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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조선구마사>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by 루모로마노 2021.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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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존경과 존중은 다르지 않을까

다른 분들이 충분히 이 문제에 대한 좋은 의견들을 남겨주셨으니까, 나는 그냥 지켜보는 편이 맞겠다 싶었다.

하지만 오늘 박계옥 작가의 사과문을 보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역시 한마디 남겨야겠다.

아래의 구절이 바로 문제의 부분이다.

“조선의 건국 영웅분들에 대해 충분한 존경심을 드러내야 했음에도 판타지물이라는 장르에 기대어 안이한 판단을……”

박계옥 작가가 뭔가 큰 착각을 해서 이런 사과문을 적은 것이면 좋겠다. 착각이 아니라면 이건 상당히 악의적으로 넣은 구절이니까. 마치 ‘역사 인물들을 무조건 영웅으로 추앙해야만 하는 한국의 풍토’를 비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위험한 말이다. 아마 이런 뉘앙스가 사과문을 읽은 여러 사람이 더욱 박계옥 작가를 비판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닐까.

착각이었든 악의였든, 박계옥 작가의 이 말은 사실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 사람들은 조선 건국 영웅들에게 ‘존경’을 바치지 않아서 화가 난 게 아니다.

드라마 <정도전>을 생각해보자. 드라마 후반, 태종 이방원은 권력욕의 화신으로 나온다. 피의 숙청을 마구 휘두르는 잔혹한 왕자다. 태조 이성계는 옥좌의 저주에 사로잡혀 후회와 슬픔에 몸을 떠는 늙은이가 되어버린다. ‘존경’이라고 표현될만한 요소는 없다.

그러나 ‘존중’이 있다.

공과를 떠나, 그 시대를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들의 삶 그 자체를 조명하는 것이 바로 존중이다. 악인으로 평가하든 선인으로 평가하든, 그 ‘치열함’만큼은 밀도 있게 그려내는 것이다. 주인공 정도전의 대사 “나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네”는 그러한 태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박계옥 작가는 ‘가벼운’ 것이 곧 ‘쿨함’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 의견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는 매우 큰 착각을 여기에 더하고 있다. ‘존중’을 거둬버리는 것은 ‘가벼운’ 게 아니다. 오히려 재미없을 정도로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조선왕조실록도 찌라시”라는 <철인왕후>의 대사는 이런 그의 착각을 확연히 드러내는 대사다. 박계옥 작가는 이 대사를 쓰면서 ‘현대적으로 경쾌’하고 ‘탈권위적’이며, ‘신선한 재해석’을 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대사는 그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만의 기록’이라는 식의 역사 인식은 이제 너무나도 구닥다리다. 그렇기에 신선한 재해석이라고 내놓은 것이 오히려 구닥다리 냄새를 풍긴다. 마치 2000년대 초 사이비 역사가들의 역사인식을 보는 것 같다. 탈권위를 지향했으나 과거인에 대한 현대인의 권위만을 일방적으로 내세우기에 오히려 고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다. 이러니 이 대사는 경쾌해지지도 않고 어딘가 아귀가 안 맞는 것처럼 어색하게 겉돈다.

조선왕조실록을 ‘존경’하라는 게 아니다. 그 시대에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정확, 정밀한 기록을 남기려 했던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드라마 대사에는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서사물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고, 비판을 하든 긍정을 하든 바라보는 방향은 결국 모든 인간에 대한 따스한 존중이기 때문이다.

박계옥 작가는 내가 대학에 다닐 때(나는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 잠깐 교류했던 몇몇 문예창작과 학생들, 시를 쓴다던 어떤 선배, 한 학기 강사로 왔던 어떤 소설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기교로서의 글’은 아주 훌륭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그 외의 공부는 안 했던 사람들.

독자가 문학을 외면하는 것은 한탄하지만, 독자에게 ‘훌륭한 문학’을 ‘내려주려던’ 사람들. 독자들에 대한 어떠한 존중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의 마음에 들려고 ‘족보’를 찾아 나서던 사람들. 장르소설의 대중적 성공에는 질투의 눈길을 보내면서 거기서 그 어떠한 것도 배우려 들지 않는 못난 사람들 말이다.

