 관광객들을 마주쳤고, 아버지는 그 상황이 무척 신나신 것 같았다.
"아버지 오늘 들은 말 줄 8할은 외국어인것 같아요."
아버지의 35년 노동자로서의 삶. 그 결과물이 국제적인 관광 도시 서울, 그 서울이 찬란한 문화를 빛내기까지 당신께서 산업역군으로 토대를 닦았다고 생각하니 무척 자부심이 느껴지는... 그런 얼굴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람마다 지닌 판타지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의 그 판타지가 한결같이 지켜지길 바랐다. 그리고 내가 그런 아버지의 판타지를 지키고 싶었다.
인사동 거리에서 여러가지를 구경하고(아버지는 외국인들이 '오빠'라거나 '외국인'이라고 한글로 적힌 모자를 쓰고 다니는 모습을 굉장히 즐거워하셨다. 또 한편으로는 호객행위 없이 정갈하게 한국적으로 꾸민 음식점과 찻집, 여러 건물의 외관에 감탄하시기도 했다.), 우리는 종로로 나왔다.
종로에서 다시 쭉 걸어서 광장시장으로 향하니, 그제야 우리 부자의 배에 시장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대학원에 다닐 무렵에 찾아갔던 육회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방송에서 자주 다루던 이 광장시장의 음식을 굉장히 맛보고 싶으셨던 것 같았다. 가게로 향하는 중에도 한국의 꽈배기를 사겠다며 줄을 선 외국인 관광객들과, 넷플릭스 '거리의 셰프들'을 크게 걸어놓은 가게들을 구경하며 즐거워하시다가, 마침내 육회와 빈대떡, 고기완자로 이루어진 세트를 시키시곤
"맥주 한 잔 안 하랴?"
하셨다. 아버지와 오랜만에 정말 많은 대화를(진지한 이야기보다는 정말 소소한 이야기들을, 그러나 평생 잊지 못할 이야기들을) 나누고, 또 많은 것들을 보아서 즐거워진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할 또 하나의 즐거움을 놓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와 맥주 두 잔씩(카스 한 병을 나눠서) 마시고, 육회 빈대떡 고기완자 등을 먹으며 (나는 가난한 학생일 때 이걸 넷이서 나눠 먹은 이야기를 하며 키득거렸다)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아버지와 함께 걸은 거리는 2만 보가 넘었다. 대략 2만 2천보 정도.
언젠가는 청와대도(대통령 바뀌어서 다시 들어간다고 하기 전에 가봐야지, 라고 하셨다), 덕수궁이나 창경궁, 창덕궁, 경희궁도 아버지와 함께 돌아볼 날을 기다리며, 이번 작은 여행기를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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