중공 원작의 설정을 대충 끌어다 <철인왕후>를 쓰고, 이번 <조선구마사>에는 넷플릭스에서 큰 성공을 거둔 <킹덤>의 설정을 대충 끌어다 썼다. 그러면서 고찰도 공부도 존중도 없으니,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어찌 보면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을까.

나는 학사논문을 쓰면서 문학이 계속 그런 식이라면 ‘죽어 마땅하다’고(20대 중반의 나는 정말 건방졌다) 쓰고 졸업했지만, 여전히 그런 버릇을 고치지 못한 나이 든 작가의 모습을 보며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Ⅱ. 『오다 노부나의 야망』은 되지만, 『모애모애 조선유학』은 안 되는 이유

‘존중’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 라이트노벨 『오다 노부나의 야망』과 『모애모애 조선유학』을 예로 들면서 한 번 살펴보자.

『오다 노부나의 야망』은 일본사의 그 유명한 인물인 ‘오다 노부나가’를 이른바 ‘모에화’한 타임슬립 대체역사물이다.

이런 방식의 창작에 대해서 일본이 좀 더 자유로운 풍토인 것도 맞고, 한국의 풍토가 좀 더 여유로워져야 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이런 풍토 차이를 떠나 『오다 노부나의 야망』은 한국 라이트노벨에서 비슷한 시도를 할 때와는 근본적인 면에서 달랐다.

『오다 노부나의 야망』은 오다 노부나가라는 실존 인물을 귀여운 소녀로 바꾸면서, 동시에 주인공의 연애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의 야망』에서 ‘노부나’는 절대로 야망과 꿈을 잃지 않는다. 일본을 보다 넓은 세계와 교류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 말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미소녀를 미소녀로만 내팽개쳐두지 않고, ‘꿈을 향해 전진하는 인간’으로 그려내는 것. 이것이 일본 라이트노벨이 한국에 들어온 2000년대 초중반 흥행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드노벨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뭔가 큰 착각을 했던 것 같다. 몇몇 작품에서는 이른바 작가주의적 시도를 해보는 한편(실상 문단문학의 실패와 똑같은 수순을 밟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좌절되자 ‘일단은 상업적 성공’을 노린다며 ‘모에화’에만 집중한 것이다.

말하자면 『오다 노부나의 야망』에서 ‘노부나의 야망과 꿈’을 빼버리고 ‘주인공 사루와 사랑에 빠진 미소녀’라는 요소만 성공 요인이라고 생각하며 가져와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츤데레’라든가 ‘모에’같은 키워드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나는 아주 비판적인데, 지금도 ‘라이트노벨 풍’ 웹소설을 쓰고자 하는 수많은 지망생이 저런 ‘키워드’에 집착해서 제대로 된 서사물을 써내지 못하는 데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2014년, 시드노벨 대상 수상작으로서 발매된 『모애모애 조선유학』은 나에게 커다란 좌절과 동시에 안도를 심어준 작품이었다.

나는 2012년인가 2013년에 시드노벨 공모전에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의 '프로토타입'을 낸 적이 있는데, 이때도 ‘성리학’을 응용한 판타지 설정은 그대로였다.

내가 유학(儒學)을 응용해 만든 판타지는 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공모전에서 떨어졌지만, 이른바 ‘가슴’이라는 ‘모에’ 키워드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유학(乳學)은 대상까지 가서 출판되었던 이유는 뭘까. 기껏 나와서 저렇게 욕이나 먹으려고 대상까지 받은 걸까. 내 아이디어는 저 작품보다 못한가? 그런 좌절감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까지 나보다 유학(儒學)으로 판타지 설정을 만들어내는 데 능한 사람은 없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한국 라이트노벨 출판사에서는 내 작품을 받아들여 주는 일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섰기에, 방향을 틀어 ‘프로토타입’을 조금씩 고쳐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옳았다.

이 일화는 나의 당시 울분을 토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애모애 조선유학』을 비롯한, ‘모에’에 치중하던 한국 라이트노벨의 시도가 안고 있던 문제점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 오다 노부나는 ‘사춘기 주인공의 연심을 자극하는 미소녀’이면서 동시에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슬프게도 많은 한국 라이트노벨에서는 ‘모에 인형’들만 양산해냈을 뿐이다. ‘치열한 삶’을 그리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거기까지 성공해낸 작품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당시 라이트노벨을 쓰시던 작가분들이 웹소설 쪽에서 성공을 거두시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모에’나 ‘츤데레’, ‘쿨데레’ 같은 키워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인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영역에 오자, 비로소 그 빛나는 재능을 억압하던 굴레를 벗어던지고 날아오르시는 게 아닐까.

이것은 <킹덤>은 되지만, <조선구마사>는 안 되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나는 사람의 치열한 삶에 주목하는 것이 ‘존중’이라 말한 바 있다. <킹덤>에는 그런 존중이 있다. 그것은 악역인 조학주와 계비 조씨도 마찬가지고, 선역인 이창과 안현도 마찬가지다. 각자 추함과 아름다움, 아픔과 광기를 지니고 있으나 그것이 모두 삶의 치열함으로 집약될 수 있다.

<조선구마사>에는 그런 것이 없다. ‘쿨함’을 가장한 기괴한 감각만 있을 뿐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조선구마사>가 의도한 ‘탈권위’적 장치들은 전혀 탈권위적이지 않다. <철인왕후>에서 지적받았던 문제가 더욱 심화하였을 뿐이다.

대사를 시니컬하게 내뱉는다고 쿨해지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쿨비린내가 난다’고 하는 것이다.

Ⅲ. 웹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이런 문제에 있어 자유로울까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글을 돌아보고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입만 열면 ‘상업성’과 ‘돈’을 말하는 어떤 작가를 가정해봅시다. 그는 다른 모든 소설의 성공 요인과 결과를 ‘상업성’과 ‘돈’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앞서 제가 말했던, 한국 라이트노벨의 오판과 실패를 그대로 반복할 우려가 있다는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작가분들이 ‘성공 공식’을 깨뜨려가면서 웹소설의, 장르소설의 영토를 넓혀나가고 있고, 그것이 시장의 성장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없이, ‘상업성’과 ‘돈’만을 주된 요인으로 판단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 그 요인에서 벗어난 작품들이 마치 ‘죄악’인 마냥 취급당하기 시작하면, 혹은 ‘성공 공식’에서 벗어난 작품들의 성공 요인마저 ‘상업성’과 ‘돈’만으로 설명하려 들면, 이 거대한 시장은 서서히 말라 죽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해봅니다.

둘째로 작가들 사이에서, ‘독자들 수준에 맞춰준다’, ‘타협해준다’는 식의 오만한 생각이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작가들, 혹은 작가지망생이 자신의 작품을 자조한답시고 마치 ‘수준 낮은 독자들에게 시혜로 내려주는 것’인양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저 또한 그런 착각에 빠져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오만한 망상이었죠.

이는 필연적으로 독자 대중에 대한 무시로 이어집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도 ‘상업성’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접근하는 순간, ‘독자들 수준이 낮은 건 맞지만, 매출이 줄어드는 게 두려우니까 굽혀준다’는 식의 태도만 나오게 됩니다. 독자에 대한 존중이 없어집니다. 아니, 독자를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잃게 만듭니다.

모든 서사물은 ‘삶’을 바라보아야 하고, 따라서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당장 소설가와, 소설과 함께 호흡하는 독자에 대한 존중이 없는데 어떻게 인간에 대한 존중이 나올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춘문예는 통과하지만 독자들에게서 철저하게 버림받는 소설들이 그런 식입니다. 그런 작품의 작가들은 큰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상업적 요소를 쓰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이죠. 심지어 그렇기에 자신을 '세태에 영합하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상업적 요소의 활용 문제가 아닙니다. ‘심사위원들로부터 인정받은 나의 훌륭한 소설을 너희에게 내려주마’라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이상 독자 대중은 그런 글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물론 악질 독자도 있습니다. 유명한 악플이 있지요. ‘저는 하차합니다, 작가님도 상하차나 하십시오’ 같은…….

참으로 지독하지요. 그러나 저는 그 악플에 일말에 진실이 담겨 있다면…… 이란 상상을 해봅니다.

누군가는 말입니다, 그 고된 상하차 알바를 하면서 번 돈으로 소설을 구매해주고 있다는 상상 말입니다.

또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출근길, 혹은 퇴근길, 버스나 전철의 손잡이에 기대어 피곤한 손길로 스마트폰을 누르는 어떤 사람을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 아주 잠깐, 어떤 감동, 어떤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 웹소설이라고.

웹소설은 그렇게 대중의 마음속으로 들어갔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상업성’과는 구분되는 ‘대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존중이고, 연민입니다.

나는 ‘값싼 연민(동정)은 하지 마라’는 말을 처음으로 했던 누군가를 증오합니다. 우리에겐 너무나도 연민이, 동정이 부족합니다. 이것을 잃는 순간 웹소설 또한 문단문학 비슷한 무언가가 되어 몰락할 것입니다.

100원은 피입니다. 땀입니다. 독자의 피땀입니다. 노동의 대가로 받은 귀중한 돈입니다. 우리가 버는 돈을 돈으로서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그 돈을 더 토해내게 할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일정한 성공을 거둘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사고가 납니다’.

그러니 성공이라는 결과는 같을지라도, 우리는 ‘피땀에 상응하는 글을 쓴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독자를 연민해야 합니다. 독자를 동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독자분들도 작가를 연민하고, 동정합니다. 그 글에 담긴 고뇌를 이해합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우리에겐 연민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누가 먼저 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연민해야 합니다. 지친 어깨를 서로 부축해주어야 합니다.

언젠가 웹소설의 시대가 가고, 서사의 형태도 달라지고,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인간을 존중하는 작품은, 인간을 연민하는 작품은 반드시 사랑받으리라는 점입니다.

Ⅳ. 독자분들께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조선구마사>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어느새 저의 잡다한 생각을 늘어놓는 자리가 된 듯합니다만, 그래도 여기서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몇 마디 남깁니다.

얼마 전에 게임 <페이트 그랜드 오더>의 운영을 둘러싸고 큰 사건이 있었지요. 게임사의 대처도 문제였지만, 저는 이런 말이 특히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게임을 즐기는 유저끼리 서로를 ‘호구’라는 식으로 멸시하거나, 혹은 자조하는 태도도 이러한 사태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는 말입니다. 유저 스스로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데, 누가 존중해주겠냐는 비판이었죠.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페그오>를 시작으로 터져나오는 게임계의 여러 문제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저는 독자 여러분이, 스스로를 좀 더 존중했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저는 스스로를 ‘누렁이’라고 칭하는 독자분들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거나 주워먹는 똥개가 아닙니다. 보다 재미있는 작품, 보다 가슴뛰는 작품, 보다 설레는 작품을 찾아 나서는 것이 어째서 비하되어야 할 일입니까? 그것은 문명인의 모습입니다.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존중은 상호 간에 이루어져야 하며, 또한 동시적이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존중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취미가, 여러분이 향유하는 문화가 존중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몇몇 작가가 자신만의 작품론을 세우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건 낡은 방식입니다.

독자분들이 함께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돈을 쓰는 고객이니 존중해야 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중이 아니라 아첨입니다. 그것은 ‘갑질’과 갈등과 멸시만 낳습니다.

여러분의 100원은 귀중한 노동의 대가입니다. 여러분의 피와 땀입니다. 여러분은 피와 땀으로 어떤 작품이 의미가 있음을 증명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작가는 그 피와 땀에 ‘창작의 고뇌’로 응하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존중은 동시에 성립하면서 동시에 무너집니다.

저는 무슨 계몽을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계몽가도 예언가도 아니고, 그냥 글 쓰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저 호소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건방진 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렁이’ 운운은 일종의 자조적 밈일 뿐, 여러분 스스로는 충분한 자긍심을 안고 살아가는 분들일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저는 제가 존중받고 싶은 것과 같이, 제가 여러분을 존중하고 싶은 것과 같이, 여러분이 스스로를 좀 더 존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이 즐기는 문화를 존중할 때, 즐기는 자신을 존중할 때, 작가와 독자를 넘어서서 사람들 자체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성립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분명 더 많이 보듬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삶에 지친 우리 모두가 위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구마사>처럼 ‘대충 이렇게 수준 맞춰서 던져주면 맛있게들 먹겠지’라는 작가와 작품들도 사라질 것입니다.

언제나 감사를 담아.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

하굣길에 우연히 마주친 소녀는, 암살 시도를 피해 도망친 국가원수 미리안이었다. 소년 주견하는 도와 달라며 내민 소녀의 손을 잡았지만, 음모에 휘말리며 부모를 잃고, 복수를 위해 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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